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워프 덩굴
워프 게이트를 품었던 덩굴 식물의 이름은 '워프 덩굴'!
장거리와 단거리에 따라 워프 덩굴의 모양이 조금 달랐는데 이것을 구분해서 '장워프 덩굴', '단워프 덩굴'이라고 했다.
대개는 짧게 줄여서 장프, 단프라고 불렀지만 말이다.
지금 내가 채취하고 있는 덩굴 식물은 단프였다.
단거리 워프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걸 채취해서 던전이 이곳에 형성되지 않는다면 천안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한 걸까? 나쁜 일을 한 걸까?"
<글쎄. 그거 정말 애매하다. 그래도 대변혁 초기의 대규모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을 거 아니야. 전생에 이곳에 생긴 던전 때문에 천안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기억하지?>
"기억하고말고."
대변혁이 일어나는 순간 모든 통신과 인터넷이 일시에 먹통이 된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공포가 더 적었을지 모르겠다.
자기가 사는 주변에만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고 구조를 기다리기라도 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통신과 인터넷은 고장난 전등 같았다.
됐다 안 됐다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나가버렸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생각보다 큰 공포로 자리 잡았다.
차분히 취합하고 분석한 정보가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것이 무분별하게 전달되어 버린 것이다.
거기다 혼란을 틈난 가짜뉴스까지.
그것은 어찌할 바를 모를 시민들에게 던져진 폭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들었던 뉴스 중의 하나!
천안이 아비규환에 휩싸였다는 것이었다.
핸드폰으로 찍은 심하게 흔들리는 영상 속의 천안은 지옥 그 자체였다.
모두 이곳에 형성될 던전 때문이었다.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던전!
'아수라 던전'
대변혁의 날 천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안정을 찾고 난 이후에는 천안의 명물이자 자랑인 던전이기도 했다.
전국 어디든 갈 수 있는 워프 게이트를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던전의 환경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던전 관리를 잘했을 때 이야기지만 말이다.
<뿌리가 퍼럴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네. 이런 모습을 미래의 던전덩굴학 사람들이 보면 참 좋아하겠다.>
"그런 것도 알고 있었어?"
<이거 왜 이래? 집사가 겪은 만큼 나도 전생을 경험했는데 모르겠어? 그리고 나는 떨어지려고 해도 집사에게서 떨어질 수 없었다니까. 뭐든 함께 보고 들어야 했다고!>
"싫지 않았다며?"
<싫지 않았어. 오히려 좋았지. 늘 혼자였으니까. 누군가의 인생을 깊이 경험하는 것도 좋았고. 한 가지 아쉽다면 집사가 나를 보지 못한다는 거였지만···.>
단프의 뿌리는 일반적인 식물의 뿌리와 다르지 않았다.
마나를 머금어서 푸르거나 특별한 색깔을 띠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어서 의외였다.
단프를 캐고 있지만 식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단프든 장프든 그 어떤 던전덩굴이든 간에 사람의 손을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던전이 형성된 이후에나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던전 덩굴들은 단순한 식물로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들이 많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는 것이었다.
"다 됐네."
<집사! 심어봐. 애들에게 부탁해야겠구나.>
"꾸루! 대기실 입구에 땅 좀 파봐."
꾸!
꾸루가 득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환수들도 나호와의 대화를 들었으니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그 중요한 일을 맡게 되니 기쁜 모양이었다.
빠르게 날아 들어가려고 하는 꾸루에게 나호가 한 마디 보탰다.
<중요한 일이니까 정성을 다해야해.>
꾸!
꾸루가 대기실로 들어가더니 입구와 가까운 곳에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부리를 이용할 필요도 없었다.
큰 발과 발톱은 아주 훌륭한 호미가 되어주고 있었다.
시스템이 이 모습을 보면 농자재의 출입을 허락해준 것을 후회할 것 같았다.
농사만 허용해주면 농기구 없이도 농사가 가능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꾸!
금세 구멍을 판 꾸루가 나를 보며 일을 끝냈음을 알려왔다.
목소리에 자긍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래! 잘 했어. 옆에 하나 더 파줘."
꾸!
던전 덩굴은 늘 쌍으로 자랐다.
