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시험의 산
첫 번째 구간인 생존은 무사히 지난 것 같았다.
몬스터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시험한 것 같은 첫 번째 구간이었다.
번쩍하는 것과 동시에 환경이 바뀌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숲이 아니었다.
처음 우리가 들어왔던 던전의 입구였다.
<아니 왜 이리 다시 데려다 놓은 거지? 그것보다 쪼롱이는?>
"대기실에."
대답만 하고는 주변을 살폈다.
확실했다.
이곳은 우리가 3일 전에 보았던 던전의 입구였던 것이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몰라 당황스러웠지만 혹시 다른 곳인가 하고 3일 전에 보았던 것과 비교를 하였다.
같은 던전인지 구분하기 가장 좋은 것은 던전 입구에 자라고 있는 덩굴 식물이었다.
던전을 뒤덮고 있는 덩굴 식물은 지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다른 던전인데도 같은 덩굴 식물이 자라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던전마다 덩굴 식물들은 조금씩 특색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지역의 던전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어느 지역의 무슨 덩굴 식물로 구별해서 부르는 것을 더 선호했었다.
우리가 들어왔던 던전에는 왼쪽 감기 식물의 대표 격인 나팔꽃이 피어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나팔꽃은 아니었다.
던전 나팔꽃으로 색상이 다양한 것이 특징인 식물이었다.
던전마다 나팔꽃의 모양은 비슷하지만 색상은 다양해서 '노란 나팔' 또는 '파랑 나팔' 이런 식으로 구분해서 불렀는데 이곳은 다양한 색깔의 나팔이 피어있었다.
꽃이나 잎의 색이 다양할수록 다양한 환경이 나타날 수 있는데 이곳도 그럴 가망성이 높았다.
그런데 어떤 던전에서도 공략 도중 다시 입구로 데려다 놓는 경우는 없었다.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던전을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당황하는 이유였다.
그때 메시지가 들렸다.
너무도 황당한 메시지라 어안이 다 벙벙해지는 것 같았다.
[띠링! 이 던전은 시험의 던전입니다. 첫 번째 구간의 시험을 치룬 결과 강대한님께 이 던전은 의미가 없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이에 강대한님께는 특별한 시험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응하시겠습니까?]
"어떤 시험인데?"
[결정을 하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집사! 이것들 치사한 것은 알아줘야해. 정말 기분 나빠. 집사가 빨리 강해져서 시스템 버릇 좀 고쳐줘.>
나호가 나만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치사하기는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제안을 받아들여서 손해날 리는 없었을 것 같았다.
"좋아. 받아들이겠어."
<우리 집사 호구 아니다. 시험의 난이도를 높이거나 바꾸면 그에 따른 보상은 확실히 줘야해. 지금까지 고생한 3일은 어떻게 할 건데? 남들보다 3일이나 뒤처지게 됐잖아.>
시스템이 들을지 확신할 수 없는 말을 참 열심히도 하는 나호였다.
쪼로로롱! 쫑! 쫑!
뭘 안다고 소환 대기실에 있는 쪼롱이도 열심히 쪼롱거렸다.
[먼저 시간에 대한 겁니다. 지난 3일간에 얻은 마나나 경험치는 그대로 유지한 채 시간은 되돌려졌습니다. 지금은 강대한님께서 이 던전에 처음 입장한 그 순간입니다.]
"시간이 되돌려졌다는 거야?"
[되돌려졌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 같기는 합니다. 지금은 3일 전 강대한님께서 덩굴손의 검색을 막 통과한 순간이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3일 전으로 되돌려진 건가?"
[이곳에서의 시간은 외부의 시간과 별개입니다. 그런 것은 염려하실 것이 되지 못합니다.]
"나보다 먼저 입장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내 뒤로 입장한 사람도 있을 것 아니야. 그 사람들은?"
[시간이란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강대한님께서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간은 그렇다 치고 이제부터 뭘 해야 하지?"
[강대한님께서는 지금부터 '시험의 산'에 오르시게 될 겁니다. 제한 시간은 시험의 던전과 마찬가지로 30일입니다. 빨리 정상에 오를수록 보상은 두둑하실 겁니다.]
"시험의 산은 나만 오른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강대한님만 오르실 겁니다.]
"그럼 내가 30일 안에 정상에 오르면 시험의 던전에서 1등인 건가?"
[강대한님은 시험의 던전의 등수가 무의미합니다.]
"보상이 있으니까 그렇지. 인류 최초 보상 그거 받아보니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어."
[그 이상의 보상을 받게 되실 겁니다. 30일 안에만 오르신다면 말입니다.]
