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마나통은 안녕하십니까?-98화 (98/350)

98. 만약고(萬藥庫)

"거기! 뭐 하는 겐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꼬물이에게 놀라 누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약간의 신경질이 담긴 목소리에 주변에 앉아있던 사냥조들이 움직이려고 했다.

쪼롱이가 나에게 붙여준 호위조들이었다.

열 마리의 호위조는 현실에 있을 때는 적당히 떨어져서 나를 호위했다.

물론 도심에 있을 때는 이렇게 나와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날선 목소리가 들리자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재빨리 쪼롱이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내가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쪼롱이가 호위조들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영리했던 쪼롱이인데 더 영리해진 것 같았다.

주위의 상황을 판단하고 명령이 내려지기 전에 알아서 처리한다면 비록 새이기는 하지만 엄청난 전력을 얻은 것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6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어르신이었다.

등산용 스틱을 짚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저것은 지팡이 용도가 아닌 것 같았다.

"내 여기 산 주인이네! 누군데 여기 와서 칡을 베고 땅을 판 겐가? 자네 혹시 거기에 유골함 묻은 겐가?"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어르신이 사각으로 파인 바닥을 가리키며 슬슬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요즘 납골당 관리비가 올랐다지? 그래서 아무 산에나 묻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하더니 그런 게야!"

<어쭈! 막 나가자는 건가? 왜 저러셔? 뻔히 유골함이라고 말하기에는 작은 크기인데···.>

나호의 말을 들을 리 없는 어르신의 목소리는 한결 높아졌다.

"이거 어쩔 건가? 이게 방치된 것으로 보여도 방치된 것이 아니야! 여기 칡밭이야! 칡밭! 얼마나 애지중지 길렀는데! 그런 칡넝쿨을 싹둑싹둑 베다니!"

"어르신."

한 없이 목소리를 높이는 어르신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조용히 어르신을 불렀다.

"어르신이라니! 내가 다 늙은 늙은이로 보이는 겐가! 이래 뵈도 겨우 일흔세 살 밖에 되지 않았어! 우리 마을 청년 회장이야! 이거 왜 이래!"

어르신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하시며 목소리를 높였다.

무시하고 가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전생에 이 마을 분들에게 입은 은혜 때문이었다.

대변혁 초기는 다들 힘들었다.

어디를 가나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마을이라고 해서 형편이 더 좋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땅 끝 던전이 마을에 있고 던전의 위험성이 높지 않아서 다른 곳에 비해 아주 조금 사는 것이 나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일반인의 삶은 어디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는데 이 마을 분들은 그래도 인심이 살아있었다.

바다를 마주하고 살아서 강해진 것인지 아니면 이전부터 인심이 좋았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곳이 없는 가난한 헌터들에게 회관도 잘 내주고 빈방도 잘 내주었다.

물론 소정의 금액은 받았지만 그마저도 거절하는 마을들은 차고 넘쳤었다.

외지인에다 헌터는 거칠고 믿을 수 없다는 인식 때문에 마을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막는 마을도 적지 않았었다.

물론 시간이 더 흘러 헌터의 중요성을 깨닫고 나서는 그런 것은 거의 사라졌지만 말이다.

이곳의 저렴한 숙소와 식사는 가난한 헌터들에게 생각보다 큰 위안이 되곤 했었다.

그 값을 치른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강한 몬스터는 없었지만 대변혁의 날 여기에서 나온 몬스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상당히 당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그걸 미연에 방지해 준 건데 그걸 모르고 저러시네.>

나호가 어이가 없는지 한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제가 여기 흙이 기름져보여서 조금 덜었습니다. 땅 끝 흙이어서 기념이나 하려고요."

아주 공손하게 대답을 해서 그런지 어르신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아무리 기념이라고 해도 그렇지! 흠! 아무 곳이나 막 파고하면 안 되는 거야! 칡을 키워서 다행이지 삼이라도 키웠으면 어쩔 뻔했어! 다 같은 칡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여기 칡이 찰 칡이야! 자네 찰 칡이 뭔지는 아나?"

공손한 대답과 태도가 마음에 드셨는지 나를 겨냥하고 있던 등산 스틱을 내리고는 한 걸음 다가서는 어르신이었다.

<집사! 모른다고 하면서 그게 뭐냐고 물어! 그럼 설명하는데 신이 나서 화는 사르르 녹아내릴 거야.>

나호가 훈수를 두었다.

