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이름값
<도대체 얼마나 비싼 물건이기에 저리 뜸을 들이는 거야? 이거, 이거 슬슬 불안해지려고 하네.>
시스템의 낚시질이 연상되려는 순간 쇼핑 가이드 쇼이가 말하는 가격이 귀에 꽂혔다.
[2만 마나입니다.]
"얼마라고?"
[2만 마나입니다. 50% 할인된 겁니다. 이 제품은 향후 할인 계획이 없습니다.]
마나를 긁어모으기 좋아하는 시스템에게 '할인'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류 최초 보상으로 인벤토리, 스킬, 마나통을 50%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시스템이 할인을 해준다거나 이벤트가격으로 물건을 파는 것을 전생에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을 뿐더러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러니 놓치기 어려운 기회이기는 했다.
하지만 2만 마나는 너무 비쌌다.
"2만 마나는 너무 과해. 그 가격이면 마나통 4만개를 살 수 있어. 그리고 그 마나통은 마나를 모으지."
<맞아. 그 돈이면 어디든 휴대가 가능한 인벤토리를 사고 말지. 어차피 그거 던전에 두고 써야 하는 거잖아. 대기실에 넣을 수도 없는 건데.>
나호가 정말 중요한 것을 지적했다.
지금 시스템과 쇼이가 판매하려고 하는 것은 던전에 보관하는 것이었다.
대기실에 있는 던전이 단 하나라도 열렸다면 거기에 넣어두고 전리품을 보관할 수도 있었다.
당장은 이미 소유한 던전에 설치해야 한다는 건데 그렇게 되면 비세계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된다.
[비세계에서 사용하실 거라면 이 제품은 필요 없기는 합니다. 쇼핑 가이드로서 강대한 님의 여러 상황을 살피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다시 전반적인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집사 이거 믿어도 되는 거야? 뭔가 많이 찝찝하네.>
"네 덕이야. 물건만 분석하고 있었더니 정작 내가 왜 사려고 했었는지 잊어버렸네."
쇼핑을 할 때는 주의를 한다고 그렇게 신경을 썼는데도 이런다.
눈 뜨고 코 베이지 않으려면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 같았다.
"역시 믿을 것은 나 하나라는 건가?"
<맞아. 가장 자신을 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야. 누구도 집사 자신만 하지는 못해. 잘 기억해야 해.>
"······."
<혹시라도 한국인의 고질병 도지지 말고.>
"뭔 소리야?"
<저렇게 친절하게 상담해주면 미안해서라도 뭐 하나씩 사주잖아. 대개의 물건에는 그 홍보비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말이야. 그걸 귀신처럼 알고 이용한 것이 시스템이고. 어떻게 알았는지···.>
시스템은 시간이 지날수록 성향에 맞춘 판매 전략을 가지고 왔다.
물론 사기를 치거나 과장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매 후에 후회하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다시는 불필요한 구매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면 마나가 사라진 후였다.
[강대한 님의 여러 사정을 고려해서 다시 분석을 했습니다. 당장은 인벤토리를 구매하시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실수를 했다고 느끼는지 쇼이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현재 D급 인벤토리까지는 개인이 구매할 수 있는 수량을 전량 구매한 상태다.
더 인벤토리를 늘리고 싶으면 C급을 사야했다.
C급 인벤토리는 50*50*50센티미터로 한 개당 2000마나!
개인당 단 두 개만 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난 50% 할인된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으니 이천 마나면 두 개 전부를 살 수 있었다.
또한 인류 최초로 C급 인벤토리를 전부 구입하면 같은 C급 인벤토리가 하나 더 따라올 것이었다.
"B급 인벤토리는 각각 1미터씩인가?"
확인하기 위한 물음에 쇼이가 답변을 해왔다.
[그렇습니다. 가로, 세로, 높이 1미터씩이고, 하나에 1만 마나입니다. 개인당 단 한 개만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이 정도 제공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공은 무슨? 사는 건데···.>
"한 개만 살 수 있는 B급도 구매를 하면 추가로 하나 더 주나?"
[그건 구매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좋아 C급과 B급 모두 구매할게."
[띠링! 7,000마나를 투자하여 B급 인벤토리 한 개와 C급 인벤토리 두 개를 구매하셨습니다. 상태창을 통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한 것은 시스템이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여우가 가져가는 꼴이네. 아닌가? 재주는 여우가 부리고 돈은 곰이 가져갔나? 집사! 쇼이와 곰은 어울리지 않지?>
덤으로 추가 인벤토리를 얻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은지 나호가 싱글벙글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띠링! 인류최초로 C급 인벤토리를 모두 구매하신 강대한 님께 C급 인벤토리 한 개를 추가로 지급하였습니다.]
[띠링! B급부터는 인벤토리를 구매하셔도 추가 보상으로 인벤토리가 지급되지 않습니다.]
<헐! 집사 들었어?>
"들었어."
반복되면 권리로 착각한다고 하더니 지금 내가 딱 그 짝이었다.
