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아버지의 마나통
"미우라의 마나통을 줄 수 있나?"
입으로 뱉은 이상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시스템의 대답을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세상이 쥐 죽은 듯 조용한 것 같기도 했다.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고 시스템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런데 대답에 앞서 시스템이 한숨을 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띠링! 미우라 에이지의 마나통! 아직 각성 예외자의 마나통이 아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질긴 놈! 아니 무섭다고 해야 하나? 빨리 제거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합격선에 들다니···.>
[이번 시험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어서 이번에도 통과할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나호의 말에 대답하듯이 시스템이 덧붙이 말이었다.
[통과하지 않았다고 해도 마나통은 매회차 시험이 완전히 종료된 이후에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시스템의 말처럼 각성 예외자가 된 사람들의 마나통 구입은 시험이 완전히 끝난 후 이루어졌다.
그래서 1등을 해도 매번 시험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나야 그냥 기다리지 않고 그룹을 이탈해 세 분을 돕고 이것저것 챙길만한 것들을 챙겼지만 말이다.
<그래서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나호가 기다리지 못하고 퉁명스런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만큼 미우라의 마나통을 갖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띠링! 소원권을 사용하신 것이니 허락해드리겠습니다. 단···.]
시스템이 단서조항을 말하려고 했지만 나호의 환호성에 묻히고 말았다.
<아자아아아! 이거지! 이거라고오오오! 하하하하! 미우라 놈! 아이고 이제 다리 뻗고 자겠네. 하하하!>
5미터만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런 제약이 없었으면 지금 나호는 우리 옆에 없었을 것이다.
너무 기뻐 어디론가 달려 나갔을 테니 말이다.
나호가 좋아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저 정도로 좋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멀리 뛰쳐나갈 수 없으니 내 주위를 빙빙 돌면서 방방 뛰며 기쁨을 만끽하던 나호가 갑자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물론 허공에 붕 뜬 채였다.
그러더니 구슬픈 넋두리를 시작했다.
<집사! 집사도 좋지? 이제 그 서러운 시간이 정말 끝이 났네. 참 지겹도록 긴 시간이었어. 회귀를 하면서 다시 똑같은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웃다 우는 것을 반복하는 나호를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사실 나호 못지않게 기분이 좋았다.
한 번씩 놈을 각성하도록 내버려둘까도 생각했었다.
각성을 하게 한 후 놈의 마나통을 빼앗아도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각성했으니 당연히 자신의 마나통은 자신이 갖고 있다고 믿고 살아가는 놈을 보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철석같은 믿음이 깨어지는 순간의 놈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놈이 비세계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을 접었다.
놈은 마나가 깃든 세상에서는 완전히 달라졌다.
움직임부터 사고방식까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눈빛부터가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입!
무조건 쏟아내기부터 하는 입만은 그대로였지만 대변혁 이후에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고장 난 전등에 불이 들어온 것만큼이나 급변하는 놈을 보며 어떻게든 마나통을 빼앗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세상일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전 세 번의 소환은 소그룹으로 다시 나누어졌기 때문에 놈과 함께 움직이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놈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놈이 점점 근육돼지로 변화되어 갈수록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었다.
만약 대변혁 때까지도 놈의 마나통을 얻지 못하면 대변혁의 날 전령조의 쉼터를 이용해 일본으로 온 후 놈을 처리하면 그만이었지만 우리는 놈이 마나통을 잃고 변한 세상을 살아가길 바랐다.
그 삶이 얼마나 힘겨운지 놈도 겪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저 한순간의 죽음으로 갚기에는 놈이 저지른 죄악은 너무 거대했다.
그런데 오늘 어리바리 신참 덕을 보게 생겼다.
신참은 짜증은 유발했으나 크나큰 선물을 한 셈이었다.
<······집사! 고생 정말 많았어. 앞으로도 한참 고생해야겠지만 이제 어깨 펴고 살아도 되겠다.>
나호의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전생을 함께 했다고 해도 나는 보지 못했으니 간혹 믿기지 않다가도 저런 모습을 보면 함께 그 험한 세월을 살아왔다는 것이 사실이구나 싶었다.
전생을 살아낸 모든 사람들이 힘겨웠겠지만 지켜봐야 하는 나호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너도 고생 많았어. 너도 실체를 어서 가지면 좋겠다."
<왠지 멀지 않은 것 같아. 마음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하하!>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실체에 대한 이야기도 편하게 답하는 나호였다.
