45. 그래서 가는 거야.
여자의 비명소리였다.
이런 곳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난다는 것은 뻔한 상황일 때가 많았다.
또 어떤 미친놈이 발정이 난 모양이었다.
사람이 극한에 몰리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기도 하지만 본능에만 충실해지는 미친년놈들도 있었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분신을 남기고 싶어서 더 성욕이 끓어오른다고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상대의 의사에 반해서 강제로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다.
몸을 일으키고는 나무에서 내려가려고 하자 대장 새가 내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어랍쇼? 뭐하는 거야?>
쪼롱! 쪼롱!
"기다려보라는 것 같은데?"
쪼로로롱!
대장 새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대장 새는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보였다.
말을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면 분위기를 기가 막히게 잘 파악하는 녀석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먹이에 대한 열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한 녀석일 것이다.
<집사! 이 녀석 집사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먹이 활동에 소홀히 하는 꼴은 못 보겠다는 것 아닐까?>
나호가 제법 매서운 눈으로 대장 새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장 새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영체인 나호라 보이지 않는 것인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렇게 내려가지 말라는데 조금 기다려보지 뭐."
말을 하며 나뭇가지에 걸터앉자 대장 새가 특이한 소리를 냈다.
그러자 대여섯 마리의 새가 대장 새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대장 새가 모여든 새들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것 같았다.
대장 새의 지시를 받은 새들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날아갔다.
명령을 내린 대장 새가 마치 자기 자리라는 듯 무릎 위에 앉았다.
<어쭈! 박힌 돌 빼겠는데?>
대장 새의 천연덕스러운 행동에 나호가 실소를 터뜨렸다.
무릎에 앉은 대장 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노란 머리깃을 다듬기 시작했다.
머리 정중앙에서 멋들어지게 위로 솟은 머리깃이라 다듬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지만 오랜 경험 덕분인지 능숙하게 단장을 했다.
<아우! 저 몸짓 좀 봐.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이 많은 새들을 거느린 대장이라고 하겠어? 그렇지 않아?>
늠름하기보다 귀여운 몸짓으로 단장을 하고 있는 대장 새는 대장이라기보다는 사랑받는 막내쯤으로 보였다.
"그래. 대단하기는 하지. 작은 녀석이 통솔하는 것이 보통은 넘는 것 같더라."
<그러게. 부러운 모습이기도 해. 오랜 세월 혼자 살아온 내 입장에서는 더 부럽기도 하지.>
나호가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비명소리가 났던 곳에서 특이한 새소리가 났다.
한 마리의 새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서너 마리의 새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독특한 높낮이로 울며 정보를 전달하는 것 같았다.
이 숲에는 워낙 다양한 새가 살기 때문에 새가 이렇게 울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새들의 소리를 듣고 있던 대장 새가 무릎에서 냉큼 내려오더니 옆으로 비켜섰다.
마치 어서 나무를 내려가라는 신호 같았다.
"어째 내가 이 녀석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 같네."
<그럼 뭐 어때. 사냥에 도움도 주고 경계도 완벽하게 서잖아. 눈치 있게 움직이기도 하고.>
시간이 갈수록 새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기는 했다.
녀석들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한두 번만 표현하면 귀신 같이 알아채고는 취향대로 움직였다.
상당한 학습능력을 가진 새들 같았다.
반려조(伴侶鳥)로 키워도 좋을 것 같은 녀석들이었다.
나무에서 내려오자 정확하게 비명소리가 났던 방향으로 먼저 움직이는 대장 새였다.
대장 새의 움직임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새들이 정찰결과를 수시로 대장 새에게 갖은 소리로 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리가 났던 곳과 가까워지자 대장 새가 내 가슴께로 오더니 내 속도를 늦추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낯선 것이 있다는 신호였다.
함께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보이는 행동 중의 하나였다.
물론 먹이를 몇 번 얻어먹고 난 후부터 보인 행동이었다.
속도를 줄이고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덤불 너머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렇게까지 발소리를 줄일 필요도 없었다.
워낙 소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흐허허허! 허허허! 맘에 들어. 아주 마음에 들어. 어쩜 이렇게 생길 수가 있지?"
"그러게요. 취향저격입니다."