인간사에 관심이 없었다고 하지만 나에 비해 수천 배 이상의 사람을 보아왔을 나호였다.

이럴 때는 나호의 말을 듣는 것이 현명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찰 칡이 뭡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더라고. 찰 칡이 뭐냐면 말이제······."

어르신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날이 서서 다가오시더니 어째 이야기를 시작하면서는 어깨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외로워서 그래. 어르신들만 사시잖아. 자식들이 있다고 해도 다 객지에 살 것이고···. 간간이 본다고 해도 누가 어르신들 말씀에 귀를 기울이나? 다들 핸드폰 쳐다보기 바쁘지. 어린 애들 키우는 사람들도 자식 얼굴보다 핸드폰을 더 쳐다본다고 하더라.>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사는 세대이기는 했다.

사실 손으로 조작할 필요도 없었다.

말로 다 되는 세상이었다.

"하하하! 참 마음에 드는 젊은이구만. 여기 밑이 우리 집인데 차 한 잔 하고 갈 텐가?"

거절하기 힘든 눈빛으로 말씀을 하시는 어르신이었다.

"어르신 제가···."

"바쁘지? 다들 그렇더라고···. 우리 손주만 해도 그래. 뭐가 그리 바쁘지···. 못 본지 5년은 된 것 같어. 그런데 그걸 알기나 허는지···. 참 좋은 차(茶)가 있는데···. 내가 만든 찬데···."

어르신의 낚시질은 시스템을 능가하는 것 같았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어르신. 여기 칡을 이렇게 망가뜨려서···. 이거 얼마 안 되지만···."

"됐어! 뭘 이런 걸 주고 그래! 됐어! 사람 나쁘게 만들지 말어. 미안허면 내랑 차라도 한 잔 허고 가."

내가 편해졌는지 구수한 말투로 말씀을 하시는 어르신이었다.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서 어르신의 초대에 응하기로 했다.

어르신의 집은 바로 언덕 아래였다.

마당에서 바다가 훤히 보이는 것이 참 시원하게 보였다.

'전생에 이 집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언덕을 오를 때는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분명 전생에는 없던 집이었다.

"좋제? 여그서 바다를 보믄 속이 다 뻥 뚫린다고 허드만. 객지 나간 자슥들이 허는 소리여! 썩을! 그라믄서 오덜 안혀. 속이 뻥 뚫린다믄 자주 와서 뚫고 가야 헐 것 아니여! 썩을!"

넋두리처럼 하시니 말씀에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혼자 사세요?"

"그람 혼자 살제. 누구랑 살어? 임자는 진작에 저 세상에 가브렀어! 뭐시 그리 급허다고!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리믄서. 썩을!"

말씀을 하시며 마당의 평상을 부지런히 닦기 시작하셨다.

"제가 할게요."

"아니여. 좋아서 그려. 그라니 내가 하게 내비둬. 얼마만인지 모르것구만. 여그는 젊은 사람이 살질 않어. 다 죽을 날 받아둔 사람들만 살고 있제. 요리 안거."

평상에 광을 낸 어르신이 자리를 권했다.

어르신이 권한 자리에 앉으니 바다가 훅 들어오는 것 같았다.

"좋제? 내가 일부러 여기다 평상을 놓은 것이여. 여그서 차 한 잔을 마시먼 차를 마시는 것인지, 바다를 마시는 것인지···. 허허허! 좋구만."

<처음 봤을 때는 모르겠더니 풍류를 아시는 분이네.>

"쪼까 기두리고 있어. 내 찻물 끓여올 테니. 마당을 구경해도 좋고. 볼 것은 없지만 뜯어보면 재미난 것이 많어. 간혹 팔라고 찾아오는디 팔지 않제. 내 손때가 묻은 것인디 팔 것어! 어림도 없는 말이제."

마당에는 정말 구경할 것이 많았다.

직접 사용했던 것이라고 보기에는 많은 물건들이 있었는데 특별하게 장식을 해둔 것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놓아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묘하게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어르신이 찻물을 준비하기 위해 집안으로 들어가고 난 후 마당을 거닐며 물건들을 구경했다.

그때였다.

뜻하지 않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아직 마나가 깃들지 않았지만 앞으로 마나가 깃들 물건이 있습니다.]

시스템의 메시지가 아니었다.

이것은 내 권능 기억이 하는 말이었다.

'뭐라고?'

[저기 보이는 돌화로는 대변혁 이후 귀하게 사용될 물건입니다. 이에 대한 기억이 있는데 열람하시겠습니까?]

