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꼬물이의 가출
꼬물이가 바닥에 쓴 것은 커다란 물음표였다.
세 개의 뿌리로 동시에 그려서 금세 완성한 물음표 위에 가장 긴 뿌리를 올리고는 톡톡 두드리는 꼬물이었다.
<집사! 뭔가 있는 걸까?>
"글쎄?"
<난 이 골목은 정말 싫어. 도로변과 왜 이리 다른 거야? 무섭게···.>
평상시에 이렇게 겁이 많은 녀석이 아닌데 나호는 이 골목에 오면 유난히 겁이 냈다.
꾸루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또? 또? 또?
꼬물이가 대기실 바닥에 글을 쓰더니 뿌리 하나를 대기실 입구에 가져다 댔다.
꼬물이의 뿌리는 대기실을 벗어날 수 없었다.
지금 뿌리가 있는 곳이 한계치였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녀석이 노크를 하듯이 톡톡 두드리며 뿌리 하나만 내보내달라고 하고 있었다.
바로 좋다고 허락을 해주고 싶지만 꼬물이에게서 나는 냄새가 걸렸다.
그런데도 계속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하는 꼬물이었다.
"나와도 좋아."
허락을 하자 꼬물이의 하얀 뿌리가 밖으로 나왔다.
꼬물거리는 뿌리는 땅위로 막 돋아난 덩굴손 같았다.
무언가를 감아야 안정을 찾을 것처럼 움직이는 여린 덩굴손!
지금 꼬물이의 뿌리가 딱 그랬다.
탐험을 마친 꼬물이가 대기실의 입구를 바닥으로 내려달라는 몸짓을 했다.
원하는 대로 대기실의 입구를 바닥으로 옮기니 그 상태에서 앞으로 전진하는 꼬물이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몇 센티미터 움직였을 뿐이었다.
<꼬물아! 어디를 가고 싶은 거야? 말을 해. 힘들게 그렇게 움직이지 말고.>
조금만 더!
신주쿠 뒷골목 작은 공원 바닥에 새겨진 한글이었다.
조금만 더!
다른 존재도 아닌 식물이 새긴 한글이라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글귀였다.
"그래 조금만 더 가보자."
대기실의 입구를 조금 더 앞으로 옮겼다.
단 한 걸음이었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걸음이었다.
대기실 입구를 옮기고 난 후 우리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꼬물이가 너무 의외의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꼬물이가 자신의 뿌리를 공원 바닥에 박기 시작했던 것이다.
"꼬물아! 왜 그래?"
<집사! 이 녀석 왜 이래? 가출하려는 거야? 아니 출가인가?>
꼬물이가 대기실에 뿌리를 내렸을 때 반반이도 꼬물이를 꺼내지 못했었다.
밟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정도로 작고 여린 식물이었지만 그만큼 엄청난 힘을 자랑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꼬물이가 신주쿠의 뒷골목 작은 공원에 자신의 뿌리를 박아 넣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꼬물이가 이곳에 있겠다고 한다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시스템마저도 막지 못할 것이다.
<집사! 저 녀석 왜 저래?>
"나도 모르지."
대기실에서 몸 전체를 꺼내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판이었다.
이건 누가 보든지 꼬물이의 가출이었다.
조금만 더!
우리의 맘을 알았는지 다른 뿌리 하나로 바닥에 다시 글을 쓰는 꼬물이었다.
더 뿌리를 박아 넣겠다는 것인지 조금만 이곳 흙을 느껴보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꼬물이의 몸은 대기실에서 거의 벗어나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뿌리를 땅으로 넣고 있는 모습은 처절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혹시 냄새로 상처를 입었나 싶기도 했다.
쭈루!
르루!
꿀꿀꿀!
소환수들도 우울한 소리를 내며 걱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꼬물이는 이런 주위의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죽으라고 열심히 하는 것이 좋기도 하는데 안 좋기도 하구나. 저 녀석 좀 봐 땀까지 흘리네.>
땀이 뚝뚝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드러난 뿌리에 물기가 올라있었다.
그만큼 힘들다는 의미였다.
그런 꼬물이가 갑자기 부르르 떨었다.
"꼬물아!"
조심스러워서 함부로 만질 수도 없는데 잠시 부르르 떨던 꼬물이가 안정을 찾았다.
뿌리 표면에 돌던 물기도 사라지고 하얗게 질렸던 것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뒤로 후진하기 시작했다.
