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마나통은 안녕하십니까?-60화 (60/350)

60. 죽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한낮에는 간절히 바라고 바라도 불지 않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거센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체감온도가 단숨에 몇 도는 더 내려간 것 같았다.

이런 상태로 오늘 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이곳에 들어오고 난 후 얼마나 지났는지 시간을 확인했다.

40시간.

이곳에 들어오고 난 후 40시간이 막 된 참이었다.

해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열다섯 시간이나 지난 것이었다.

밤과 낮의 길이가 같다면 이 상태로 최소 열 시간을 더 버텨야 한다는 말이었다.

밤이 더 짧은 곳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피로회복약을 입에 넣었다.

삼키지 않고 혀 위에 두고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있으면 무척 쓰지만 물약과 비슷한 속도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알약이 녹으면서 피로가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F급이어서 놀라운 정도의 효능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나머지는 전생을 살아온 깡으로 버텨볼 생각이다.

휘이이이힝! 휘이이잉! 휘이이이힝! 휘이이잉!

거센 바람이 불다 연이어 조금 약한 바람이 불고 다시 거센 바람이 뒤를 이었다.

계속 거센 바람이 부는 것보다 이렇게 바람이 부니 바람이 더 세게 느껴지고 걷는 것도 더 힘들다는 느낌이 들었다.

걸음을 옮길 만하면 앞을 턱하니 가로 막는 느낌이 든 것이었다.

<이왕 바람이 불거면 뒤에서 불어오면 오죽 좋아. 그럼 걷는 것이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텐데. 집사 힘들지?>

'괜찮아. 참을 만해.'

<힘들면 언제든 말해.>

나호라고 해서 뾰족한 대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렇게 말하고 있었다.

'말하면?'

<응원송이라도 불러줘야지.>

'하하하하! 하하! 그래. 네 말 덕분에 힘이 좀 나네. 아직 멀었지?'

<부쩍 가까워지고 있어.>

피로회복 알약을 하나 먹고 피곤이 조금 풀리자 걷는 것이 확실히 나았다.

부쩍 가까워지고 있다는 나호의 말을 믿고 속도를 조금 높였다.

열여섯 시간.

열일곱 시간.

열아홉 시간.

추위와 폭풍 같은 바람을 헤치고 걷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눈이 감겨왔다.

피로회복 알약을 먹은 것은 이미 약효가 다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발을 멈출 수는 없었다.

죽음이 바로 옆에서 아가리를 벌린 채 내가 멈추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지옥 같았던 스무 시간이 지났을 때 하늘의 정중앙에 사라졌던 해가 나타났다.

칠흑 같았던 밤에서 눈이 부시도록 밝은 낮으로의 전환이었다.

순간 너무 강렬한 빛이 쏟아지자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삐이이이이!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재빨리 손으로 눈을 가렸다.

자칫 시력을 잃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검은 옷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썼다.

눈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검은 옷으로 눈을 가렸는데도 불구하고 눈이 따가웠다.

갑자기 너무 강렬한 빛에 노출이 됐기 때문이었다.

서서히 빛에 적응을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기는 한데 이곳은 태양에 적응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스스스슥! 스스슥!

밤이 됐을 때 나타났던 몬스터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집사! 두 시 방향!>

재빨리 정글도를 몬스터가 있는 곳을 향해 휘둘렀다.

강렬한 빛 때문에 아직은 눈을 감고 있는 상태였다.

검은 면으로 된 옷을 뒤집어쓴 채 눈을 감고 있어도 밝은 빛이 느껴질 정도로 갑자기 나타난 태양의 위력은 강력했다.

밤처럼 나호가 없었다면 몬스터에게 당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나호까지 감안해서 이런 곳에 보낸 것인지···.

스걱! 스걱! 스걱!

사람의 감각 중 하나에만 문제가 생겨도 전체 감각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너무 강렬한 빛에 순간 멍한 탓인지 한 번에 놈을 끝장내지 못하고 세 번을 휘두르고 나서야 놈을 처리할 수 있었다.

