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살인적인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자칫 공포를 자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나에게는 이런 경험이 많았다.
차분히 소리에 집중했다.
왼손에는 나무 봉을 오른손에는 정글도를 든 상태였다.
<여섯 시 방향! 지금이야!>
등 뒤에 있던 나호가 외쳤다.
나호가 말해주는 시각은 나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었다.
여섯 시라면 정확하게 내 등 뒤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소리 중 가장 가깝게 다가오는 소리는 등 뒤에서 들렸었다.
뒤로 도는 것과 동시에 왼손에 든 나무 봉으로 바닥을 강하게 찔렀다.
끼에에에엑!
괴성이 어두운 던전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어깨에 앉아있던 쪼롱이가 망설임 없이 바닥을 향해 돌진했다.
쪼롱이의 행동이 아니었다면 바로 정글도로 나무 봉에 꽂힌 몬스터의 몸을 가를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칼을 휘두를 수 없었다.
아직 눈이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여서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자칫 쪼롱이를 벨 수 있었다.
이곳은 달이나 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해가 사라지고 나자 어둠만이 가득했다.
지금 소리를 내고 있는 것들은 모두 몬스터 같은데 몬스터들도 눈에서 빛을 내지 않고 있었다.
아마 이 순간 이곳에서 빛을 내고 있는 것은 내 눈이 유일할 것이다.
차라리 눈을 감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두운 곳이었다.
쪼롱이가 바닥을 향해 돌진하고 잠시 후 다시 고통에 찬 몬스터의 소리가 들렸다.
<쪼롱이 녀석 몬스터의 눈을 파먹었어. 어둠속에 사는 몬스터라 눈은 거의 퇴화된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눈을 파먹은 쪼롱이가 재빨리 내 눈높이로 날아올랐다.
자신이 몬스터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쪼롱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재빨리 정글도를 휘둘렀다.
어둡지만 소리와 쪼롱이의 움직임으로 몬스터가 있는 곳은 정확하게 파악이 된 상태였다.
정글도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몬스터를 죽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몬스터의 피부는 상당히 부드러운 것 같았다.
무게감과는 달리 정글도는 어렵지 않게 몬스터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끼에에엑!
딱 거기까지였다.
축 늘어지는 느낌이 나는 순간 도축을 외쳤다.
몬스터가 죽은 것과 동시에 몬스터의 마나통에 담긴 마나는 내게 흡수가 됐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메시지는 들리지 않게 꺼둔 상태였다.
마나는 몬스터를 잡을 때마다 들리기 때문에 간혹은 방해가 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둠 속에서 전투를 치룰 때에는 몬스터의 죽음을 확신할 수 없을 때가 있으니 마나가 들어왔다는 알림음을 켜두는 편이 나았다.
몬스터의 죽음과 동시에 들리기 때문에 몬스터의 죽음을 확인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재빨리 상태창에서 알림음을 모조리 켜두었다.
이제 상태창이 알려주는 정보는 그 어느 것도 빠짐없이 들려올 것이다.
훤한 대낮이라면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지금은 이런 알림음이라도 있어야 조금이라도 더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인벤토리에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몬스터의 부산물은 바닥에 떨어졌다.
'뭐야? 느낌은 지렁이나 민고슴도치 같았는데.'
<그 중간 몬스터 같아. 나도 처음 보는 거야.>
'그 정도면 충분해.'
지금은 자리에 앉아서 잡은 몬스터를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빠르게 가죽으로 짐작되는 것만 집어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로 보아 상당히 많은 몬스터가 부근에 있는 것 같았다.
먹이를 탐하는 녀석들이라면 방금 도축해둔 몬스터에게 흥미를 보일 것이고, 인간에 대한 악의를 가진 몬스터라면 나를 쫓아올 것이다.
'나호야! 산 보여?'
너무 어두워서 멀리 있던 산이 보이지 않았다.
방향을 잡지 않고 움직이면 산과 더 멀어질 수도 있었다.
<희미하게 보여.>
'다행이네. 안내해줘.'
<3시 방향이야.>
나호가 말하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해가 사라지자 머리위에서 내리쬐는 햇살은 없어서 좋은데 바닥에서 올라오는 지열은 더 강해졌다.
