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길드장
"살아남은 회사가 거의 없었어요. 아니 체질이 변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아요."
"그렇게 세상이 많이 변했어? 주식이라는 것이 사라져 버리는 거냐?"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죠. 마나와 금이 거래의 매개체가 되거든요."
"화폐의 개념 자체가 변해버린다는 거지?"
"예."
"그럼 더 현물을 확보해야겠구나. 네가 말한 대변혁이후에도 생필품들은 필요하겠지? 화장지 같은 거 말이다. 예전에 화장지 사재기가 극성을 부렸다는데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하는 건가?"
"우리나라는 재앙 초기에 화장지보다는 물이 문제였어요."
"물? 수도관이 파열되는 거냐?"
"여기저기 던전이 생기니 수도관이 멀쩡할 수 없었죠."
"무슨 말인지 알겠다. 복구될 때까지는 금보다도 귀한 것이 물이 되겠구나."
"여기처럼 가까운 곳에 계곡이 있는 곳은 그래도 괜찮은데 도시가 문제죠."
"그래. 여기는 도시와는 준비해야할 것들이 다르기는 하지. 씨앗들은 어떠냐?"
"처음 몇 달만 잘 넘어가면 먹거리는 크게 문제되지 않아요.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어지간한 것은 던전에서 구할 수 있거든요."
"신기하구나. 쌀은? 쌀은 구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쌀농사가 가능한 던전도 있어요."
"그럼 넉넉하게 1년 정도만 버틸 쌀만 확보하면 되겠구나."
"안전하게 보관할 곳이 있으면 넉넉하게 준비해뒀다가 나눠줘도 좋기는 하죠."
"무슨 말인지 알겠다. 네가 산 땅에 울타리를 세우라고 한 이유도 알겠고. 앞으로 이런 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 산도 더 사둘까?"
"지금도 충분해요. 그것보다 사람을 좀 불러 모아야겠어요."
"대변혁 이후에 능력을 발휘할 사람들 말이냐? 배신을 하지 않을 사람으로?"
큰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면 이런 점이 좋았다.
이야기의 맥락도 빨리 캐치하시고 방향도 잘 잡으셨다.
"세상이 변하니 사람들의 민낯이 드러나더라고요. 개인의 이익을 위해 국민과 나라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도 많았고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마나통이 팔려서 미우라 놈에 대한 호감도가 자동으로 상승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지 모르겠지만 마나통이 팔렸다고 모두가 매국노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끊임없이 항거를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에게까지 핍박이 들어와도 신념을 굽히지 않던 사람들···.
이제는 그 사람들을 불러 모을 시간이었다.
"삶의 기반이 확실한 사람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런 사람은 영입이 쉽지 않을 텐데."
"서두를 필요는 없죠. 안면만 터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대변혁이 일어나고 나면 기회는 올 테니까요."
"그렇기는 하지. 이게 우선 접촉해야 하는 사람들 명단이라고? 알았다. 내가 알아서 하마."
큰아버지에게 건넨 명단 중에는 누구나 알만 한 사람도 있고, 이름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전생에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사람들은 권능 기억 덕분에 정보를 정리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단서가 없었다.
대변혁의 날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 중에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기도 했었다.
이름 밖에는 아는 것이 없지만 큰아버지께서 알아서 하신다고 했으니 찾아내실 것이다.
되도록 대변혁 전까지 찾아서 전생에 겪었던 아픔들을 겪지 않게 해주고 싶지만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지켜볼 생각이다.
큰아버지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집을 나와서 산에 올랐다.
전생에 던전이 형성됐던 곳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여전하네. 변화가 있을만한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
"확인하는 거야. 혹시 미리 변화가 있는지 꾸준히 살펴야지···."
<장례식장 근처에는 던전이 형성되지 않았었어?>
"모르겠어."
전생에 던전 공략을 위해 일본에도 종종 오기는 했지만 지금 장례식장 부근은 아니었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던전이 있던 곳을 한 번 가보기는 해야 할 것 같다."