<그만큼 난이도가 엄청나다는 말이잖아. 이거 물 먹이려는 거 아니야?>
나호가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30일이 아니라 20일 안에 오르면 어떻게 되는 거야?"
[30일 안에 오르시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정상에 빨리 오를수록 보상은 확실할 겁니다.]
"그런 말은 너무 두루뭉술해서 도전의욕이 고취되지 않아. 조금 더 구체적인 보상 내용을 말해주면 좋겠는데?"
<잘했어. 집사. 이 정도는 요구해야지. 사람이 보상이 뭔 줄 알면 없던 힘도 나오는 법이야.>
쫑! 쫑!
대기실에 있는 쪼롱이까지 쫑쫑거리며 같은 생각임을 표시했다.
[30일 안에 성공하시면 시험의 던전을 1등으로 통과한 것으로 간주해서 1등 보상을 지급하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30일에서 단축하는 시간에 상응해서 던전지도의 등급을 상향조정해 드리겠습니다.]
"F급 던전 지도 말이지?"
[그렇습니다. 5일 이상 단축될 때마다 1등급씩 상향조정해드리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제한이었다.
시험의 산이 오르기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없지만 열심히 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됐다.
그런데 나는 이것에 하나 더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혹시 말이야. 그것에 하나 더 요구할 수도 있나?"
[미우라 에이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알고 있었어?"
[저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 내가 여기에 있는 동안 미우라가 입장을 해서 활약을 하는 것은 원하지 않아. 나는 그놈을 꼭 막아야 해. 이번 생을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해."
[그 어떤 것으로도 특정인의 평가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1차 소환 때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2차 소환인 시험의 던전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 던전은 개인을 온전히 평가하는 장입니다. 그러니 그 부탁은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너무도 단호하게 대답하는 시스템이었다.
비세계는 각성의 적합성을 평가하는 장이었다.
그러니 시스템의 말대로 누군가의 방해가 있어서는 안 되는 곳이기는 했다.
사실 1차 소환에서 미우라 놈을 보름간이나 토굴에 붙잡아 둘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시스템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답답함이 밀려왔다.
[대신 한 가지는 해드릴 수 있습니다. 만약 강대한님께서 보름 안에 시험의 산을 정복하신다면 시험의 던전에 입장하는 미우라의 몸 상태를 지금의 상태로 입장시키겠습니다.]
[참고로 이 던전에 입장하면 최적의 몸 상태로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강대한님께서는 최적의 몸 상태였기 때문에 따로 적용할 필요가 없었을 뿐입니다.]
"보름 안에 놈이 먼저 이 던전에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저희가 다루는 시간은 강대한님께서 경험하시는 시간과 다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긴 시간이라는 것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시스템이었다.
내가 회귀한 것도 어쩌면 시스템의 영향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세계도 그렇고 던전도 그렇고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니 시스템의 말을 듣는 것이 가장 현명할 것이다.
"좋아. 지금이라면 내가 던전에 들어오기 전 상태를 말하는 거지?"
[지금 이 순간의 몸 상태입니다. 강대한님께서 보셨을 때보다 지금이 더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약탈자 무리가 다녀갔거든요. 약탈자 무리를 공격한 강대한님을 미우라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시스템은 뜻밖의 정보까지 말해주고 있었다.
약탈자 무리가 여자와 어린 남자들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해서 구해주었는데 그 일 때문에 미우라가 당한 모양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이 어떻게 저렇게 풀리는 거야? 참 신기하기도 하다.>
"내가 매일 자루를 들고 놈의 거처로 가는 것을 누군가 봤나보네. 던전쥐가 아니라 먹을 것이라도 던져주고 갔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르지."
<미우라 맞으면서도 기분 더러웠겠다. 으하하하!>
나호가 악당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그렇게 해줘.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2차 소환에서는 모든 사람이 시험의 던전에 입장하게 되는 거지?"
[그렇습니다. 용기 있게 먼저 입장한 사람들은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강제로 입장하게 될 것입니다.]
"좋아. 그것으로 충분해. 준비됐어."
준비됐다고 말을 하자 덩굴손들이 다가왔다.
다시 검색을 하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아니고 빼앗았던 물건을 돌려주었다.
정글도와 성냥, 라이터, 물 등을 돌려주고는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돌아가는 덩굴손이었다.
언제 경험해도 이해되지 않는 것 중의 하나였다.
덩굴손이 전해주는 물건을 받아들자 번쩍하면서 주위환경이 바뀌었다.
환경이 바뀌면서 내가 서있는 곳은 황무지였다.