"딸은 내거니까 건들이지 마!"
"형님 너무···."
"쓰읍! 해보자는 거야?"
"아닙니다. 형님! 형님 다 드십시오."
"그래야지. 그 놈은 어쩌고 있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 오기 전에 다시 밟아주고 왔습니다."
"사냥은 하게 두지 왜?"
"놈의 움직임을 보시고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놈이 제대로 움직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런 놈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알았어. 간간이 가서 밟아주고 와. 그런 수모는 한 번으로 족하니까."
"예. 형님!"
"너희들은 저것들 데리고 저리 가서 재미 좀 봐. 나는 여기가 좋으니까."
더러운 이야기를 잘도 하고 있었다.
얼굴을 확인하기 전부터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저 놈들은 어제 미우라에게 목이 찔렸던 놈들이었다.
평상시에도 나쁜 짓을 일삼던 놈들이었지만 이런 짓까지 서슴없이 저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미우라 놈 밑에 놔둘 걸 그랬나? 저놈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네.>
'내가 참 교육을 시켜주면 되지.'
<여기서 나가려고? 숫자가 너무 많아.>
'걱정하지 마. 생각이 있으니까.'
<그거? 그거 터뜨리려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해야지. 아끼다 똥밖에 더 되겠어?'
이야기를 하며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산다래를 닮은 열매 두 개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가 놈들이 있는 곳으로 던졌다.
그러자 부근에 있던 새들이 급하게 피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 주변을 떠나지 않던 대장 새도 멀찍이 멀어졌다.
<한국인의 매운 맛이다. 이놈들!>
나호가 놈들을 향해 노호성(怒號聲)을 터뜨렸지만 놈들이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산다래를 닮은 열매가 바닥에 떨어지면서부터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최루탄이 터진 것처럼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저 열매는 대개 산다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색깔은 다양했다.
저렇게 터뜨리지 않고 불에 살짝 구워 먹으면 그 맛을 잊기 어려울 정도로 맛있는 열매였다.
전생에 우리는 저 열매를 '최루 다래'라고 불렀었다.
꽉 움켜쥐었다가 던지기만 하면 최루탄과 비슷한 효과를 내서 발견할 때마다 챙겨놓기도 하던 열매인데 이곳의 산 정상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 열댓 개를 따서 인벤토리에 보관을 해둔 상태였다.
던지기 전에 꽉 움켜쥘 때 힘 조절을 잘해야 하는 열매이기도 했다.
너무 힘을 주면 적에게 던지기 전에 터져버리기 때문이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마음에 드는 여자나 남자를 붙잡아 풀숲으로 흩어지려던 놈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며 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하나만 던져도 효과가 좋은 최루 다래를 두 개나 던져놓았기 때문이었다.
놈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 보관하고 있던 옷으로 입과 코를 막고 놈들 앞으로 달려 나갔다.
"콜록! 콜록!"
"우에에엑! 우엑!"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쉬던 놈들은 토가 쏠리는지 헛구역질을 해대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지고 있던 나무창으로 놈들의 다리와 급소를 가격하기 시작했다.
<아우! 집사! 아무리 그래도 남자의 급소인데···.>
'남자 망신이란 망신은 다 시키는 놈들은 달려있을 필요가 없어.'
최루 다래에서 나오는 매운 냄새는 처음 맡으면 죽을 만큼 힘든 것이 특징이었다.
몇 번 맡고 나면 점점 적응이 되면서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이렇게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다.
익숙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힘든 냄새이지만 처음인 저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저놈들은 감사하게 생각해야 했다.
최루 다래 중 가장 약한 최루 다래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최루 다래는 대개 붉은색에 가까워질수록 매운 정도가 심해졌다.
조금 전에 내가 던진 것은 푸른색이었으니 가장 약한 최루 물질이 뿜어져 나왔다.
그래도 처음 경험하는 것이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놈들에게 잡혀서 몹쓸 짓을 당할 뻔한 사람들도 고통스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잠시 눈물 콧물 좀 빼는 것이 이놈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이 사람들 때문에 가장 약한 최루 열매를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배려까지 알아줄리 만무하지만 말이다.
퍽! 퍽! 퍽! 퍼벅!
"으아아악!"
"아악!"
