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마나 대출
<우리 집사 많이 컸네. 많이 컸어. 능력치만 아니면 전생 부럽지 않네.>
개별 능력치만 아니라면 정말 놀라울 정도의 상태창이었다.
건물주보다 대단하다는 던전주라는 직업도 얻었고, 전생엔 생각지도 못한 소환수와 대기실, 마나통 저장고도 얻었다.
부러울 것이 없는 상태창인 동시에 누구에게 함부로 내보일 수 없는 상태창이기도 했다.
"확인했어. 이제 힌트를 주면 좋겠는데?"
[제가 드릴 수 있는 힌트는 이미 강대한 님께서 해답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뭐라고? 집사! 집사! 방금 들었어? 이거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뭐하자는 거야?>
시스템의 말에 나호가 발끈했다.
하지만 지금 발끈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이미 천 마나는 소비를 한 상태고 582마나만 남아있었다.
582마나는 다음 소환까지 버티기에는 아슬아슬한 마나였다.
그러니 어떻게든 시스템에 뭔가를 더 알아내야 했다.
"상태창에 해답이 있다는 거야?"
[정확한 답은 저희도 알 수 없습니다. 꼬물이도 이미 한 생명이니까요. 정해진 종(種)을 바꾸거나 완화시키는 것이 쉬울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럼 처음부터 안 된다고 하던가! 대단한 힌트라도 줄 것처럼 하더니 이게 뭐야!>
나호가 제대로 화가 난 것 같았다.
온몸이 붉어지고 있었다.
백호여서 얼음이나 냉기와 잘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과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나호였다.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야. 그런데 이건 정말 정도가 심한 것 같아."
[옛말에 '병은 하나인데 치료법은 수백 수천 가지'라고 하죠. 이것저것 좋다는 것을 하다 보니 병은 나았는데 정확하게 뭣 때문에 병이 나은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죠. 그런······.]
시스템이 주저리주저리 말을 하는데 어떻게 말을 해도 핑계로 들렸다.
능력치를 샀으니 사기를 당한 것은 아니지만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사서 다음 소환까지 애를 태워야할 것 같았다.
당장 소환이 해제되면 도쿄를 시작으로 이 잡듯이 던전을 찾아 나서야 할 것 같았다.
한숨밖에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최대고객에게 피해가 가게 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해답은 상태창에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알려드리고 싶지만 저희에게도 그렇게만 정보가 전달되었습니다.]
<뭐라는 거야? 짜증나게.>
"그렇다 치고···."
<집사! 그냥 넘어가면 안 되지. 이건 거의 기망에 의한 거래에 가깝다고. 이거 문제 삼으면···.>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 알지? 582마나가 넉넉한 것 같지만 한 달 살기 빠듯해. 초반이었다면 상당한 양이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소환이 해제되고 난 후 마나통을 수거하시면 마나는 충분히 모으실 수 있습니다.]
마나통을 수거하면 마나통의 담긴 미량의 마나가 들어오기는 한다.
"얼마나 작은 양인지 잘 알잖아. 하루 종일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녀도 공기교환 한 번 하기 어려워. 공기 교환 말고도 내겐 딸린 식구가 많아."
내 마나의 영향을 받는 것은 쪼롱이와 꾸루, 반반이, 꼬물이가 전부이기는 했다.
나머지 소환수들은 쪼롱이와 꾸루, 반반이의 아래에 있는 것이어서 내 마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나보다 시스템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고···.
"꼬물이 녀석 밖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친구 하나 없이 지내고 있어. 냄새 때문에···. 저 나이의 아이가 공부만 붙들고 있을 나이는 아니잖아?"
사실 던전 덩굴의 나이 같은 것은 알지 못한다.
겉으로 어리게 보이니 그리 말한 것뿐이었다.
더구나 시스템은 던전 덩굴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 시스템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꼬물이를 무기 삼아 시스템을 공략해야 했다.
"지금은 그나마 귀엽기라도 하지. 조금 더 지나면 어떤 모습일지 알잖아."
전생의 꼬물이가 생각났다.
지금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꼬물이였다.
당시의 꼬물이에게는 누구도 가까이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덩굴손들의 검사를 좋아하는 헌터는 없었지만 특히 꼬물이의 검사는 질색을 했었다.
"쓰레기 버섯은 또 어떻고···. 막연히 상태창이라고만 말하지 말고 뭐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말해줘. 정 안 되면 좀 더 나은 치료수라도 얻을 곳을 알려주든지."
<그렇지! 잘한다!>
나호가 추임새를 넣었다.
"그리고 인간이 똑똑한 것 같아도 의외로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아. 상태창도 낯선데 상태창에 힌트가 있다고 하면 어떻게 알아? 너희는 상태창이 일상인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낯선 거야."
