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이리 내려와
[띠링! 축하합니다. 시험의 산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정확히 312시간 28분 34초 걸렸습니다. 놀라운 속도로 시험의 산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이에 보상을 산정 중입니다. 잠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야이 씹새···. 아니. 집사에게 한 말 아니야. 여기 바람이라도 어떻게 해주고 보상을 산정하든 배상을 산정하든 해야 할 것 아니야. 우리 집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데 이러다 죽으면 너희들이 책임질 거야? 질 거냐고!>
나호가 발악하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귀가 먹먹하고 머리가 울릴 정도로 큰소리였다.
나호가 이렇게 소리를 지를 만도 한 것이 산 정상은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다.
고개만 들어도 산 밑으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데 그렇다고 피할 곳도 없었다.
이제 하산을 하고 싶지만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바람에 몸이 날릴 것 같아 최대한 몸을 바닥에 부착하고 있었다.
단검으로 강하게 찔러 넣어 그것을 잡고 있었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은 체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라 언제라도 바람에 휩쓸릴 수 있었다.
이런 상태를 뻔히 알 시스템인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야! 너희들 듣고 있어? 듣고 있냐고? 시험을 통과했으면 그에 합당하게 대우를···.>
나호가 거기까지 소리를 질렀을 때 번쩍하면서 공간이 바뀌며 메시지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너무 빠른 통과여서 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보상산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시면 되겠습니다. 이곳은 강대한 님만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곳이니 마음껏 누리셔도 좋습니다.]
"밖의 시간이 흐를 텐데···."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은 밖의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누워있는 채로 눈을 감았다.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잠이 고팠다.
그러다가 번쩍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어떤 순간에도 주변을 살피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곤한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워 둘러보니 이곳은 잘 꾸며진 원룸 같은 공간이었다.
간단한 음식을 할 수 있는 싱크대와 냉장고, 식탁이 있었고 한쪽에는 욕실도 있었다.
그리고 침대와 소파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창과 문이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영락없는 원룸이었다.
원룸치고는 넓은 편에 속했지만 그래서 더 속이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갖은 음식 재료가 들어있었다.
<이왕 음식을 준비해 둘 생각이었으면 조리된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음식을 해먹으라는 소리야? 지금 우리 집사 손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텐데.>
나호가 안쓰러운 듯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호는 지금 허공답보를 시전 하면서 공간을 살피고 있었다.
조금만 이상한 점이 있으면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있는 나호였다.
하지만 이곳은 밀폐된 공간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흠을 찾기 어려웠다.
"너무 피곤하다. 씻고 자야하는데 지금은 그럴 힘도 없어."
<어서 자. 내가 경계 서줄게.>
"부탁해."
시스템이 안전을 보장하는 곳이니 경계를 설 필요는 없지만 대변혁 이후에 경계는 필수였다.
그것이 몸에 배어 있어서 그런지 누군가가 경계를 서준다고 해야 마음이 놓였다.
나호에게 경계를 부탁하고 침대에 누웠다.
무척이나 편안한 침대였다.
누운 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눕자마자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리고 도란도란 소리에 잠이 깨었다.
<너 이렇게 나올 수 있는 거야?>
쫑!
<너 집사에게 혼날지 몰라 어서 들어가.>
쪼루루!
<집사 순해 보여도 은근 강단 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왜 나왔어? 아니 어떻게 나왔어? 너 집사 허락이 있기 전에는 나올 수 없잖아.>
쫑!
<위험한 것이 있는 거야?>
쪼롱?
<아우 답답해. 너 기본적인 한글 익히라고 했지? 말이 안 되면 필담이라도 나눠야하는데 어느 것도 되지가 않으니 원···.>
소환을 한 것도 아닌데 쪼롱이가 대기실에서 나와 있는 모양이었다.
떠지지 않는 눈을 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집사 일어났어? 혹시 내 목소리에 잠이 깬 거야? 미안! 고의는 아니었어. 갑자기 쪼롱이가 나와서 놀라서 그만···.>
"괜찮아. 목이 말라서 일어났어. 화장실도 가고 싶고. 도대체 몇 시간이나 잔 거지?"