지열뿐만이 아니었다.
뜨겁게 달궈진 바닥에 미지근한 물을 뿌린 것처럼 옅은 안개 같은 것이 피어오르면서 숨이 턱턱 막혔다.
수증기 비슷한 안개가 조금 가시고 나면 빠르게 추위가 몰려올 것이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옷이 있기는 하지만 살짝 걱정이 되었다.
인벤토리에서 정수 수세미 세 개를 꺼내 허리에 묶고는 방금 얻었던 가죽을 보관했다.
땅 속에서 사는 지렁이나 민고슴도치의 가죽은 햇볕을 가려주고 열기를 차단해주는 데 탁월했다.
가죽의 질감으로 보아 지렁이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았지만 정확한 정체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민첩 능력치가 12였다.
이 능력치를 이용해서 속도를 높이자 접근하는 몬스터들이 따라붙지 못했다.
그렇다고 몬스터를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3미터 앞! 지렁이!>
나호가 이렇게 말을 해주고 있었다.
쪼롱이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호보다 더 앞에서 날면서 나와 정면으로 마주칠 것 같은 몬스터의 눈을 파먹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해서 조금 그렇기는 하지만 쪼롱이는 지금 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특식이 차려진 뷔페에 와 있는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목소리가 경쾌해지고 있었다.
파먹는 눈알의 맛이 제법인 모양이었다.
워낙 맛있게 먹고 있기는 했지만 나와 나호는 굳이 그 맛을 묻지 않았다.
상상만으로도 쪼롱이에 대한 이미지가 망가지고 있는데 굳이 그 이상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둘의 도움으로 간간이 몬스터까지 잡으면서 산을 향해 달려 나아갔다.
안개가 가시면 추위가 찾아올 것이라는 예상은 적중했다.
뜨겁게 달궈졌던 대지가 급격하게 식으면서 피어오르던 안개를 닮은 수증기는 허공으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낮과 밤이 이런 식으로 순환을 한다면 어떤 식물도 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안개 같은 수증기까지 사라지자 한동안은 선선하니 기분까지 상쾌해졌다.
그래서 더 속도를 높여서 산을 향해 달렸다.
낮에는 도저히 이런 속도로 움직일 수 없었다.
밤에 최대한 이동을 해두어야 했다.
그런데 점점 던전의 기온이 내려가고 있었다.
춥다고 느껴진 것은 한참 전이었고 이제 더위보다 더 견디기 힘든 추위가 엄습하고 있었다.
<집사 이거 큰일이다. 이런 추위인데 이 녀석들은 어떻게 견디는 거지?>
'가죽이 추위 더위 모두에 강한 것 같아.'
<그래? 다행이네. 좀 나아?>
'한동안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더 추워지기 전에 몇 마리 더 잡아야겠어.'
<그래. 녀석들 찾아봐야겠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하더니 이곳에 사는 몬스터들이 딱 그랬다.
추워지기 시작해서 이곳에서 잡은 가죽을 둘렀더니 추위로부터 상당히 보호를 해주었다.
그래서 몇 마리 더 잡아서 몸을 감싸려고 했더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 녀석들은 땅속에서 사는 것 같은데 지표로부터 상당히 깊은 곳에서 사는 것 같았다.
감각을 총 동원해도 이들의 존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살인적인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를 피하기위해서는 상당한 깊은 곳에 집을 마련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현재는 몹시 추웠지만 한낮의 더위보다는 몸을 움직이기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낮엔 지나친 더위 때문에 심상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밤엔 지나친 추위 때문에 심상으로 대화를 나누어야했다.
쪼롱이도 대기실로 보낸 지 한참 전이었다.
어둠에 눈이 적응이 되었는데도 빛이 한 점도 없는 곳이라 가시거리가 1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나호와 쪼롱이가 없었다면 방향을 잡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추워지고 나서는 전혀 보이지 않네. 아무래도 그 시간에만 움직였던 것 같아.'
<내 생각에도 그래. 밝음과 어둠이 교차되는 시간에만 나타나는 것 같아.>
쫑! 쫑!
