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우쭈쭈!
나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소환 대기실이었다.
지금은 모든 소환수가 대기실에 들어가 있었다.
이런 곳에서는 소환 대기실을 띄워두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든 나호는 대기실을 볼 수 있었다.
아마 나와 묶여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왜?'
비행기에서 혼잣말을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 받기 딱 좋아서 심상으로 물었다.
<집사! 저 녀석 좀 봐. 저 녀석 정보에 흉내 내기도 좋아한다고 나왔었나?>
말하는 것으로 보아 꼬물이를 말하는 것 같았다.
'왜?'
나호에게 질문을 하며 소환 대기실을 슬쩍 보았을 때였다.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꼬물이가 제 뿌리를 이용해서 하트를 만들어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내가 소환 대기실을 본 순간 저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다른 소환수들이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것으로 봐서 계속해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집사! 저 녀석 하트 모양은 어디서 봤지? 아니 그것보다 저 녀석 저거 지겹지 않나?>
'꼬물이 정보에 의하면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어.'
<정말 특이한 녀석이야. 아니지. 던전 덩굴들은 어쩌면 저 특성은 모두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입장 전 검사 때문에?'
<맞아. 그거 은근 지겨운 일일 수 있잖아. 그런데 던전 덩굴들은 아무렇지도 않아했지. 그때는 이지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반복행동을 좋아했나봐.>
'그래 기본 특성일 수는 있겠다. 그런데 저걸 어디서 봤을까?'
만난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차에서 보냈다.
던전을 찾아다니는 것은 이동의 연속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TV에서 봤을 리도 없는데···.
[꼬물이가 하트 문양을 본 것은 공항으로 들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들렀던 휴게소입니다. 하트 문양의 플라스틱이 크게 달린 볼펜을 보았습니다. 지나가던 커플이 커다란 볼펜을 서로에게 흔들며 사랑한다고 했죠. 그걸 보고 강대한 님께서 웃으셨고요.]
권능 기억의 말이었다.
권능 기억은 전생의 일 뿐만 아니라 현재 내가 보고 들은 모든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의 말을 들으니 휴게소에서 색색의 하트문양이 달린 볼펜을 본 것 같았다.
아니 분명 봤었다.
웃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말이다.
<우와아아! 그걸 보고 저러고 있다는 거야? 집사! 반응을 좀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 저 녀석 언제까지고 저러고 있을 것 같아.>
가늘고 하얀 뿌리가 만든 하트는 여려 보이면서도 조금은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하얀색 금낭화가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하얀색 금낭화보다는 훨씬 투명하지만···.
살짝 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어주었다.
그만하라는 신호이기도 하고 네 마음은 충분히 알았다는 의미를 담은 손짓이었다.
그런데 꼬물이는 전혀 다르게 해석한 것 같았다.
조금 전 보다 더 격하게 하트를 좌우로 흔들었다.
뿌리가 하나 나와 있어서 망정이지 여럿 나와 있었으면 아이돌의 콘서트를 방불케 할 것 같았다.
아이고!
꼬물이가 아무래도 내 마음을 들여다 본 모양이었다.
몇 개 되지도 않는 제 뿌리들을 총 동원했다.
옆에 얌전히 있던 제 짝의 뿌리까지 끌어와서는 하트 문양을 만들어주느라 부산스러웠다.
<프! 프하하하! 하하하! 집사! 아이들이 많으면 웃을 일이 많다고 하더니···. 옛말 그른 거 하나도 없어! 하하하! 냄새 좀 나고 이상한 버섯 좀 만들면 어때. 저리 애교를 부리는데···.>
나호가 배를 잡고 웃었다.
허리가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웃는 나호였다.
꼬물이의 하는 짓이 워낙 기발하고 깜찍하기는 했다.
꼬물이의 노력 덕분인지 나호가 꼬물이를 바라보는 시선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새 최악의 쓰레기 버섯에서 이상한 버섯으로 표현부터 순화되어 있었다.
언어가 순화된다고 실체가 변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과 관심을 받으면 냄새를 덜 풍긴다니 열심히 반응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주위에 사람이 없었다면 입을 열어 마음을 전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어서 손가락 하트를 날리고는 메모지에 하트를 여러 개 그려 주었다.
<집사! 저 녀석 좀 봐. 저 녀석 집사 따라하는데?>
꼬물이는 상식을 깨는 재주를 가진 것 같았다.
메모지에 하트를 그리는 것을 유심히 보더니 손가락처럼 쓰고 있는 뿌리로 바닥에 하트를 그렸다.
처음 그리는 것이라 삐뚤빼뚤했지만 그래서 더 귀엽고 정감 가는 문양이었다.