당연히 받아야할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살짝 속이 상했다.
[단! 같은 용량의 수납함이나 공간 주머니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헉! 집사! 이거 나쁘지 않다. 모양이 자유자재로 되는 공간 주머니가 낫겠지?>
실망했다 뜻밖의 물건을 받게 되자 금세 표정을 바꾼 나호가 환한 표정으로 재잘거렸다.
"같은 용량이라면 B급과 같은 용량을 말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1㎥인 공간주머니입니다.]
"그렇다면 공간 주머니로 할게."
휴대할 일은 많지 않겠지만 공간주머니가 수납함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10마나를 투자하셔서 공간 주머니의 모양을 원하시는 대로 설정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와아아! 정말! 이럴 때도 장사질이야?>
"잠깐만 나호야. 한 번 지정할 때 10마나라는 거야? 아니면 10마나를 지급하면 공간 주머니의 모양을 내 마음대로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거야?"
[원래는 1회 지정에 10마나입니다만 공간 주머니를 처음으로 가지게 된 각성자이시니 10마나에 언제든 원하는 모양으로 바꿀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단 지금 지급한 공간 주머니에 한정된 겁니다.]
"좋아. 10마나도 지급할게."
[좋은 선택이십니다. 추가로 방금 지급한 공간 주머니는 귀속품입니다. 귀속품은 더 비싸다는 것을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이! 알아주라고 어필하기는···.>
"그래도 귀한 것을 얻었으니 나쁘지 않아. 이만한 크기의 공간 주머니는 5000마나 이상일 거야."
<오천이 아니라 1만 마나 이상일 거야. 공간주머니나 수납함은 인벤토리보다 비쌌으니까. 싼 게 없어. 죄다 비싸기만 해.>
이런 것들에 비하면 마나통은 정말 쌌다.
50% 할인된 가격이기는 하지만 1마나를 주면 마나통 두 개를 얻을 수 있었다.
평생 고통을 받고 살아야 하고 원한다고 해도 쉽게 죽을 수도 없게 되는데 말이다.
공간 주머니는 물론이고 최하급 물약 하나 값도 되지 않는다는 것에 입맛이 썼다.
<집사! 왜 그래? 좋은 거 얻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좋아해도 될 것 같은데?>
"좋아! 공간 주머니를 핸드폰 팔찌로 만들까?"
<그렇게도 돼?>
"왜 안 되겠어? 요즘 따로 지갑 들고 다니는 사람 없잖아. 뭐든 다 핸드폰으로 되니까."
<편리한 세상이기는 하지. 요즘은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더라. 집사처럼 팔찌 형태로 많이 하지. 그것도 아니면 아예 이식을 하고.>
어릴 적에는 화면이 접어지고 말아지는 핸드폰이 유행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핸드폰을 사용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제는 손목에 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도 귀찮다고 아예 칩을 이식하는 사람도 많고 말이다.
핸드폰을 고정하는 팔찌 형태로 한다고 생각하자 공간주머니가 팔찌형태로 변했다.
10마나가 불러온 변화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변화였다.
<딱 집사 스타일이네. 깔끔하고 세련됐어. 피부와 닿는 부위는 부드럽고. 이런 팔찌가 실제로 나와도 인기 있겠다. 여기에 핸드폰까지 꽂을 수 있는 거잖아.>
홀로그램 구현방식이 일상화 되면서 핸드폰은 더 이상 클 필요가 없어졌다.
원하면 작은 귀걸이 모양으로도 만들 수 있었다.
그 안에 현대인이 원하는 모든 것이 들어가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음머어어어!
"그래 들어가. 고맙고."
짐을 질 생각으로 나왔던 반반이는 다시 빈 몸으로 대기실로 들어갔다.
대기실 입구를 지날 때 자기도 모르게 코를 살짝 찡그리는 반반이었다.
꼬물이의 냄새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전리품을 넓어진 인벤토리에 넣는 것은 껌 씹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공간 주머니에 넣을 줄 알았더니?>
"당장 쓸 필요는 없지. 인벤토리가 우선 넉넉해졌으니까."
필요 없는 부산물은 시스템에게 팔아치우고 안쪽으로 이동했다.
사냥과 도축을 반복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다.
그런데도 던전의 끝이 나타나지 않았다.
"확실히 성장이 끝난 던전 같아."
<시험이 끝나기 전에 클리어 할 수 있을까? 이렇게 고생했는데 클리어가 코앞일 때 시험이 종료되면 어떻게 하지?>
"여기서 보내는 시간만큼 밖의 시간도 흐르지는 않을 거야."
<그럼 다행이지만. 워낙 고생을 해서 그렇지.>
이 던전은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곳이었다.
사냥조들이 사냥을 돕는다고는 해도 혼자 움직이니 고생이 될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쌓이는 마나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움직였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꼬물이가 저 좀 보라며 꼬물거렸다.
그러더니 바닥에 이런 글씨를 반복해서 썼다.