소환 대기실의 쪼롱이도 같은 생각이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쪼롱이는 소환물로 인정을 받아서 그런지 심상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쪼롱이 녀석 영악해. 듣기 싫은 이야기일 때는 반응도 하지 않으면서 이럴 때는 잽싸게 반응하잖아.>
나호가 소환 대기실을 보고 소곤거렸다.
쪼로록! 쪼록!
나호의 소곤거림까지 들었는지 쪼롱이가 제법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런 둘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삭막하던 던전이 온기가 더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의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던전의 기온은 날개 잃은 새처럼 무섭게 바닥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습기가 많은 곳이었다면 발이 바닥에 자꾸 달라붙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빠르게 기온이 떨어지고 있었다.
영하로 떨어진 것은 옛날이었고 지금은 영하 20도 될 것 같았다.
기온이 얼마나 더 떨어질지 걱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기온이 떨어질수록 움직임을 빨리해야 했다.
한 번 쉬면 다시 움직이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던전은 추위를 피할 곳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움직이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이제 시스템이 사기까지 치네. 이게 겨우 두 번째 소환된 사람을 들여보낼 던전이야? 이거 집사가 너무 치고 나가니까 경계하는 것 아닐까?>
'시스템은 이런 것으로는 사기는 치지 않아. 알잖아.'
<아는데 속이 상해서 그러지. 계속 이런 식으로 버티기는 힘들어. 쉴 곳을 찾던지 아니면 물약이라도 하나 사서 마셔.>
해가 사라지기 전에 잠깐 휴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지금 추위 속에서 몸을 움직인 것이 열두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무리 각성자라도 슬슬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쉴 곳을 찾아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쉴 곳이 보이지 않았다.
지렁이와 흡사한 몬스터의 크기가 1미터 이상이었으니 몬스터가 사는 집이라도 들어가서 쉬고 싶은데 아무리 봐도 몬스터가 들어갔을 법한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마나의 눈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자신들의 집으로 들어간 후 입구를 완전히 막아버린 것 같았다.
계속해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사라졌던 해가 나타나면 조금 나을 것 같지만 언제 해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해가 나온다고 해도 그때 분명 몬스터의 공격이 있을 것이다.
몬스터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체력을 비축해야하는데 쉴 만한 곳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아무 곳에서나 쉬면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잠이 들면 동사(凍死)는 정해진 당상이었다.
피곤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마나가 얼마나 모였는지 확인했다.
마지막 확인했을 때가 26이었는데 현재 32가 되어 있었다.
시험의 던전에서 3일 동안 사냥을 하고 부산물을 거래해서 모은 것이었다.
'물약을 사먹어야겠어.'
<그래 잘 생각했어. 우선 살아야하니까 아끼지 말고 사먹어.>
히든 상점에 파는 물약이 훨씬 성능이 좋지만 지금은 히든 상점에서 파는 물약을 살 마나도 없을뿐더러 히든 상점의 약국을 개방하지 못했다.
그러니 일반 상점에서 파는 약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 상점에서 약국으로 들어갔다.
약국에는 여러 종류의 약을 팔고 있는데 약의 형태로 나누면 크게 물약과 알약으로 나눌 수 있었다.
같은 등급의 약이면 물약과 알약의 효능은 같았다.
그런데 물약이 효능이 빠르기 때문에 급할 때는 물약을 그렇지 않을 때는 알약을 사서 먹는 편이었다.
상점에서 6마나를 주고 F급 피로회복 알약 두 개 구매했다.
<지금 먹어. 집사. 그래야 피곤을 이기지.>
'조금만 더 가다가 먹을게.'
당장만 생각한다면 지금 바로 먹어야했다.
하지만 이런 길을 얼마나 더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곳의 시간체계를 모르기 때문에 약은 최대한 아껴야했다.
겨우 32가 되었던 마나는 피로회복 알약을 두 매 구매하는 바람에 다시 26이 되었다.
105%의 발현율에 17짜리 마나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못해도 20의 마나는 늘 유지해야 한다.
이곳은 마나를 모을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으니 26의 마나도 사실 많은 것이 아니었다.
각성자들은 스킬도 그렇지만 이렇게 일상적인 생활을 할 때도 미세하게 마나를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은 약을 구매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최대한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고 난 후 약을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