권능 기억이 이렇게 반응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그런 물건이 보이지 않아서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열람하겠어.'

[어디에서 발견했는지, 첫 소유자는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밖으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럴 겁니다. 저것이 대외적으로 알려졌을 때는 미우라 길드의 소유물이었습니다.]

미우라 길드의 소유물!

그리고 돌화로!

기억을 할 법도 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대변혁 이후에 저것의 모양이 바뀌었든지 아니면 한두 번 본 것이 다였을 것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실물은 보신 적이 없고, 다큐를 통해 두 번 스치듯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들으시면 바로 기억이 나실 겁니다. '만약고(萬藥庫)'!]

기억이 만약고라는 이름을 말하는 순간 기억이 났다.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만약고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만약고는 우리에겐 애증의 물건이었다.

저 만약고 이용비용으로 매년 나라에서 치러야하는 예산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워할 수도 없는 것이 만약고로 만들어진 약은 탁월했다.

그리고 저렴하게 일반인들에게 제공이 되었다.

저렴이라고 해도 이미 예산으로 비용을 지불한 후이니 이중으로 값을 치르는 것이었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만약고를 통해 나온 약처럼 부작용이 적은 약이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저 만약고를 이용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했었다.

그리고 미우라 길드는 늘 말했었다.

일본에서 가지고 온 귀한 만약고를 한국인들을 위해 사용한다고!

그래서 만약고가 한국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또한 만약고를 한국의 길드에 두고 사용하는 것에 대해 온갖 생색을 다 냈었다.

<만약고라고? 만약고? 집사! 우리가 아는 그 만약고를 말하는 거지?>

'그런 것 같아. 우리가 미우라에게 완전 속은 거네. 한국에서 발견하고는 일본에서 발견했다고 했으니···. 어이가 없네.'

그런 생각을 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미우라는 좋은 것은 다 일본으로 가져갔었다.

지금 내가 하듯이 우리나라에 있는 좋은 던전들도 가지고 갈 수만 있으면 일본으로 가져갔을 것이다.

그러니 만약고를 한국에 둘 리가 없는 위인이었다.

'이거 한국을 못 벗어나는 물건 아닐까?'

<그런 물건들도 있기는 했지. 일정 지역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템들!>

대변혁이후에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일들도 많지만 생각지도 못한 물건들도 많이 등장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재미지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상상이 실현되는 것 같다나···.

'저거 가져가야겠는데···.'

대변혁 이후 이 집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는 말은 저 만약고도 흘러, 흘러 미우라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다.

던전이 사라지면 이 집도 무사하고 만약고도 오랫동안 이곳에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방치할 물건이 결코 아니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들여서라도 사야하는 물건이 저 만약고였다.

"좋제? 절반은 대대로 사용허던 것이고 절반은 내가 사들인 것이여. 오지도 안허는 자식새끼들은 괜한데 돈 쓴다고 싫어허지만 좋은 것을 어쩔 것이여!"

언제 오셨는지 뒤에서 말씀하시는 어르신이었다.

한 번은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이 꼬물이 때문에 놀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두 번이나!

만약고에 홀렸다고는 하지만 이건 심상치 않았다.

"좋네요. 이건 뭐예요?"

"그거! 그거 홀태기여. 예전에 이삭을 홀틀 때 쓰던 것이제. 인자는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것이제. 박물관에 있는 것들은 당장 쓰지 못허제. 허지만 여그에 있는 것은 바로 쓸 수도 있어. 내가 관리를 꾸준히 허니께."

정말 어르신 집에 있는 물건들은 당장 써도 될 것 같았다.

"좋네요. 그런데 조금 물건들이 불쌍하네요."

"불쌍타니? 와 불쌍혀? 내가 적어도 보름에 한 번씩은 싹 관리를 혀주는디. 야들이 이래뵈게도 사람 팔자보다 나사. 내가 흥분혀서 말이 막 나오는구만. 내가 요것들 구하러 전국 팔도를 댕기다본께 팔도 사투리가 다 섞였어. 그러니 알아서 걸러들어."

"예. 그런데 농기구는 이리 누워있으면 안 되잖아요. 써야지."

"내도 이것들 쓴다고 허는 사람이 있으먼 주것어. 야들헌테 생명을 찾아주는 것이니께 말이여. 허지만 요즘 세상에 누가 이것을 가져다 쓰것어?"

저걸 줘도 좋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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