<나도 모르지. 꽤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야.>
시계가 있을 법 하지만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태창을 확인했더니 그 안의 시계도 멈춰있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은 밖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씻고 먹어야겠다. 쪼롱이도 배가 고파서 나왔을 거야. 산을 오르는 동안 거의 먹질 못했잖아."
쫑! 쫑!
쪼롱이가 내 추측이 적중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니까 쪼롱이 이 녀석! 집사가 위급한 상황에 놓여서 대기실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제 배가 고파서 나왔다는 거야?>
쭈르르!
쪼롱이가 불쌍한 소리를 냈다.
<야! 너 그런 소리 내도 이제 소용없어. 네 실체는 드러난 지 오래야.>
나호가 어이가 없는지 쪼롱이를 쏘아보았지만 실체가 없는 나호를 무서워할 쪼롱이가 아니었다.
아는 것이 많아 이것저것 배우고 있지만 실제로 뭔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쪼롱이었다.
은근히 자신은 무시하고 내 눈치만 보고 있는 쪼롱이를 보며 한숨을 푹 쉬는 나호가 처량해보였다.
"너도 씻자!"
쭝! 쭝!
씻자는 말에 쪼롱이가 나호의 뒤로 가서 숨었다.
쪼롱이는 씻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고양이도 아닌 녀석이 고양이보다도 더 씻는 것을 싫어하는 쪼롱이였다.
"너 오늘은 씻어야 해. 여기 먼지바람 엄청났었잖아. 깃털 사이사이에 먼지 가득이야. 새들은 은근히 몸단장 하는 거 좋아하는데 너는 왜 씻는 것을 싫어해?"
쭝! 쭝!
쫑쫑거리던 녀석이 쭝쭝거리면서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깃털을 고르는 시늉을 했다.
물로 씻지 않고도 충분하다는 무언의 의사표현이었다.
저런 몸짓을 보아 넘기면 아무리 더러워져도 씻지 않을 녀석이었다.
"안 돼. 어서 이리와. 네 밑을 봐. 먼지 떨어진 거."
쪼롱이가 지나간 자리마다 먼지가 가득이었다.
대장이었을 때는 무리의 새들이 쪼롱이의 털을 서로 골라 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혼자였다.
그러니 씻고 잘 말려야 했다.
<집사. 살살해. 씻는 거 그거 동물들에게는 힘든 일이야.>
조금 전까지 쪼롱이 때문에 속앓이를 했으면서도 쪼롱이 편에서 말을 하는 나호였다.
쪼롱! 쫑!
쪼롱이도 제 편을 들어주는 것을 아는지 귀여운 소리를 내며 나호를 쳐다보았다.
"더러우면 씻어야지. 어서 와. 씻고 맛있는 고기 구워줄게. 냉장고에 고기가 가득이더라."
쪼로로롱! 쪼롱! 쫑!
고기라는 소리에 쪼롱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냉장고를 열었을 때 보지 못했는지 새로운 것을 안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냉장고를 쳐다보았다.
<네가 좋아할 만한 고기가 많기는 하더라.>
쪼롱!
<정말이야. 먹는 것으로 거짓말하지는 않잖아.>
나호까지 같은 말을 하자 포르르 날아서 욕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세면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제 전용 욕조라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인 것 같았다.
장례식장의 숙소와 다르게 생긴 세면대인데도 거부감 없이 들어가더니 제 부리로 물을 틀었다.
쪼로로! 쪼로로로! 쪼로로옹!
쪼로로! 쪼로로! 쪼로로롱!
고기 먹는 것을 상상하는지 노래까지 부르면서 목욕을 시작하는 쪼롱이었다.
<하하하! 하하! 이 녀석 너무 귀여워.>
조금 전에는 얄미워 죽으려고 했던 나호가 허공에 뜬 채 쪼롱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때로는 얄밉게 구는 쪼롱이지만 나호는 쪼롱이를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아무리 쪼롱이가 얍삽하게 굴어도 나호의 눈에는 아기였던 것이다.
쪼롱이가 틀어놓은 물은 너무 차가운 것 같아서 미지근한 물이 나오도록 수도꼭지를 돌려주었다.
이렇게 해두면 세면대 난간과 안을 오가며 제 몸을 단장하는 쪼롱이였다.
씻자고 하면 싫다고 하면서 막상 씻게 되면 제법 물을 즐기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쪼롱이는 아마 제 머리깃 단장에 열을 올릴 것이다.
