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낯선 조형물
전반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후반부는 지금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았다.
그리고 난이도는 점차 상승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발현율이 0%가 된 사람들도 매번 함께 소환됐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시스템이 말하는 제한 시간이 지나고 보상을 산정하는 동안은 어떤 짓을 해도 페널티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이것을 악용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약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죽임을 당한 사람은 제한 시간이 끝날 때부터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자신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1차 소환 중간에 죽임을 당하거나 죽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1차 소환에서 죽임을 당한 순간부터 2차 소환에서 불려오기까지의 기억이 없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니 복수를 하겠다고 설치는 사람도 없었다.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물론 이것을 사람들이 완전히 이해를 한 것은 9회 차 이후였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소환이 됐었고 우리 국민들은 뭐든 빠르니 이것도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빨리 알아챘을 수도 있다.
물론 비세계에서만 알아냈을 뿐이고 현실에서는 비세계로 불려간 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미우라는 나에게 죽임을 당했던 것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토굴에 매일 찾아와 던전쥐를 던져주던 사람을 따라 절벽을 올랐던 것까지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밤이니 절벽을 올랐던 것마저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맞아. 놈은 열두 번 죽게 될 거야. 내 손에 의해서 말이야.'
누군가를 열두 번이나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잔인한 이야기지만 미우라 놈이 우리 민족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열두 번이 아니라 천이백만 번을 죽여도 부족했다.
<저기 저 남자! 저 사람도 하위 30%라고 가장 먼저 소환해제 됐었던 사람인데 다시 와 있네. 집사 말대로 인가봐. 모두 와있어. 이걸 축복이라고 해야 하는 거야? 아니면 저주라고 해야 하는 거야?>
'이곳에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축복이지. 소환이 끝나고 지구로 돌아가도 이곳의 상처를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것도 축복이고.'
<하긴 지구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도 많으니까.>
미우라 놈이 자고 있는 토굴에도 가보았다.
놈은 토굴 안에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가자. 사냥해야지.'
<아직 말이 없는데 움직이는 거야? 잡지 않아야 하는 거면 어떻게 해?>
'전회에서 잡아야 하는 것으로 분류되면 다음에도 이어졌었어. 그러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다면 잡아야지.>
오자마자 사냥의 시작이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좋은 성적을 내는 지름길이니 최대한 빨리 움직이는 것이었다.
현재는 F급 몬스터 열다섯 종이 숲에 있는 상태였다.
이번 소환에는 E급 몬스터가 추가되거나 특정 조건을 달성하라고 할 것이다.
두 가지가 모두 적용될 수도 있고 말이다.
어쨌든 미리 준비해온 정글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정말 쉴 새 없이 사냥을 하고 도축을 해서 부산물을 거래했다.
물론 이곳 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새들은 먹이를 제공하자 다시 충실한 정찰병 역할을 했다.
그렇게 사냥을 하다 날이 밝았다.
날이 밝자 사람들은 평상시의 하루의 시작처럼 하루를 시작했다.
나를 제외한 누구도 소환이 해제되어 지구를 다녀온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소환되어 온 후 줄곧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정산을 마치고 상태창에 대해 들은 것도 동일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비세계가 이어지는구나. 그런데 매번 같은 곳으로 소환되지는 않는다고 하던데?>
"지구가 아니라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 같아."
<재미있네. 이래서 사람들의 동요가 적구나. 지구를 다녀오는 것을 기억하면 사람들이 저렇게 멀쩡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거든.>
"기억한다고 해도 어쩌겠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이곳의 기억을 지구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절망하기밖에 더 하겠어?"
<그런가?>
쫑! 쫑!
쪼롱이가 갑자기 내 옷깃을 잡고 당겼다.
따라오라고 할 때 자주 보이는 행동이었다.
"왜?"
쪼롱! 쫑! 쪼롱!
어서 가자는 듯 머리 뒤로 돌아가더니 제 작은 몸으로 내 머리를 밀었다.
"알았어. 가자."