그리는데도 제법 시간이 걸리는 것이 온 정성을 다하는 것 같았다.
더 놀라운 것은 다른 뿌리는 여전히 하트문양을 유지한 채 좌우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여러 사람을 검사하더니 역시 여러 행동을 동시에 할 수 있네.'
한 번 하트를 바닥에 그린 녀석이 반복해서 하트를 그렸다.
뿌리 하나로 그리는데 시간이 걸리자 두 개의 뿌리로 동시에 반반씩 그려서 하나의 하트를 완성시키는 응용력까지 보이는 꼬물이었다.
나도 모르게 '신기하네!'하고 혼잣말을 할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나호야. 저 녀석은 한글 금세 배우겠다. 저렇게 반복하는 것을 좋아하니 진도가 쑥쑥 나가겠어.'
<쪼롱이가 냄새 때문에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쪼롱이 저 녀석 다 좋은데 배우려하질 않는다니까. 저만 배우지 않으면 되는데 다른 애들에게까지 세뇌하듯 '공부무용론'을 설파하고 있어.>
'공부무용론? 설마?'
<진짜라니까. 그렇지 않으면 저 녀석들이 하나 같이 저렇게 행동할 리가 없어.>
나호의 말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 같았다.
멀찍이 떨어져서 대기실의 입구를 보고 있던 쪼롱이가 어색하게 움직였다.
저건 누가 봐도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었다.
'어쭈? 그렇단 말이지?'
애들이 오늘 나를 놀라게 하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하는 짓마다 놀라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집사 여기서는 집사가 저 녀석 좀 가르쳐 봐. 일본에 도착하면 내가 할게.>
'좋지. 모든 처음은 의미 있으니까.'
대답을 하며 메모지에 기역을 그렸다.
<'ㄱ' 기역이야. 기역! 너 지금 한글 배우는 거야. 집사와의 소통을 한층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 잘 배워.>
나호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꼬물!
꼬물이가 하트 문양을 유지한 채로 꼬물하며 긍정을 표했다.
그리고는 대답한 것을 바로 실천하겠다는 듯 바닥에 기역(ㄱ)을 그렸다.
그림 같은 글자를 그리기는 했다.
그런데 가로 선을 긋고 그대로 내려야 하는데 이걸 반대로 하고 있었다.
내가 기역(ㄱ)을 쓴 장면을 영상으로 찍어 거꾸로 돌렸을 때 보이는 대로 글을 쓰는 꼬물이었다.
<잘 썼는데 뭐지? 너 다시 써봐. 저 녀석 신기하다. 어떻게 저렇게 반대로 쓰지?>
꼬물이는 글을 쓰는 순서를 완전히 뒤집은 것은 물론이고 글자도 뒤집어서 썼다.
내가 봤을 때는 기역(ㄱ)으로 보이지만 꼬물이가 봤을 때는 니은(ㄴ)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신기하네. 이거 꼬물이만 그러나? 쪼롱아! 꼬물이 옆으로 와봐.'
다른 때 같으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왔겠지만 공부를 시작한 꼬물이를 봤기 때문인지 정말 느리게 움직이는 쪼롱이었다.
걸어왔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날아오면서 저런 묘기를 보여주니 신기할 지경이었다.
'너 기역(ㄱ)은 쓸 수 있지? 모르겠으면 이거 보고 써봐.'
메모지에 큼지막하게 기역(ㄱ)을 그려보였다.
늘 해맑은 쪼롱이의 얼굴에 순식간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리고 정말 싫은 표정으로 바닥에 기역(ㄱ)을 그렸다.
제법 빠르고 정확하게 그었는데 쪼롱이도 내가 보기에는 기역(ㄱ), 쪼롱이가 보기에는 니은(ㄴ)을 그렸다.
'이거 뒤집어서 쓴 거야. 알고 있어?'
쫑!
'그럼 네가 보기에 기역(ㄱ)으로 써야지.'
쫑! 쪼로로로!
대답을 한 쪼롱이가 자신이 보기에 기역(ㄱ)이 되도록 선을 그었다.
그 모습을 뿌리를 이용해서 지켜보고 있던 꼬물이도 바로 바닥에 기역(ㄱ)을 썼다.
이번에는 꼬물이가 보기에 기역(ㄱ)이 확실했다.
'소환수들은 자신보다 소환한 사람 위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내 생각엔 자신들 방향으로 써야한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나호가 방금 느꼈던 감동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게 뭐 중요하나? 지금 쟤들이 글씨 쓰는 것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그런데 저 녀석 저러다 다치는 거 아니야?'