우아하게 위로 솟은 머릿깃은 쪼롱이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쪼롱이가 씻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나도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는 세 번을 감아도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개운한 느낌이 들 때까지 씻고 욕실을 나왔을 때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있었다.
충분히 잠을 자고 씻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전에 씻었다면 씻다가 잠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쪼롱이부터 잘 말려준 후 몸을 닦고는 음식을 준비했다.
쪼롱이가 먹을 고기는 굽기는 해도 간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기 냄새가 기가 막히게 좋았다.
쫑! 쫑! 쪼로롱! 쪼롱!
<야! 기다려. 너 그러다가 엉덩이 다 타겠다. 보는 내가 다 불안해. 이리 내려와.>
제 고기를 먼저 굽는 것을 알고 있는 쪼롱이가 프라이팬 손잡이에 앉자 불안해하는 나호였다.
자신은 영체라 괜찮다며 아예 프라이팬 위로 올라간 적도 있으면서 쪼롱이는 조금만 위험한 행동을 해도 바로 저지했다.
쪼롱! 쫑!
"그래. 다 구워졌다. 잘라줄까?"
쭈루!
쪼롱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몸집은 작지만 힘은 장사인 쪼롱이었다.
특히 부리와 발톱의 힘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래서 그런지 고기를 잘라주는 것보다는 자신이 직접 뜯어먹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쪼롱이를 나호가 특히 예뻐하기도 했다.
먹는 모습이 자신을 닮았다나 뭐라나.
쪼롱이의 식사를 먼저 식탁에 올려주고 내가 먹을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냉장고에는 고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양한 야채도 가득이었다.
식성을 고려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냉장고에는 애호박도 있었다.
애호박을 본 순간 아버지 생각이 났다.
식사는 제대로 하고 계시는지···.
아버지 생각이 나지 않았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음식을 준비했다.
애호박전이었다.
아버지 해드릴 때는 밀가루를 살짝 바른 뒤 계란 옷을 입혀 붙였지만 내가 혼자 먹는 음식에 그 정도 정성을 드릴 필요는 없었다.
사실 나는 계란 옷을 전혀 입히지 않고 살짝 구운 애호박을 더 좋아했다.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애호박전의 이단아라고 불렀지만 말이다.
프라이팬을 살짝 달군 뒤 기름을 두르고 자른 애호박을 깔았다.
<굽기만 하려고?>
"계란은 그냥 부으려고. 그게 간단해서."
계란 두 개를 풀어서 익고 있는 애호박 위에 부었다.
손님상에는 절대 오를 수 없는 애호박 부침개가 되었지만 혼자 먹는 것이니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생각지 않았던 요리를 한 후에는 냉장고 안에 있는 야채 위주로 밥상을 차렸다.
비세계에 있으면서 정작 그리운 것은 야채였다.
특히 시험의 산에 오르는 동안 풀 한 포기도 본 적이 없어서 신선한 야채가 주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최고였지만 입안에서 느껴지는 상큼함과 신선함은 피로를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시원한 물도 너무 좋았다.
인벤토리에 보관되어 있는 물을 아껴먹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씻을 때도 피부가 물을 빨아 먹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몸이 그만큼 물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것밖에 먹지 않아?>
"의외로 야채가 소화가 안 될 수가 있잖아. 더구나 기름진 부침개까지 먹어서···. 더 먹으면 탈이 날 것 같아."
<너무 적게 먹은 것 같은데···.>
쫑! 쫑!
적게 먹는다고 걱정하는 나호와 달리 쪼롱이는 내가 남긴 음식을 탐하고 있었다.
"잠깐 내가 먹다 남긴 것은 덜어내고."
쪼롱! 쫑!
입을 댄 것은 버리려고 하자 부리나케 날아온 쪼롱이가 접시를 먼저 차지했다.
그리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 귀한 음식을 왜 버리려고 하냐는 표정이었다.
<그래. 그래야 우리 쪼롱이 답지. 먹어. 체하지 않게 조심하고···.>
쫑!
대답을 하더니 눈앞의 음식을 빠르게 먹어 없애기 시작하는 쪼롱이었다.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때 메시지가 들려왔다.
무서울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