<나 집사가 어느 던전을 말하는지 알고 있어.>
전생을 함께 보냈다고 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내려가자. 인사드리고 바로 올라가야지."
<비행기는 내일 오후에 출발하는 거잖아.>
"만날 사람이 있어."
<직접 영입할 사람이 있는 거야?>
"어."
이번 소환이 끝난 후에 앞으로의 일정을 점검하면서 막 회귀했을 때 정리해둔 자료를 확인했다.
그 자료들 중 더 늦기 전에 찾아봐야 하는 사람이 몇몇 보였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만나볼 생각이다.
산에서 내려와 세 분께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섰다.
세 분 모두 아쉬움을 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집을 나서 향한 곳은 인천이었다.
<집사! 인천에 오는 거 보니까 길드장 찾아가는 거야?>
"맞아."
<혹시 샘물 주려고?>
"살릴 수 있다면 좋잖아."
<길드장이 입이 싼 사람은 아니기는 했지만···.>
치유효과가 있는 샘물을 밖으로 돌리는 것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정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족이외의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길드장이 전생과 똑같은 아픔을 겪게 할 수는 없었다.
"전생의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면 위험을 감수할 수 있어."
빚을 갚는다고 하자 바로 수긍하는 나호였다.
길드장에게는 고마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변혁 초기는 혼란 그 자체였다.
그런 시기에 각성자들을 규합해서 혼란을 잠재우는데 최선을 다한 사람이 길드장이었다.
우리나라에 체계적인 길드를 최초로 만든 사람도 길드장이었고, 사리사욕보다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려 애를 쓰던 사람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 미우라 놈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을 지속적으로 피력했었다.
그리고 이런 점 때문에 우리 길드가 테러를 당한 것 같고 말이다.
<길드장도 정말 오랜만이네. 만나면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눈물이 나면 울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우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지.>
"어차피 나 이외에는 아무도 널 보지 못해."
<아! 그렇지. 집사랑 쪼롱이가 날 보니까 다들 날 본다고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니까.>
전생에도 와본 적이 있는 거리를 걸으며 나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집사! 저기다. 저기 중국집. 아직 영업 중이네.>
나호가 먼저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전생에 길드장은 이 시기에 중국집에서 주방장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중국집에 들어가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켰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서너 명의 손님이 식사 중이었다.
음식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맛있어? 전생에도 길드장의 중국 음식은 일품이었잖아.>
'전생에 먹었던 것보다 더 맛있는 것 같아. 길드장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나봐.'
길드장은 대변혁 전에는 더 맛있게 음식을 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남자들이 으레 하는 허세쯤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출출할 시간이기도 했지만 혼자 먹기 아까울 정도로 맛이 있었다.
너무 맛이 있어서 그릇에 거의 코를 박고 먹은 것 같았다.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은 양을 시킨 것 같았지만 순식간에 음식은 사라지고 없었다.
'천천히 먹었어야 했는데···.'
<집사가 빨리 먹기는 하더라. 저기 쪼롱이 좀 봐. 먹고 싶어서 고개를 잔뜩 내밀고 있잖아.>
현실에서는 절대로 함부로 나오면 안 된다고 말을 해뒀는데도 먹는 모습을 보자 나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쪼롱이의 고개는 텅 빈 그릇을 향해 있었다.
'포장해줄게.'
쫑!
사준다는 말은 금방 이해하고는 좋아하는 쪼롱이었다.
탕수육을 주문했다.
쪼롱이의 먹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탕수육 한두 그릇으로는 어름도 없었다.
혹시 남더라도 소환 대기실에 보관하면 그만이어서 다섯 그릇을 포장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안에서 주방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료가 없다는 것 같았다.
<길드장 목소리다. 젊어지기는 했지만 특유의 억양은 여전하네.>
길드장은 평상시에는 늘 느긋하게 말을 했다.
검을 잡지만 않으면 누구도 각성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길드장이었다.