우리에게 기쁨을 충분히 만끽할 시간을 준 시스템이 다시 설명을 덧붙였다.
[미우라 에이지의 마나통을 가지시는 것을 허락해드리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고양됐던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설마 우리가 김칫국부터 마신 것은 아니겠지?>
나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앞발까지 까닥거리고 있는 것이 살짝 불안한 모양이었다.
[먼저 양해의 말씀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조건 없이 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사실 소원권이 아니라면 각성예외자가 아닌 사람의 마나통은 절대로 드릴 수 없습니다. 이곳은······.]
시스템의 조금 긴 설명이 이어졌다.
대부분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비세계인 이곳은 대변혁이후를 준비시키고 적합자를 찾아 각성으로 이끄는 곳이기 때문에 아직 탈락자가 아닌 사람의 마나통은 그 어떤 이유로도 지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급하는 이유는 갑자기 발급된 소원권 때문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신참이 싸지른 똥을 상사가 치우고 있다는 말이었다.
시스템 쪽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도 그냥은 줄 수 없고 두 가지 중 한 가지 조건을 달성하면 미우라의 마나통을 주겠단다.
소원권으로 획득한 것이니 공짜로 말이다.
[띠링! 첫 번째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지껄여봐.>
다른 때 같으면 절대 저렇게 말할 나호가 아닌데 많이 속이 상한지 거칠게 말하는 나호였다.
[이번 평가를 포함해서 미우라 에이지가 탈락하는 것입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떨어지면 소환권이 아니라도 살 수 있잖아.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소환권을 이용해서 미리 사려는 거지. 떨어진 뒤에 사려면 누가 미쳤다고 소환권까지 쓰겠어?>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대신해주는 나호였다.
[미우라 에이지가 탈락하면 공짜로 얻으실 수 있습니다.]
<마나 1도 하지 않는 것으로 인심 쓰는 척 하기는! 됐고! 두 번째 조건이나 읊어봐.>
[두 번째 조건은 강대한 님께서 남은 소환에서도 지금처럼 1위를 하시는 겁니다.]
<뭐? 집사! 얘들 순 사기꾼들이야. 1위라면 뻔히 세계 1위를 말하는 걸 텐데···. 세계 1위를 무슨 옆집 강아지 부르듯이 하고 있어. 요즘은 옆집 개도 저렇게 함부로 못 불러! 어떤 세상인데 되지도 않는···.>
"어지간하면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이건 아닌 것 같아. 세계 1위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잖아. 실력만으로 1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누구보다 잘 알잖아."
실력이 받쳐주어야겠지만 1위를 만드는 것은 실력만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행운 능력치 덕분인지 운이 좋은 편이었지만 이 행운이라는 것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를 일이었다.
<가지고 노는 것도 유분수가 있지. 이런 조건이었으면 우리가 좋아 날뛸 때 말리기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완전 바보 만드는 거잖아.>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간마저 소중해. 알잖아? 세 분을 도우러 가야하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거."
이번 시험은 특히 걱정이 많았다.
어머니와 큰아버지는 크게 걱정이 없었다.
개별적으로 떨어져도 분명 탈락할 만큼의 성적은 면하실 것이 분명했다.
특히 큰아버지께서는 전생에 외팔로도 각성을 하셨으니 더 걱정이 없었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고지식한 아버지는 사람에게 총을 겨누시지 못하실 가망성이 높았다.
그것이 비록 물총이라도 말이다.
어릴 적 나는 단 한 번도 장난감 총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장난감이라도 총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운동도 거친 운동은 싫어하셨던 아버지께 총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께 이번 시험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비세계에서 사시면서 달라지셨다고 해도 밑바탕에 깔린 도덕관념까지 바뀌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특히 혼자 계신다면 더더욱···.
그래서 더 열심히 시험에 임했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서 아버지를 돕기 위해···.
그런데 소원권의 조건을 두고 실랑이질을 하고 있으니 누가 좋겠는가!
[이탈권을 이용하시면 강대한 님께서는 일정 시간을 회귀하시잖습니까?]
"회귀한다고 해서 아버지께서 시험을 시작하는 시간으로 가는 것은 아니잖아. 절대로 아버지께서는 남을 향해 총을 겨누지 못하시는 분이라고."
사실 시스템에게 따질 부분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괜스레 짜증이 났다.