<뭘 봤는데 쪼롱이 이 녀석이 이러는 걸까?>
"가봐야 알겠지."
저를 따라갈 의사를 표시하자 앞서 날아가며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살피는 쪼롱이였다.
하는 짓이 꼭 강아지 같았다.
어머니께서 쪼롱이를 보면 많이 좋아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생각을 하면서 쪼롱이를 따라가는데 쪼롱이가 상당히 멀리까지 가는 것이었다.
"어디까지 갈 생각이야?"
쪼롱! 쪼롱!
쪼롱이는 소리와는 달리 우아하게 날며 안내를 했다.
쪼롱이는 작은 몸집과는 달리 비행을 잘했다.
참새처럼 부지런히 날갯짓을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대장 새답게 우아하게 날갯짓을 했는데 바람이 불지 않을 때도 기류를 타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바로 앞에서 우리를 안내하면서도 나름의 우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쪼롱이의 앞뒤로는 쪼롱이가 대장을 맡겼던 새들이 함께하고 있었는데 다른 새들에게 들은 정보를 수시로 쪼롱이에게 전달을 하고 있었다.
이 녀석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웬만한 조직보다도 체계가 잘 잡혀있는 것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권력 갈등 같은 것도 없어보였다.
그만큼 쪼롱이가 잘하는 것인지 아니면 먹는 것을 그만큼 중시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이 녀석들 이렇게까지 멀리 정찰을 하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쪼롱이 녀석의 지배력이 여기까지 미친다는 것이 더 신기하다. 그치?>
"그러네. 여기는 소환된 사람도 없어 보이는데 뭐가 있다고 이렇게 안내를 하는 걸까?"
쪼롱! 쫑! 쫑! 쫑!
쪼롱이의 목소리가 유난히 밝았다.
평상시에도 경쾌한 목소리이지만 지금은 더 목소리가 가볍고 맑은 것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가고 있는 이곳은 소환 초기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혹시 숨겨진 기연이라도 있나 하고 왔었는데 어느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물론 너무 넓은 곳이라 꼼꼼하게 살피지 못해서 놓쳤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한동안 산을 돌아온 우리는 이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쪼롱이가 멀리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지금 우리가 오르고 있는 산은 우리가 소환된 산은 아니었다.
우리가 소환된 곳에서 조금 떨어진 다른 산이었는데 이 산은 바위가 유난히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집사! 힘들어? 영체 상태인 것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야. 대한민국을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단숨에 갈 수 있었거든.>
"이 정도는 괜찮아. 운동한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능력치를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어차피 운동해야 하잖아."
마나가 많다고 무작정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까지는 마나만 투자하면 바로 능력치를 올릴 수 있다.
마나를 그만큼 모았다는 것만으로도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봐준 것이었다.
물론 소지하고 있던 부산물이나 금으로 마나를 사들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것까지도 일정부분까지는 능력으로 봐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정한 한계가 넘어서고 나면 노력을 해야 능력치를 상승시킬 자격을 주었다.
스킬의 경험치가 차면 마나를 투자해서 스킬 등급을 상승시키겠냐고 묻는 것처럼 능력치도 그랬었다.
그러니 마나만을 믿고 몸을 게을리 하면 그 결과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민첩 능력치 덕분에 큰 힘들이지 않고 산의 정상에 올랐다.
산의 정상에 올라온 순간 쪼롱이가 왜 우리를 데리고 이곳까지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산 아래로 미로 같은 조형물이 보였다.
분명 지난 소환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내려가 보자."
쫑! 쫑!
"그래. 잘했어. 애들에게도 잘했다고 말해주고. 이건 특별상이라고 말도 해줘."
소환 대기실 한쪽 벽면에 가득 채워두었던 소고기의 일부를 꺼내주었다.
쫑! 쪼로로롱!
소고기를 본 쪼롱이가 새들을 불러 모았다.
금세 새들이 모여들자 쪼롱이가 뭔가를 열심히 말했다.