쫑?
<이따 이야기해줄게.>
궁금해 하는 쪼롱이를 나호가 달래는 사이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양해를 구했다.
재료가 없어서 다섯 그릇은 포장이 안 된다는 말이었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사장과 이야기를 했다.
고기는 우리가 제공을 하고 그 고기로 탕수육을 만들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고개를 젓던 사장이었지만 충분한 비용을 지불한다고 하자 주방장을 불러오겠다는 말을 하고는 주방으로 사라졌다.
'시간이 없으니 이런 방법밖에는 사용할 수가 없네.'
"어떤 고기로 탕수육을 만들어 달라는 겁니까?"
조금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묻는 길드장이었다.
나라도 화가 날 수 있는 상황인 것 같아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가게 영업이 끝나고 뒷정리까지 끝난 후에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제가 주방장님께는 따로 사례하겠습니다. 작업도 제가 도와드리고요."
음식을 잘하게는 보이지 않는지 길드장이 위아래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옆구리를 찌르는 사장 때문인지 알겠다고 허락을 했다.
사장 입장에서야 손해날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주방장이 추가로 일하는 시간만큼의 임금과 주방 사용료, 거기다 추가 비용까지 감당한다고 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주방장으로 있는 길드장은 지금 일을 거절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딸의 병원비를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길드장의 아픔을 이용해서 접근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길드장의 허락까지 떨어지고 나자 식당의 뒷정리를 돕기 시작했다.
사장을 비롯한 모두가 괜찮다고 했지만 뭐라도 도와야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든 길드장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어야 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기로 탕수육만 만들 거여서 다른 재료는 필요하지 않는데도 주방장은 잠시 장을 보러 나갔다.
주방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왔다.
그리고 사장과 모든 직원이 퇴근하고 주방장과 나만 남았다.
둘만 남자 몬가재의 고기를 꺼내주었다.
물론 잠시 밖에 나가 차에서 가지고 온 것처럼 주었기 때문에 주방장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거 바다가재 고기입니까?"
"예. 아시는 분이 보내주신 겁니다."
"이렇게 큰 바다가재도 있습니까?"
"비싸서 그렇지 뭔들 없겠습니까."
"어려 보이는데 말하는 것은 제 또래처럼 하시네요."
주방장은 눈이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지금은 주방장을 하고 있지만 딸이 아프기 전에는 검도장을 운영했던 사람이었다.
검도 인구가 줄어들어도 워낙 좋아하는 일이라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는데 딸까지 희귀병에 걸려 검도장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검도장을 정리하고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께 배운 음식이었고, 혹시 몰라 따놓은 중식 자격증이 취직에 도움이 됐다고 했었다.
"이렇게 좋은 고기는 처음 봅니다. 이건 익히기만 해도 맛있겠는데요?"
<길드장이 환장하던 음식이었는데···. 집사 기억나?>
나호가 길드장을 보며 하는 말이었다.
'기억하지. 어려움 속에서도 즐거운 순간들이었지.'
<언제나 빛나는 순간들은 있는 것 같아.>
하루 종일 요리를 하고 또 요리를 하는데도 길드장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재료에 매료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조금만 주실 수 있습니까? 딸이 있는데 딸에게 맛보여 주고 싶네요."
"물론이죠. 원하는 만큼 가져가셔도 됩니다. 튀기는 것이 싫으시면 다른 요리를 하셔도 좋습니다."
몬가재는 튀겨도 맛이 있지만 찌거나 구워도 맛이 기가 막혔다.
다른 방식으로 요리를 해서 딸에게 가져다줘도 좋다는 말을 하자 길드장의 얼굴이 한결 환해졌다.
그렇게 주방은 끊임없이 음식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길드장의 얼굴에 피곤이 짙게 내려앉았을 때 준비해 온 치료수를 건넸다.
직접 확인하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기 때문이었다.
치료수를 마신 길드장의 얼굴에 이채가 어릴 때 준비해둔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파친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