쪼롱이는 발톱을 이용해서 글씨를 쓰니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꼬물이는 여린 뿌리를 이용해서 글을 쓰고 있었다.
쪼롱이는 몇 번 쓰지 않았는데 벌써 꽁무니가 들썩거렸다.
공부가 정말 싫은 모양이었다.
유유자적 대기실을 오가는 다른 소환수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꼬물이는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는 계속할 것 같았다.
반복적인 행동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글자 공부에는 더 관심이 많은지 꾹꾹 눌러 기역(ㄱ)을 쓰고 또 쓰고 있었다.
처음 글을 익히는 아이가 종이가 찢어져라 힘을 주고 쓰는 것과 비슷했다.
입이 있었다면 뿌리 끝에 침까지 발라가며 썼을지 모를 일이었다.
<저 녀석 하는 짓이 묘하게 향수 돋게 하네. 예전에 말이야 종이가 귀하던 시절에 시멘트 포대를 잘라서 글씨 연습을 했거든. 그때는 시멘트 포대도 귀했지. 지금은 정말 살기 좋은 거야.>
할아버지에게 들을 법한 이야기지만 우리 또래는 만화로 더 친숙한 이야기였다.
여린 뿌리 끝이 상할 것 같은데 전혀 의식하지 않는지 글씨 쓰는 것에만 열중하는 꼬물이었다.
열심히 연습하던 꼬물이가 제 짝인 덩굴의 뿌리를 끌어다 같이 연습을 시켰다.
꼬물이의 짝인 덩굴은 혼자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아수라 던전에서 가지고 온 던전 덩굴도 마찬가지였다.
꼬물이는 제 다른 뿌리 두 개를 이용해서 짝의 뿌리를 붙들고 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것은 언 듯 연필을 잡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엄마가 아이 손을 잡고 글씨 연습을 시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가장 긴 뿌리로는 여전히 열심히 글씨를 쓰고 있었다.
워낙 가늘고 여린, 뿌리의 수도 일곱 개 밖에 되지 않은 녀석이 하는 짓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광경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었다.
글씨를 쓰거나 돕고 있지 않은 뿌리들은 여전히 하트 모양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아직 짧아서 하트가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뿌리도 두 개나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더 앙증맞아 보였다.
<첫 손주 재롱도 저것보다는 덜 재미지겠어.>
나호의 말이 칭찬이라는 것은 또 어떻게 아는지 더 열심히 꾹꾹 눌러서 글씨를 쓰는 꼬물이었다.
'다치겠다. 꼬물아! 너무 힘주지 마.'
아무래도 뿌리 끝이 다치지 않도록 뭔가 안전장치를 마련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꼬물이 녀석 하는 짓이 상상을 초월했다.
옆에 놓인 치료수 그릇에 뿌리 끝을 살짝 담그고는 가만있는 것이었다.
<어우! 어우! 우쭈쭈! 집사! 아팠나봐. 괜찮은 척 하더니···.>
쪼로로로!
나호가 예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쪼롱이가 자기 좀 보라고 난리였다.
놀고 싶어 죽겠는데 붙들어 놓고는 자신에게는 관심도 없자 뿔이 난 모양이었다.
벌써 꽁무니는 뒤로 잔뜩 빠진 상태였고 다리 하나도 살짝 들린 것이 언제라도 날아올라 제 무리로 날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간간히 날개로 코를 가리는 것이 꼬물이의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아직 냄새가 심하지 않지만 분명 달갑지 않은 냄새가 나는 꼬물이었다.
뿌리만 보면 냄새가 날 것 같지 않지만 솔솔 냄새를 풍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리 열심히 하는지도 모르겠고···.
치료수에 담갔던 뿌리를 꺼내더니 다시 글쓰기에 열중인 꼬물이를 보는데 왜 살아내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던 전생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사라지지 않는 입 냄새를 안고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던전으로, 던전으로 향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아버지였고, 어머니였고, 누나, 동생, 형이었다.
그렇게 몸부림쳐도 나아지지 않던 살림살이···.
마나를 1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때는 누구도 부르튼 손발에 관심을 가질 새가 없었다.
따가워서 내려다보면 쩍 갈라진 손에서 피가 배어나오곤 했었다.
쓱 닦고 다시 던전을 헤매던 일상들···.
헌터인 내가 그 정도였는데 일반 국민들은 오죽했겠는가.
괜스레 코끝이 찡해지고 가슴 한 편이 먹먹해지려는 순간 나호의 말이 들려왔다.
<집사! 그런데 저 말썽쟁이들은 어디에 심을 거야?>
심을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