그러자 새들이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이내 소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게 눈 감추듯 먹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정말 놀랍네. 다음에도 여기를 온다면 그때는 소 열 마리는 잡아와야겠다. 소 한 마리로는 어림도 없겠어.>
나호는 새삼 새들의 식성에 놀라고 있었지만, 내 눈엔 새들이 먹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을 짓은 채 바라보고 있는 쪼롱이가 들어왔다.
지구에서는 모든 것이 낯설어서 나호에게 이것저것 배우느라 여념이 없던 쪼롱이였는데 이곳에서는 그야말로 대장이었다.
어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쪼롱이가 이 순간만큼은 결코 작은 새로 보이지 않았다.
새들의 즐거운 간식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낯선 조형물을 향해 산을 내려갔다.
그러다 저곳이 던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산을 내려가려던 것을 멈추고 산의 정상에서 보이는 미로 같은 조형물을 꼼꼼하게 살폈다.
"기억술사라는 직업이 이럴 때는 도움이 많이 되네. 일일이 그리지 않아도 되잖아."
<기억력도 좋아졌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좋아진 것과 같지 않겠어?"
쫑! 쫑! 쫑쪼로롱쫑!
쪼롱이가 높이 날아다 내려오고 다시 높이 날았다 내려오는 것을 반복했다.
"네가 위에서 살폈다고?"
쫑!
"그래. 고마워. 잘 기억해 둬."
쫑!
산 정상에서 살필 수 있는 것은 살피고 난 후 인벤토리 상황을 점검했다.
인벤토리에 들어있던 물건의 상당수를 빛의 나무에 빼둔 상태이지만 이 정도면 당장 던전에 들어가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내려가자."
산을 내려가 미로로 보이는 조형물로 접근했다.
위에서 봤을 때는 콘크리트로 된 건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려와서 보니 그렇지는 않았다.
<재질이 나무 맞지? 영락없이 콘크리트처럼 보이네.>
나호가 조형물을 보며 말했다.
그러다 나호가 조형물을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했다.
영체인 나호이니 당연히 조형물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실체가 있는 것처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신선하네. 이런 느낌 정말 오랜만이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
<있었지 그럼. 집사에게 묶이고 나서 던전에 들어가면 간혹 나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공간들이 있었어. 분명 그런 공간에는 뭔가 중요한 것이 있을 것 같았는데 집사에게 알릴 방법이 있어야 알려주지.>
나호가 정말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말해줘."
<대변혁 이후가 되면 내가 집사 부자로 만들어줄 수도 있어. 좋은 물건이 있는 비밀 공간을몇 군데 알고 있거든. 그때에는 알면서도 말을 해줄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 말해줄 수 있잖아. 생각만으로도······.>
나호가 몇 군데 던전 이야기를 했다.
영체 상태로 살아온 나호이니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을 많이 봤을 것이다.
나호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입구를 찾았다.
입구는 조형물을 절반 정도 돌아왔을 때 있었다.
쫑! 쫑!
"그래 저기가 입구 같아. 위험할지 모르니까 쪼롱이 너는 대기실로 우선 들어가."
쭈루루! 쭈루!
<왜 싫어? 그냥 들어가. 저기가 던전이면 들어가는 순간 불길이 튀어나오는 곳도 있어. 너는 한방에 훅 갈 수가 있어. 그러니 말 들어.>
나호가 쪼롱이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했다.
나호의 설명을 열심히 듣던 쪼롱이가 새들을 불러 모으더니 뭔가를 지시했다.
몇 마리는 어딘가로 날아가고 몇 마리는 조형물의 입구를 지켰다.
<뭔지 모르지만 폼이 나네. 사람이든 동물이든 꼬리보다는 확실히 머리가 나은 것 같아.>
지시를 마친 쪼롱이가 대기실로 들어갔다.
대기실에서도 밖을 볼 수 있으니 여러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다.
대기실에서는 얼마나 멀리 볼 수 있는지 궁금하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런 의사소통까지는 쪼롱이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쪼롱이가 대기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입구로 다가갔다.
던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