마나가 들어왔다는 메시지가 들리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이 시간이 몬스터의 출현이 많아 가장 위험하기도 했지만 태양으로 더 달궈지기 전에 최대한 이동을 해야 했다.

다행히 눈은 서서히 빛에 적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검은 천을 떼지는 않았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충분히 빛에 적응이 됐다 싶어서 검은 천을 쓴 채 서서히 눈을 떠보았다.

이 상태까지는 별 무리가 없었다.

조금만 더 적응을 하고 나면 검은 천을 제거해도 될 것 같았다.

그 사이 거대 지렁이를 닮은 몬스터가 다시 공격을 해 왔다.

하지만 이제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검은 천을 뒤집어쓴 채였지만 눈을 뜨고 있었기 때문에 몬스터의 움직임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스걱! 스걱! 스걱!

끼에에에엑! 끼에에에엑!

거대 지렁이를 닮은 몬스터는 마나와 전리품을 남기고 사라져갔다.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순간 나타나서 그렇지 이 녀석들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태양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순간만 조심하면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몰려들던 몬스터를 모두 제거할 때쯤에는 눈도 빛에 적응을 해서 이제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천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뒤집어쓰고 있던 천을 제거해 인벤토리에 넣고는 잡은 몬스터를 도축했다.

십여 마리의 몬스터를 잡은 상태라 혹시 몬나통이나 몬홀 하나라도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행운 능력치가 분명 작용을 하고 있을 텐데도 몬나홀이나 몬홀은 이렇게 얻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니 그리 비싸게 거래가 됐지만 말이다.

지갑용 인벤토리에 보관되어 있는 몬나통을 확인했다.

현재 세 개의 몬스터 마나통을 보유 중이었다.

F10, F9, F8 각각 한 개씩.

아마 인류 중에서는 가장 많은 몬나통을 보유 중일 것이다.

모두 F급이어서 휴대용 마나 저장장치로서의 기능은 별로 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몬나통을 확인한 후에는 도축한 몬스터의 가죽만 챙겼다.

지렁이형 몬스터의 가죽은 쓸 곳이 많았다.

당장 방금 도축한 가죽 한 장을 모자처럼 머리에 썼다.

해가 나타나자마자 머리를 태울 듯한 햇볕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머리에 지렁이 가죽을 뒤집어쓰는 것만으로도 열기가 차단되었다.

머리에 닿은 가죽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태양이 열심히 내리쬐고 있다고 해도 바닥까지 데워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바닥의 지열이 올라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산에 근접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나호의 말처럼 멀게만 보이던 산이 이제 제법 가까이 보이고 있었다.

시원하게 바람이 불어주면 좋겠는데 해가 나타나는 것도 동시에 자취를 감춘 바람은 불어올 줄을 몰랐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곳이었다.

낮은 25시간 이상, 밤은 20시간.

이곳의 밤은 확실히 확인이 됐지만 낮은 아니었다.

내가 이곳에 들어온 시간이 낮의 시작은 아니었을 것이다.

낮의 시작이었다면 지렁이를 닮은 몬스터의 공격을 받았어야 했다.

지렁이 가죽으로 드러난 피부를 모두 감싼 채 산을 향해 이동을 했다.

멀리 보이는 산의 공략을 생각하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피라미드처럼 보이는 산은 제법 높아보였다.

자칫 굴러 떨어지면 바닥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산이었다.

몬스터가 없다고 해도 오르기 힘들어 보이는데 몬스터가 있다면 더 오르기 힘들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더니 닿지 않을 것 같은 산의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때도 무시무시한 산이었지만 가까이서 본 산은 더 위압감이 들었다.

산 주변에 뭐라도 있으면 준비를 하겠지만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냥 다른 던전에서 몬스터를 잡아 마나를 보충했던 것이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곳에서 지급받았던 나무 봉을 지팡이 삼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면 피라미드 같고 가까이서 보면 원뿔 모양인 산은 경사가 상당히 가팔랐다.