"누구야? 혹시 절벽 아래 그 놈··· 아악!"
"사, 살려! 으어어억!"
그래도 소리라도 제대로 지르는 놈들은 살살 맞은 축에 들었다.
제대로 급소를 맞은 놈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자신들을 범하려던 사람들이 나가떨어지자 도움을 요청하며 손을 뻗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저들을 더 이상 도울 생각은 없었다.
매정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충분했다.
몹쓸 짓을 피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준 것이었다.
투두두둑! 투둑! 툭!
몹쓸 짓을 당할 뻔한 사람들 앞으로 나무창을 던졌다.
자신들을 공격하는 줄 알고 움찔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으로 직접 해결하시오. 죽이든 살리든."
"선생님! 이왕 도와주신 거 조금만 더···. 콜록! 콜록!"
"도와주십시오. 여기는 너무 무서운 세상입니다."
"저희는 힘이 없습니다. 흐흑!"
"살려주십시오. 선생님! 콜록! 콜록! 너무너무 힘이 들어요."
"배가 너무 고파서···. 에이취이! 먹을···."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지 않는 것이 다행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들의 우는 소리는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리를 뜨려고 하는 순간 스킬 마나의 눈이 반응했다.
[띠링! 134,245번 히가시 하루마(일본, 여, 8세)]
여덟 살 정도로 어린 아이는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쪼로롱! 쪼로로롱!
대장 새가 저쪽에서 날아오더니 덤불 위에 앉았다.
덤불 안에 아이 하나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이가 숨어있는 덤불에 관심을 두자 조금 전까지 몹쓸 짓을 당할 뻔했던 여자가 급하게 일어나더니 덤불 앞으로 가서 앉았다.
덤불 안에 감추어진 것을 절대 내보이고 싶지 않다는 몸짓이었다.
사실 아이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면 두고두고 마음에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련 없이 돌아서 나왔다.
충분히 멀어지기도 전에 내가 떠나온 자리에서는 다시 폭력이 행해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약자였던 자들이 이제는 깔아진 판 위에서 강자되어 행하는 폭력이었다.
비명소리는 제법 오래 계속 되었다.
<인간이라는 것은 말이야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저 소리만 들으면 누가 약자인지 감이 잡히지 않잖아.>
"다 마찬가지지."
시스템이 약속했던 대로 숲에는 24시간이 지날 때마다 새로운 생명체가 하나씩 추가되었다.
토끼 왈라비처럼 덩치가 큰 생명체도 있었고, 던전쥐처럼 작은 생명체도 있었다.
날이 갈수록 점점 강한 생명체가 추가되었지만 모두 F급이었다.
덩치는 커도 방어력과 공격력이 낮은 몬스터들이라 혼자서 잡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날이 더해갈수록 피곤도 쌓여갔지만 쉴 수 없었다.
인류 전체에서 1등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냥을 하면서도 하루에 한 번씩 미우라 놈을 찾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우라 놈은 그날이후 토굴 밖을 나설 수 없었다.
날마다 놈에게 던전쥐를 선물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놈은 내 선물이 아니라도 토굴 밖을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약탈자로 찾아왔던 놈들은 집요했다.
일본인 특유의 성질을 잘 드러내는 놈들은 날마다 미우라를 찾아와 폭력을 행사했다.
말 그대로 미우라를 감정풀이 대상으로 점찍은 것이었다.
미우라가 몸을 추스를 시간 자체를 주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죽이는 것은 겁이 났는지 최소한의 먹을 것은 가져다주었다.
그 음식으로 인해 미우라는 굶어죽지 않고 꾸역꾸역 버텨냈다.
그렇게 시스템이 말한 보름, 360시간이 딱 15분 남은 지금 나는 절벽을 향해 걷고 있었다.
<집사! 왜 굳이 지금 미우라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데? 왜? 대답 좀 해봐. 나 불안하단 말이야.>
쪼로로로롱! 쪼로로롱!
대장 새도 머리 위에서 불안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집사! 집사!>
쪼롱! 쪼롱! 쪼로롱!
대장 새는 어느 순간부터 영체인 나호를 보는 것도 같았다.
물론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왜 가는데? 이곳에 있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왜?>
"그래서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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