ㄷㅈㄷㅈㄷㅈㄷㅈㄷㅈㄷㅈ
<꼬물아! 자음만 쓰지 말고 모음까지 넣어서 써봐. 잘 할 수 있잖아.>
꼬물!
꼬물이는 지난 열흘 간 모음까지 모두 익혔다.
그래서 지금은 자음과 모음을 붙여서 글자를 쓸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자음만 쓰는 것을 좋아했다.
초성 게임하는 것처럼 재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대지 대지 대지
<대지? 땅? 땅이 왜?>
꼬물이가 쓰려고 했던 단어는 대지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야 대지 대지
<아니라고? 그럼 뭐야? 어째 한글을 익히기 전보다 소통이 더 어려운 것 같아.>
"과도기겠지. 금세 잘 할 거야. 저렇게 노력하잖아."
<그럼 집사는 저게 뭘 의미하는 것 같아?>
"땅은 아니라고 했으니까 혹시 돼지를 말하고 싶은 거 아닐까? 꿀꿀 돼지 말이야."
꼬물! 꼬물!
자신이 쓰려고 했던 것을 알아주자 기분이 좋은지 가장 긴 뿌리로는 꼬물거리고, 다른 뿌리로는 하트를 만들어서 사정없이 흔들고, 그러고도 남은 뿌리로는 한글 공부 중이었다.
ㄴㅎㅂㅂ
ㄴㅎㅂㅂ
ㄴㅎㅂㅂ
ㄴㅎㅋㅋ
ㄴㅎㅋㅋ
바닥에 쓰고 있는 글씨는 저런 것이었다.
"꼬물아! 돼지가 왜?"
나아나아나아
<아우! 답답해. 나아나아나아는 또 뭐야?>
"나타난다는 거 아닐까?"
<에이! 설마! 정찰 나간 사냥조들도 조용한데···.>
사냥조들이 정찰 중이기 때문에 앞 쪽의 상황은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돼지를 닮은 몬스터가 나왔다는 보고는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쪼롱아! 돼지 본 새들 있어?"
쭈루!
자신 있게 아니라고 대답하는 쪼롱이였다.
"이상하네."
꼬물이는 계속해서 바닥에 글씨를 썼다.
의미 있는 것을 쓸 때도 있지만 그냥 재미로 반복해서 쓰는 것도 많아서 꼬물이가 쓰는 글씨를 주위 깊게 보는 편은 아니다.
<꼬물이 저 녀석이 헛소리를 할 녀석은 아닌데···. 집사 이상하지?>
"많이 이상하긴 하지. 신경은 쓰고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반나절을 더 이동했을 때 정찰을 나갔던 새의 연락을 받은 쪼롱이가 쪼롱거렸다.
그런데 쪼롱이가 전하는 소식도 돼지였다.
"돼지가 있다고?"
쫑!
ㄷㅈㄷㅈㄷㅈ
쪼롱이와 꾸루는 구체적인 의사소통을 해야 할 때는 글씨를 쓸 줄 아는 꼬물이를 통해서 했다.
같은 소환수여서 그런지 자기들끼리는 의사소통이 잘 되는 녀석들이었다.
<이게 뭔 상황이지? 대기실에 앉아 있는 꼬물이가 어떻게 보스 몬스터가 돼지인줄 알았을까?>
"글쎄. 굳이 추측을 한다면 던전 덩굴인데···. 던전에 따라서 다 다르잖아."
<그랬지. 단 하나도 같은 던전 덩굴은 없었어. 같은 종의 던전 덩굴이라도 말이야. 집사 말은 던전 덩굴을 보고 알았다는 거야?>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지. 그렇지 않다면 설명할 수 없잖아. 던전 덩굴은 어쩌면 인간의 지문이나 머리카락 같은 걸지도 몰라."
<여러 정보를 담고 있다는 거지?>
"그렇지."
<저 녀석 달리 보이네. 던전을 들어가지 않고도 알 수 있다면 획기적이긴 하겠다.>
전생을 경험했다고 해서 모든 던전을 다 아는 것은 아니었다.
상시 던전으로 오래 지속된 던전 중 한국에 있는 것은 거의 다 안다고 할 수도 있지만 1회성 던전이나 출입이 통제됐었던 던전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그런데 꼬물이가 던전 정보를 미리 알려준다면 획기적인 정도가 아니었다.
신기원을 여는 것에 비견될 것이다.
"황꼬물이가 이름값을 하려나 보다."
꼬물!
조용히 듣고 있던 꼬물이가 기쁘다는 몸짓을 했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기쁨의 표현이었다.
<그래. 녀석 은근히 신경 쓰더니···.>
저 때문에 매일 2마나를 소비하는 것에 은근 신경을 쓰면서 눈치를 보던 꼬물이었다.
값비싼 치료수에 마나까지 들어가니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를 하고 애교를 부리더니 지금은 뿌리에 조금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집사! 저 녀석 좀 봐. 사람이나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밥값은 해야 맘이 편한가봐.>
대기실 농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