보통 이런 경사의 산은 금세 정상에 닿아야 하지만 이 산은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며칠을 올라도 정상에 닿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이곳에 들어온 지 거의 60시간 만에 산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60시간을 써버렸으니 300시간 안에 이 산을 올라야해.'

<이곳의 하루는 45시간 이상이니까 여기 기준으로 하루를 정하지 않을까?>

'시스템이 말하는 시간은 철저하게 한국을 기준으로 해. 우리나라의 하루는 24시간이잖아. 특별한 말이 없으면 보름은 360시간이야.'

<하긴. 그러긴 하지. 그러고 보니 전생에 있었던 재밌는 일들이 생각나네. 던전 폭발 예고 생각나?>

'생각나지. 그걸 어떻게 잊어? 대변혁 초기라 다들 정신이 없던 때였잖아.'

<그때 정말 시스템이 미친놈인 줄 알았어.>

'어떻게 보면 피해를 대비할 수 있었잖아. 한국 시각을 기준으로 한다는 말만 해주지 않았을 뿐이지.'

전생의 대변혁 초기 아직 시스템이 말하는 모든 시간이 한국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을 때 시스템이 던전 폭발을 예고한 적이 있었다.

시범을 보여주듯이 주요 국가의 던전이 하나씩 폭발했는데 예고한 시각은 정오.

각국은 당연히 자신들이 사용하는 시각으로 정오라고 생각했고 정해진 던전 앞에서 폭발을 대비했지만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나라보다 이른 시간을 사용하고 있던 일부 나라는 시스템의 예고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서 자리를 이탈했고, 늦은 시간을 사용하고 있던 나라는 아직 준비가 미흡한 경우가 많았다.

던전 폭발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당시 인터넷은 복구가 안됐던 시절이었다.

국가 간의 정보가 원활했다면 피해가 조금 적었을 수도 있지만 나라마다 자체적으로 해결을 해야 할 때여서 더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사실은 차후 왕래가 가능했을 때 알려진 사실이었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그래도 피해가 적은 나라에 속했었고 말이다.

심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이 산을 오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도 태양이지만 경사가 워낙 심했고 거기다 간간이 몬스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죽음보다 더한 시간들이 이어졌다.

능력치를 구입해두지 않은 것이 후회될 정도였다.

그렇게 산에서만 보낸 시간이 250시간이었다.

밤이 되면 동사하지 않기 위해 무조건 움직이고 해가 뜨면 아직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전에 휴식을 취했다.

물론 낮의 시간이 긴 곳이었기 때문에 낮에는 몇 번 더 휴식을 취해야 했다.

그렇게 산의 정상을 100여 미터 남겨놓았을 때였다.

지금까지 낮에는 바람이 불지 않던 이곳에 정상에서부터 내리꽂히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정말 이거 너무 치사한 거 아니야? 이런 산에 몬스터까지 풀어놓고 이제는 바람까지? 시험을 하겠다는 거야? 죽이겠다는 거야?>

나호가 열불을 토했다.

하지만 열불을 토한다고 해서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곳에서는 자세를 최대한 낮춰야 했다.

꼿꼿이 허리를 펴고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가는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있던 단검 두 자루를 꺼내 땅에 박으면서 산을 올랐다.

다행히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산이지만 바닥은 단단했다.

단검을 박으면서 산을 오르니 50미터 정도는 올라가는데 무리가 없었다.

이제 정말 정상이 눈앞에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뛰어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죽음의 아가리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보다 더 바닥에 몸을 붙이고 고개조차 쳐들지 않았다.

그 상태로 기어서 산을 올랐다.

휘이이힝! 휘이이이힝! 휘이이힝!

바람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었다.

이 순간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힘겹게 조금씩 위로 몸을 움직였다.

50미터 남짓 오르는 것이 산 전체를 오르는 것보다 더 힘겨운 것 같았다.

고개를 쳐들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고 싶어도 꾹 참았다.

바람이 너무 세서 고개를 드는 것만으로도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길 얼마나 했을까 시스템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이리 내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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