전생에 23년을 보아온 것이지만 사실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겉으로 나타나는 정보만 아는 것이지 그 안에 담긴 속뜻까지 파악할 수 없었다.
시스템은 상태창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 읽어내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리고 상태창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담겨있는데 힌트라고 던져주는 것이 '상태창'이라는 한마디야. 보유하고 있는 마나통만 해도 백오십 만에 육박해. 그 마나통 중 하나에 힌트가 있다는 말이야? 아님 보유 중인 던전에 힌트가 있다는 거야? 범위가 넓어도 너무 넓잖아!"
A4용지로 출력을 하면 몇 장 되지도 않을 상태창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적지 않았다.
회귀 이후 살아온 이력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살아나갈 정보까지 담긴 것이 상태창이었다.
그런데 상태창이라는 힌트 하나로 얼렁뚱땅 넘어가려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보유하고 계신 치료수보다 나은 치료수를 얻을 수 있는 던전을 알려드리면 되겠습니까?]
<헉!>
나호가 놀라서 입을 가렸다.
던전이란다.
몇 마디 따졌다고 던전이 나올 것 같으면 하루 종일 입씨름을 할 수 있었다.
[강대한 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꼬물이를 위한 선택일 뿐입니다. 그리고 힌트는 정말 상태창에 있습니다. 병을 낫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고요. 이 정도면 분명 답을 찾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시스템은 제법 진지하게 말했지만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던전을 한 군데 알려준다는 말이 너무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이왕 알려드리는 거 알려지지 않은 던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알려지지 않았다고? 전생에?"
[그렇습니다. 강대한 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나 알려졌을지 모르겠네요.]
내가 죽은 후에도 전생의 삶은 이어졌다고 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럼 그 세월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일까?
나는 지금 이곳에 이렇게 와 있는데?
고민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재빨리 상념을 털어버렸다.
"어딘데?"
[이식을 원하시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따라 알려드릴 수 있는 장소가 달라집니다.]
<혹시 강이나 바다 속에 형성된 던전인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랬을 가능성이 높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식을 하면 좋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던전이란다.
이번 생은 누군가에게 발견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쉽게 발견될 만한 곳에 있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었다.
"워프게이트가 있어서 왕래가 가능하다면 굳이 이식하지 않아도 돼. 대신 더 좋은 던전을 알려주면 고맙지."
<굿!>
앞발을 들어 보이며 만족감을 표시하는 나호였다.
[그럼 발견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웠던 던전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던전을 클리어하시면 소유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변혁 전까지는 다시 방문이 어려우실 겁니다.]
"그럼 그곳의 치료수를 어떻게 가지고 와?"
[꼬물이에게 필요한 것이니 대기실에 보관하시면 됩니다. 커다란 물통을 사셔도 좋습니다. 특별히 마나대출을 해드리겠습니다. 치료수를 보관할 수 있는 전용물통이 있습니다.]
<와아아! 이런 순간에도 판매를 하려고 하네. 그것도 대출까지 해주면서 말이야. 대출이자로 마나를 얼마나 뜯어가려고. 그런데 마나 대출이라는 것이 있었나?>
[마나대출은 현재 강대한 님께만 제공하는 서비스입니다. 최대 고객이시니까요. 첫 대출은 이자 없이 대출해드릴 수 있습니다. 대출가능한도는 현재 일만 마나입니다.]
<집사! 신중해야 해. 외상이면 소도 잡는다는 말이 있어. 알지?>
"대출을 해준다는 제의는 언제든 가능한 거지?"
[그렇습니다.]
"그럼 그것은 보류해둘게. 던전 위치와 어떻게 가야하는지 알려줘."
[던전은······.]
어차피 이곳에서는 바로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우선은 소환이 해제되어야 하고 던전을 가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도 필요했다.
좀 더 나은 치료수를 얻을 수 있다고만 했지 그 던전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심한 준비를 해야 했다.
귀한 것이 나오는 던전은 그 만큼 위험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집사! 왜 소환 직후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거기부터 다녀오는 것이 더 낫지 않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확실하지 않으니까. 아버지를 먼저 봬야할 것도 같고."
<아! 아버지께 다녀와야겠구나.>
시스템에게 던전에 대한 것을 간략하게 들은 뒤 소환이 해제되었다.
집에서 전화가 바로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화가 조용했다.
"이거 불안하다. 그렇다고 먼저 전화를 해볼 수도 없고."
비세계의 존재를 아시고 난 후에는 주무시다 소환이 되는 경우는 없었다.
매달 1일은 자정이후까지 깨어 계시는 세 분이었다.
비세계를 다녀온 후 가슴통증과 입 냄새를 통해 탈락을 확인하시고 주무시는데 아직 연락이 없는 것이었다.
<오늘은 주무시나? 아버지 절망하시면 어떻게 하지? 자책을 심하게 하실 텐데.>
아버지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호의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했다.