황무지 중에서도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마르고 건조한 땅이었다.
멀리 피라미드처럼 솟은 산이 하나 보였다.
너무 멀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풀 한 포기도 자랄 수 없는 산으로 보였다.
번쩍하는 순간부터 30일이라는 시간은 가고 있을 것이다.
시작이라는 말쯤은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저기까지 가는 것도 30일안에 포함되겠지?>
"그런 것 같아. 출발하자."
<물을 돌려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던전 중에서도 사막형 던전이 가장 싫은데···.>
나호는 영체인 상태인데도 질색을 했다.
사막형태의 던전이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몬스터의 마나홀이나 마나통이 다른 던전보다 잘 나오기는 하지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고생은 몇 배를 해야 하니 좋아하는 각성자가 별로 없었다.
특히 짐꾼으로 따라오는 일반인들은 질색을 하던 던전이 사막형 던전이었다.
그래서 사막형 던전의 짐꾼인 경우에는 더 많은 마나를 일당으로 받았다.
안전사고 때문에 아예 일반인을 짐꾼으로 데려가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단 1분의 시간도 함부로 낭비할 수는 없었다.
멀리 보이는 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집사! 체력유지가 중요해. 여기 보니까 그늘이 전혀 없어. 탈수로 쓰러지기 딱 좋아. 그러니 너무 빨리 움직이지 마.>
"알겠어."
입을 여는 순간 입 안 가득 뜨거운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얼굴에 닿는 햇살도 피부를 뚫을 것 같았다.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얼굴과 머리를 가릴 것을 꺼내서 걸쳤다.
이런 곳에서는 최대한 피부를 가리는 것이 나았다.
<이거 한 달이 아니라 몇 달의 시간을 줘도 불가능한 것 아니야? 아니 그전에 포기하거나 죽는 거 아니야?>
'가봐야지. 포기할 수는 없어. 전생의 강자 중에는 던전에서 이것보다 더한 고생을 한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
강자는 그냥 되는 법은 없었다.
대변혁이 되면서 각성을 한 것도 사실 이런 비세계에서의 시험에 의한 것이었다.
전생에는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어서 운이 많이 작용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너무 더워서 나호에게 심상으로 대답을 하면서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이번에도 입고 온 오토바이용 슈트는 다행히 땀 배출이 잘 되는 것이었다.
지급 받았던 나무 봉만 지팡이 삼아 들고 다른 모든 짐은 인벤토리에 담은 상태였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정수 수세미도 인벤토리에 넣었다.
훨씬 홀가분해진 상태로 황무지를 걸었다.
그래도 바닥이 모래는 아니어서 속도를 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문제는 아무리 걸어도 산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산이 보이지 않는다면 덜 힘이 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리쬐는 태양도 시간이 지날수록 힘겨워지기 시작했다.
시험의 산으로 이동을 한지 정확하게 24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이곳은 밤이 없는 것 같았다.
밤이 되면 대지가 조금 식기라도 할 텐데 24시간이 지나도록 해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상태창에 표시된 시간이 아니면 시간 감각을 잃기 딱 좋은 곳이었다.
<집사! 잠깐 쉬는 것이 좋지 않을까? 땅을 파고라도 쉬어야 할 것 같은데?>
'땅 파다가 탈진 나. 그냥 움직이는 것이 나아.'
너무 더워서 땅 팔 힘도 없었다.
간간이 가지고 있는 옷가지와 나무 봉을 이용해서 간이 텐트를 만들고 그 안에서 휴식을 취할 뿐이었다.
그래도 몬스터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산을 향해 길을 걷고 있었다.
그렇게 던전에 들어온 지 정확하게 25시간이 되었을 때였다.
하늘 정중앙에 떠있던 태양이 사라졌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눈이 부시도록 환했던 공간에 찾아온 어두움은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문제는 이곳은 던전이라는 것이었다.
어둠이 찾아오는 순간 조금 전까지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감각이 좋아졌다고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움직이는 뭔가를 대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행히 나호와 쪼롱이가 있었다.
던전이 어두워지자 대기실에 있던 쪼롱이가 심하게 울기 시작했다.
어서 빨리 자신을 소환하라는 것 같았다.
이런 어둠에서는 꼬막손이라도 빌려야 했기 때문에 빠르게 쪼롱이를 소환했다.
소환대기실에서 나온 쪼롱이가 바로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나호는 내 등 뒤로 돌아가고 쪼롱이는 내 앞을 보고 있었다.
그때 조금 전에 들렸던 소리들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스스슥! 스슥!
분명 뭔가 접근하고 있었다.
살인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