돌려 감기를 하는 것처럼 박아 넣었던 뿌리를 빼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오려나봐.>
"어휴우우! 이 녀석! 걱정했잖아!"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꼬물이는 내 말에는 신경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마치 공부하지 않는다고 나호에게 잔소리를 듣던 쪼롱이를 보는 것 같았다.
ㄴㄲㅇ
ㄴㄲㅇ
ㄴㄲㅇ
이미 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뿌리가 바닥에 반복해서 쓴 글씨였다.
그러더니 나오는 족족 같은 글씨는 쓰는 꼬물이었다.
이제 가장 긴 뿌리만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꼬물이 주위에는 한글의 초성이 새겨지고 있었다.
ㄴㄲㅇ
ㄴㄲㅇ
ㄴㄲㅇ
이게 한두 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꼬물이 주위로 가득해서 마치 미스터리 서클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 니꺼야! 뭔데 저리 제 것이라고 하는 거야?>
"모르지. 보물이라도 발견했을지."
<보물? 운이 좋은 사람은 자신의 마당에서 광맥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유전을 발견하기도 하고 말이야. 설마 그런 것은 아니겠지?>
"여기에? 보물?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세상일은 모르는 거야. 집사가 딛고 있는 그 땅 아래 뭐가 있을지 누가 알아? 안 그래?>
퐁!
단단하게 박혔던 뿌리를 꺼냈을 때 이런 소리가 났던 것 같다.
그런데 꺼내진 것은 하얀 뿌리만이 아니었다.
"어?"
<허얼!>
쫑?
꼬물이의 가장 긴 뿌리 끝부분에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 들려있었다.
반짝!
희미한 가로등에 노랗게 빛나는 것은 분명 노란 실반지였다.
아무 무늬가 없는 실반지였는데 두께는 그래도 제법 되었다.
여자가 끼었던 것이 아니라 남자가 끼었을 것 같은 두께와 모양이었다.
반지가 드러나자 꼬물이는 반지를 뒤로 돌렸다.
마치 아이가 좋은 장난감을 등 뒤로 감추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이고! 아무도 안 뺏을 거야. 걱정하지 마.>
ㅈㅁ?
"정말이야. 아무도 안 뺏어. 원하면 더 좋은 것도 줄 수 있어."
ㅈㅁ? ㅈㅁ? ㅈㅁ? ㄴㅈㄲㅇ?
"그래 정말, 정말 너 줄게."
<저 녀석 마음이 급한가봐. 초성만 쓰는 것 보니.>
정말? 나줄꼬야?
"네가 발견했으니 네 거야."
<그 정도 깊이에서 꺼냈으면 네 꺼지. 습득물이라고 신고할 필요도 없겠다.>
꼬물이가 실반지를 단단히 붙들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녀석 대개 좋아하네. 새들 중 반짝이는 거 좋아하는 애들이 있는데 저 녀석도 그런가?>
"모르지. 이제 들어가자. 꼬물아!"
꼬물!
꼬물이가 냉큼 대기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올 때는 힘겨웠지만 들어갈 때는 누구보다 쉽게 들어가는 꼬물이었다.
대기실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밖으로 나온 부분의 힘만 풀면 자동으로 대기실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장점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대기실에 돌아간 꼬물이는 정말 소중한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실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 사이 주변을 한 번 더 돌아본 후 어두운 골목을 벗어났다.
그제야 나호가 안심을 하였다.
<저 골목은 대변혁이후가 더 나았던 것 같아. 이제 대변혁 이후에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조금 미안해해야 할까?>
"그러지 않아도 돼. 초기의 혼란은 줄여주는 것이니까."
<어떤 던전이든 클리어되기 전에는 재앙이기는 하지.>
이곳 과수 던전도 대변혁의 날 엄청난 피해를 만들어 낸 던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던전을 정리되고 난 후에는 이곳 던전보다 풍요로운 던전은 없었다.
안쪽에 몬스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맛있는 과일을 철철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무슨 농사를 짓든 풍작이었다.
무슨 나뭇가지든 꺾어다 이 던전에 꽂기만 하면 과일이 열린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풍요를 선물해주던 던전이었다.
일본 놈들은 이 던전을 신이 자신들에게 내린 선물이라고 했었다.
던전이 넓었다면 일본을 다 먹여 살리고도 남았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이 던전은 화순 던전 넓이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던전의 크기를 대중소로 나눈다면 중에 속했지만 중간급에 속한 던전 중에서는 좁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워낙 농사가 잘 돼서 대형 던전에서 나는 농산물에 버금가는 수확물을 거둘 수 있는 곳이었다.