던전 입구에 있는 두 개의 기둥에 하나씩 자라는데 이것이 온 던전을 뒤덮었다.
던전마다 자라는 덩굴은 달랐지만 이것은 모두 동일했다.
꾸!
꾸루가 옆으로 1미터쯤 떨어진 곳에 구멍을 뚫고는 일을 끝마쳤다고 알려왔다.
"잘했어."
꾸루가 땅을 팠으니 이제 심는 일만 남았다.
땅만 파졌다면 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몬넛 나무처럼 큰 나무라면 옮겨 심는 일이 어렵겠지만 이렇게 작은 식물은 일도 아니었다.
단프를 소환 대기실로 보냈다.
소환 대기실에 물건을 넣고 빼는 것은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손에 있던 단프가 사라지더니 소환 대기실에 파둔 구멍 안에 안착했다.
"쪼롱아! 덮어줘."
쫑!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쪼롱이가 이때다 싶었는지 냉큼 대기실로 들어가서 흙을 덮기 시작했다.
덩치가 큰 꾸루는 땅을 파기는 좋았지만 흙을 덮는 일을 시키기에는 불안한 감이 있었다.
덩치 때문에 식물을 건드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냉큼 대기실로 들어간 것과 달리 쪼롱이는 보고 있는 것이 지루해질 만큼 천천히 흙을 덮고 있었다.
그만큼 조심하는 것이었다.
<저 녀석에게 저런 조심성도 있었어? 의외네.>
평상시에 쪼롱이는 작은 덩치와는 달리 과감하고 겁 없이 움직였다.
그런데 지금은 세심하기 그지없었다.
쫑?
"잘 했어. 그 정도면 딱 좋아. 치료수를 부어주는 것이 좋을까?"
<어렵다. 이거 어려워. 치료수가 건강하게 하니까 좋을 것도 같고···. 몬넛의 과즙을 부어주는 것이 좋을 것도 같고···.>
만약 던전이 생긴다면 치료수나 마나가 미량 함유되어 있는 몬넛의 과즙이 던전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었다.
대기실의 환경도 영향을 줄 것이고···.
만약 좋지 못한 영향을 준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던전 덩굴을 옮겨 심어도 시스템이 말이 없네. 단프가 분명한데 말이야."
던전 주위의 던전 덩굴은 함부로 만질 수 없었다.
던전 덩굴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봤던 던전 덩굴들은 던전이 형성된 이후의 것들이었다.
던전이 형성되기 전의 던전 덩굴을 이렇게 뽑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전생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집사! 이제 어떻게 될까? 대기실에 넣어둔 것들은 상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니 저것도 자라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려나? 아니면 저 식물들처럼 잘 자라려나?>
나호가 대기실 안의 식물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자란다면 얼마나 빠르게 자랄까? 혹시 대기실에 악영향을 끼치면 어떡하지?>
나호의 의문이 거미줄처럼 뻗어가기 시작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이니 답이 있을 리 없었다.
시스템도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내려가자.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쪼롱이가 호위로 붙여준 사냥조들이 앞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정말 충직한 녀석들이었다.
<집사! 물주지 않는 거야? 말라죽으면 어떡하려고?>
"그래서 주변의 흙을 같이 넣어줬잖아. 잠깐은 괜찮을 거야. 생각 좀 해보고."
산을 내려간 후 차근히 상점을 돌아볼 생각이다.
상점에 식물 재배에 유용한 아이템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직 대변혁 전이어서 현실에서는 구매할 수 없지만 던전이나 이세계에서는 구매가 가능했다.
던전을 찾기 전이었다면 아이템이 있어도 비세계로의 다음 소환을 기다려야 했겠지만 지금은 던전을 다녀오면 그만이었다.
<집사! 우리 내일 날 밝으면 다시 산행이지?>
"그렇지. 시스템의 제재만 없다면 말이야."
<지금까지 별말 없는 것으로 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데?>
"모르지."
시스템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이건 보기에 따라서 시스템을 방해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일까지 기다리면 안 되겠다. 바로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집사 피곤하잖아.>
"괜찮아. 지금 움직여서 말썽쟁이 하나 없앨 수 있다면."