얻은 것이 많은 소환이었지만 잃은 것도 그에 못지않은 소환이었다.
ㅈㄹ! 나가고 싶대요!
꼬물이가 대기실 바닥에 쓴 글이었다.
가까이 오지도 않는 아이들의 통역사 역할을 착실히 수행하는 꼬물이었다.
대기실을 쳐다보니 쪼롱이는 물론이고 꾸루도 나오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나와도 좋아."
소환 직전에는 대기실을 잠가두는데 그래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쪼롱이와 꾸루가 전광석화처럼 밖으로 나왔다.
그러더니 창 앞으로 가서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
도쿄의 공기가 그리 깨끗한 편은 아닌데 저러고 있는 것을 보니 어느새 대기실에 냄새가 가득 찬 모양이었다.
<에궁!>
나호가 안쓰럽다는 듯 꼬물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꼬물이는 다시 글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더 짠하게 보였다.
"나가자."
<이 시간에 어딜?>
"던전 찾아봐야지."
<없었잖아.>
"그건 며칠 전이고. 소환이 한 번 끝났으니 열린 곳이나 던전 덩굴이 생긴 곳이 있을 거야. 우리 꼬물이 활약도 할 겸."
<그거 좋은 생각이네. 꼬물아 잘 할 수 있지?>
꼬물!
아침 첫 비행기를 예약해두고 집을 나섰다.
<던전 발견해도 바로 들어가지는 못하겠네? 화순에 가야하니까.>
'다녀와서 가야지.'
쪼롱이는 어깨에 앉았지만 꾸루는 다시 대기실로 들어가야 했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전생에 됴쿄에 생겼던 던전 중 가장 좋은 던전이 있던 자리로 이동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신주쿠의 어느 한적한 거리.
도로변의 번화가와는 달리 밤에 걷기도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곳이었다.
<이런 곳이 은근히 더 무섭더라.>
'고양이도 무서운 것이 있어?'
<나 고양이 아닌데? 집사에게 침팬지나 원숭이라고 하면 좋아?>
집에서 나왔을 때부터 나호는 예민한 상태였다.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들이 쪼롱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기 때문이었다.
집 근처에서는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한두 사람 마주쳤을 뿐이지만 신주쿠로 나오니 사람이 제법 많았다.
쪼롱이는 은근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지만 나호는 그렇지 못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와서야 조금 안심을 하는 것 같았다.
<아이 깜짝이야! 저건 뭐야?>
나호가 깜짝 놀라 뛰어올랐다.
건물 앞에 세워둔 인형 때문이었는데 나호가 놀랄 만큼 무척이나 기괴한 모양의 인형이었다.
<일본 애들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저런 걸 왜 저기 세워둬?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여기는 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나호가 놀라 뛰어오를 때 허리가 완전히 C자가 되었었다.
아주 제대로 놀랐다는 말이었다.
실체가 있었다면 이 골목 사람들이 다 놀랄 정도의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전생엔 여기였는데···."
<맞아. 그 나무 옆으로 생성이 됐었어.>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아주 작은 공원!
지금은 찾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 같은 곳이지만 세상이 바뀌고 나면 도쿄에서 이곳보다 사람이 많이 찾는 곳도 드물게 된다.
던전의 이름은 '과수(果樹) 던전'!
이름대로 각종 과일 나무가 많이 자라던 던전이었다.
"꼬물아! 느껴지는 거 없어?"
모두의 눈이 꼬물이에게 향했다.
공부에 열중하던 꼬물이의 뿌리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수맥을 찾는 젓가락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우 능숙하게 움직였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매우 어설퍼보여서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어설퍼 보이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뿐이었다.
꼬물이는 정확하게 던전 덩굴을 찾아냈다.
아직 땅위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인정! 꼬물아! 나 너 인정하다! 사랑스런 황꼬물!>
꼬물이가 말만 하면 뭐든 줄 것 같은 표정으로 꼬물이를 쳐다보았다.
꼬물!
밥값을 한 것이 좋은지 꼬물이가 즐거움을 그대로 표현했다.
꼬물꼬물 움직이는 것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일부 뿌리는 하트까지 만들어 흔들며 던전 덩굴을 발견한 것을 자축하고 있었다.
그 사이 꼬물이가 말하는 곳에 나호가 머리를 박고 던전덩굴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지난번 황금 던전 덩굴을 캐냈을 때처럼 과수 던전 덩굴도 큐브모양으로 떠냈다.
그리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스텐용기에 담았다.
스텐용기에 이름까지 적어 넣은 다음 대기실로 넣은 후에 자리를 옮기려고 할 때였다.
꼬물!
꼬물이가 바닥에 글씨를 쓰며 꼬물거렸다.
꼬물이의 가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