이렇게라도 미우라의 마나통을 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인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소원권에 기록되어 있었듯 이미 강대한 님께서는 소원권을 사용하셨습니다. 원하시지 않는다고 하셔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추가로 말씀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설마 미우라 놈 마나통에 한 발 올린 상태이니 앞으로 시험 방해하지 말라고? 혹시라도 그런 말하려거든 차라리 입 닫고 있어.>
나호가 화가 나서 한 말이었는데 정말 시스템이 잠잠했다.
"후우우우! 어느 정도까지를 방해로 치는데?"
[미우라를 그냥 모르는 사람으로 생각하시는 정도면 됩니다.]
"이 정도면 소원권이 아니라 '염장권'이라는 거 알지? 누군가의 마나통 하나를 위해 앞으로의 세계 1위를 다섯 번 해야 한다니 과연 미우라의 마나통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양팔 저울이 한쪽으로 너무 심하게 기울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믿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양팔 저울은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강대한 님께서 잘 아시다시피 미우라 에이지는 전생에 1위를 차지한 이후 1위를 빼앗긴 적이 없습니다.]
시스템이 저렇게까지 말하니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놈이 보이는 모습만 보아도 보통 사람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런 사람의 마나통을 원하는 것이니 그만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좋아 조건을 받아들이겠어. 어떻게 보면 나쁘지 않아. 마지막 소환까지 놈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놈은 각성을 할 거고 각성한 놈의 마나통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내가 계속 1등을 하면 그만이지. 대신!"
시스템이 조건을 붙였으니 나도 한두 가지 조건은 걸어야했다.
"이번 이탈권은 아버지께서 계시는 곳으로 이동을 할 건데 혹시 아버지께서 이미 탈락하셨다면 탈락하시기 전으로 가게 해줘. 그 정도는 크게 문제되지 않잖아."
[이미 탈락하셨기 때문에 들어드릴 수 없는 부탁이십니다.]
쿠우우우웅!
시스템은 아무렇지 않게 한 이야기였지만 듣는 나는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까지 순간 하얗게 변한 것 같았다.
분명 비틀거렸을 것이다.
소환수들이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내가 이탈권을 쓰면 이곳의 성적을 고려해서 약간 회귀하게 해주잖아. 그걸 사용해도 이미 아버지께서 탈락하셨다는 말이야? 아니면 지금 시간 기준으로 탈락하셨으니 내가 아버지 옆으로 갈 수 없다는 거야?"
지난번부터 궁금했는데 매번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이번에 이탈권을 사용하시면 강대한 님께서는 이틀 전으로 회귀해서 가고자하시는 그룹으로 가시게 될 것입니다. 강대한 님의 아버지께서는 그 전에 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안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빨리 탈락하셨다는 거야? 삼일? 사일도 버티지 못하셨구나.>
[시험을 시작하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탈락당하셨습니다.]
예상대로였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비세계의 아버지도, 현세계의 아버지도 모두 충격이 장난이 아닐 것 같았다.
<비세계의 아버지께 말씀을 충분히 드렸는데 왜 그러셨지?>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아시는 분이었는지도 모르지."
<아이고!>
"아버지의 마나통은 상점에 등록이 됐겠네?"
[워낙 빨리 떨어지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우라의 탈락을 바랐는데 아버지께서 탈락을 하시고 말았다.
"그럼 아버지의 마나통을 지금 살게."
[아직 시험이 종료되지 않아서 마나통을 구매하실 수 없습니다.]
"아! 그렇지. 시험이 종료되어야 하지."
전생에는 아버지께서는 3월, 어머니께서는 5월에 마나통을 잃으셨다.
이번에는 조금 더 버티셨으니 그것에 만족해야 하는가?
아니었다.
조금 더 버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버티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비세계에서의 시험이었다.
12월 시험에서 떨어져도 각성 예외자가 되었다.
아쉽다고 무언가를 챙겨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챙겨주기는 고사하고 비세계에서의 모든 기억을 지웠다.
각성 예외자가 된 사람은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기억이 남아있다면 아쉬움에 잠 못 드는 밤이 하루 이틀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럼 마나통 저장고의 기능 중 하나만 먼저 열어줘. 마나통 저장고의 기능은 어차피 마나 없이도 오픈이 되잖아."
[어떤 기능이 열리시길 원하십니까?]
이렇게 묻는 것을 보니 들어줄 모양이었다.
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