이제 풍요의 신이 자신들에게 허락했다고 떠들던 던전은 더 이상 일본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던전은 한국으로 옮겨가서 우리 국민들을 먹여 살리는 터전이 될 것이다.
벌써부터 이 던전을 어떻게 활용하면 가장 좋을지 온갖 구상이 떠올랐다.
초반에 클리어만 잘 해주면 크게 위험하지 않으니 살 곳을 잃은 사람들의 보금자리로도 좋을 것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자연재해가 거의 없으니 어르신과 아이들이 살기도 그만이었다.
특히 각성을 하지 못한 일반인들이 농사를 짓고 나무를 돌보며 살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었다.
이런 던전에 아이들이 뛰어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꿈이 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우리나라에 생길 던전들을 미리 다 클리어 해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
<에이! 그거 불가능해. 던전이 어디 땅에만 있었나? 물속에도 있고 건물에도 생겼었는데···. 한두 개라야 다 정리를 하지. 그리고 집사의 기억에 없는 던전도 많아. 1회성 던전들도 많았잖아.>
대변혁의 날만 깜짝 등장했다가 피해만 양산하고 사라진 던전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던전들을 클리어 했다면 상시 던전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도 많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대변혁의 날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이후의 1회성 던전은 클리어하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집사! 혹시 한국에 나타날 던전 전부를 가지고 싶다는 야욕을 드러내는 거야?>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아니야. 피해를 어디까지 줄일 수 있을지 생각한 거야. 초반에 피해를 줄이기만 해도 다른 나라와 엄청난 격차를 벌리게 될 거잖아."
<그렇기는 한데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 자기들 잘나서 그런지 알고 까불면 어떻게 해? 적당히 없어져야 하는 놈들도 많아. 알잖아.>
"은근 위험한 발상을 하네."
<그게 아니고······.>
나호의 말은 다음 장소로 이동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우리는 밤새 잠을 자지 않고 던전을 찾아다녔다.
전생에 도쿄에만도 적지 않은 던전이 있었는데 더 이상의 던전과 던전 덩굴은 발견할 수 없었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도 집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전화를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직접 가서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첫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월평리는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왔다간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마을이 주는 느낌이 또 달라진 것 같았다.
<어? 만약고 어르신이다!>
나호가 가리킨 곳은 회사 앞의 논이었다.
논두렁을 만약고 어르신이 거닐고 계셨다.
그 뒤로 아이들 몇이 졸졸 따르고 있었다.
새끼오리를 데리고 물가로 이동하는 어미오리를 보는 것 같았다.
"이사 오셨다고 하더니 논에 나가계시네."
만약고 어르신을 모시고 오는데 가장 큰 힘이 됐던 것은 취업이었다.
자식들을 취업시켜준다고 하자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어르신이 바로 이사를 결정했단다.
죽기 전에 자식들 제대로 자리 잡는 거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하셨다는데 어르신은 분명 병을 이겨내실 것이다.
<만약고를 두고 불치병이라니···. 참 아이러니해.>
"아직 마나가 깃들지 않았잖아."
<마나가 깃들었다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야. 누가 돌화로로 약을 조제하려고 했겠어. 그걸 발견한 사람이 더 이상한 거지.>
"위대한 발견이나 발명은 우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더라. 만약고도 그랬는지 모르지."
전생에 어떻게 해서 만약고가 미우라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모른다.
공식적으로는 일본에서 가지고 온 물건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위대한'이라는 이름이 붙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물건이고 실제로 위대한 일을 해낸 물건이었다.
이제 그 물건이 우리 손에서 더 많은 일들을 해낼 것이다.
어르신을 뒤로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에는 음식냄새가 가득했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올 걸 아셨어요?"
"알았지. 우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너는 기억을 하니 듣고 싶기도 했고."
아버지는 의외로 담담했다.
물론 속까지 평온할 리는 없지만 말이다.
이번 시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께서 어떻게 떨어졌는지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총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성격이라는 것이 한순간에 변하는 것이 아니니까."
<애써 담담한 척 하시는 것 같은데?>
"혹시라도 자책하지 마세요. 독도도 있고 아버지 마나통도 제가 확보했으니까요."
"네가?"
"예."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다니 다행이네. 이거 아들 신세를 지게 돼서···. 미안하다. 대한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비세계에서도 기억의 공백이 존재하는 것 같았거든요."
"기억의 공백?"
도깨비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