<말썽쟁이? 누구? 사람은 아니지?>
전생에 던전 중에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던전이 있었다.
그런데 지속적인 관리는 반드시 필요했다.
<설마! 집사! 설마 그 곰팡이 던전 말하는 거야? 나 싫어. 나는 그 던전은 보기에도 싫더라. 몸에 달라붙을 것 같단 말이야. 으으으!>
제 몸에 붙는 것도 아닌데 나호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럴 때보면 역시 고양이과 동물다웠다.
어찌나 깔끔을 떠는지···.
"가야지. 그 던전은 20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았잖아."
다른 나라에 비하면 골칫거리 던전이 적었을 뿐이지 없지는 않았다.
축복과 같은 던전만 가진 나라는 없었다.
그래도 우리나라 정도면 양호한 편에 속했었다.
골칫거리 던전 중에 버섯 던전을 가장 먼저 떠올린 이유가 있었다.
대변혁과 동시에 나타난 후 내가 죽을 때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버섯 던전은 국제적인 망신거리였다.
세계 최악의 던전을 꼽으면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던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인명피해를 많이 발생시키지는 않았지만 미관상 좋지 못했고, 주기적인 관리를 해주지 않으면 피해를 양산하는 던전이어서 돈을 먹는 기계라고 불렸었다.
산을 내려가면 그 던전이 있는 곳으로 가볼 생각이다.
<새벽 운전인데 괜찮겠어?>
"괜찮아."
<큰아버지께서 도와주신다고 할 때 부탁할걸 그랬나봐. 그럼 이동 중에라도 잘 수 있었을 텐데.>
한국에 들어오면 전국을 돌아다닌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큰아버지께서 도와주신다고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얼마나 바쁜지 알기 때문에 사양을 했었다.
나호는 그것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정말 괜찮아. 이런 일을 할 때는 옆에 사람이 있으면 생각만 많아져. 조심스러워지고."
<큰아버지는 괜찮잖아.>
"그래도 의식이 되긴 하지."
나호와 이야기를 하며 빠르게 산을 내려오고 있는데 생각지 못한 메시지가 들려왔다.
[띠링! 마나통이 자동 수거 됩니다. 돌아가신 분의 마나통이기 때문에 마나만 흡수된 후 소멸합니다. 미량의 마나가 수거되었습니다.]
<요즘에도 그냥 매장하는 사람이 있구나. 살짝 으스스해지려고 하네.>
내가 선 곳에서 5미터 이내에 매장된 시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조용히 명복을 빌어드리고 발길을 재촉했다.
<기분 묘해지려고 하네. 최근에 돌아가셨나보다.>
"마나통이 생긴 이후에 돌아가신 것은 확실하겠지."
<집사 기분 괜찮아?>
"괜찮지 그럼. 좋은 일 했다고 생각해."
<에궁!>
열심히 떠들던 나호가 생각에 잠겼다.
별 생각이 다 드는 모양이었다.
산을 내려와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탔다.
그리고 경주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쪼롱이가 대시보드에 앉아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간혹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그럴 때마다 차량용 장난감을 보는 것 같았다.
쫑!
"왜? 너도 나가고 싶은 거야?"
쫑!
나호는 지금 본넷에 앉아 있었다.
영체이니 어디에 있든 상관없었다.
원하면 엔진 속에 들어가 있어도 문제없었다.
대시보드에 앉아 풍경을 본다고 생각했는데 쪼롱이는 나호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너는 바람에 날아갈 수 있어서 안 돼."
소환수라고 해서 위험으로부터 무적은 아니었다.
상처 입으면 치료를 받은 후 대기실에서 회복을 하면 되지만 죽어버리면 돌이킬 수 없었다.
쭈루!
"꾸루와 반반이는 이럴 때는 나오지도 못하잖아. 거기에 앉아 있는 것으로 만족해."
쪼오옹!
알겠다고 대답은 하는데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힘이 없어서 저러는 것이 아니었다.
연기에 능한 쪼롱이는 제 감정을 목소리나 표정, 몸짓으로 곧잘 표현했다.
글을 익히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되는데 한 몫 하는 재주였다.
차는 경주의 황성공원으로 향했다.
주차를 하고 전생에 던전의 입구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쓰레기 버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