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도깨비 마을
"예. 다음 회차로 이동을 하면 이전 회차에서 있었던 일이나 알았던 정보를 모두 기억하면 좋은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았어요. 아마 정신적인 충격을 방지하기 위한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소환이 되면 지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겪게 된다.
죽음도 반복해서 겪게 되고···.
이런 일들을 모두 기억하면서 멀쩡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사람들은 비세계에서 잘 살아갔다.
사람들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원동력은 바로 기억의 공백이었다.
일부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공백은 회차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았다.
"아마 아버지께서는 7회차가 시작됐을 때 제게 들었던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그래. 기억했다면 방아쇠를 당겼겠지. 네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맞아. 자식을 위해서라면 신념은 버릴 수 있는 것이 부모지.>
"그럼 우리도 안심할 수 없겠네?"
큰아버지께서 긴장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큰아버지는 전생에 각성하셨어요. 그러니 지금처럼만 하시면 문제되지는 않을 거예요. 저도 도울 거고요. 문제는 어머니세요."
지금까지는 잘 하고 있지만 전생에 어머니는 각성하지 못했다.
전생에 3월에 마나통을 잃은 아버지께서는 이번 생에서는 7월에 잃으셨다.
어머니는 전생에 5월에 마나통을 잃으셨다.
앞으로 한 회차, 회차마다 고비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비세계에서의 나는 어땠니?"
어머니께서 조금 굳은 표정으로 물으셨다.
"현재로는 무척 잘 적응하고 계셨어요. 이번에도 그룹에서 4위를 하셨을 만큼 잘 하셨죠."
"네가 도와줬다면서."
"제 도움이 없었어도 충분히 합격선에는 들고도 남았어요."
"과연 그랬을까?"
"확실해요. 제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백 명 넘게 제거한 상태였거든요."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도 어머니의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현실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
"물론이죠. 이곳에서 운동을 열심히 하시고 난 후에 세 분 모두 비세계에서 몰라보게 달라졌는걸요."
"그래? 그럼 나는 당분간 운동에 매진해야겠다. 여보. 그래도 되죠?"
"그래야지. 당신이라도 각성을 해야지. 우리 둘 모두 짐이 될 수는 없잖아. 회사일이든 집안일이든 내가 다 할 테니까 당신은 몸 만드는 것만 집중해."
아버지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도 운동 멈추시면 안 돼요. 변한 세상 살아가려면 체력이 받쳐줘야 하거든요. 작은 변이체 정도는 잡을 수 있어야 하고요."
"알았다."
각성을 하셨으면 어떤 면에서는 아버지는 육체 단련을 소홀히 하셨어도 됐을지 모른다.
육체계열로 각성할 확률은 극히 낮아 보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각성하지 못하면 몸을 움직여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큰아버지를 도와 길드와 월평주식회사를 운영하시겠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 몸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더 열심히 운동을 하셔야했다.
"알았다. 일을 하면서도 정말 죽어라 움직이마.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지니 실감이 나. 네가 말한 믿지 못할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야."
마나통을 잃기 전이라고 해서 세 분이 내 말을 의심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마나통을 잃고 나시니 현실이라는 것이 더 느껴지시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이후로도 몇 가지를 더 의논했다.
그 중에는 던전 이식에 관한 것도 포함되었다.
도쿄에서 가지고 온 과수 던전 덩굴은 아직 이식하지 않기로 했다.
현재 대기실에 세 개의 덩굴을 보관 중이어서 이식해야 하지만 내가 소유할 수 있을지 불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미개방 던전은 들어가서 클리어를 하면 소유권이 내게 넘어오면서 내가 관리할 수 있지만 던전 덩굴을 이식하는 것은 소유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서 클리어를 하고 소유권을 가져가버릴 수도 있고, 대변혁까지 던전이 생성되지 않아서 내 소유가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은 각성자가 없어서 이런 생각까지는 과한 것이 사실이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놀라울 정도의 능력을 보이는 사람들이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대기실에 보관할 수 있는 던전 덩굴이 다섯 개여서 심는 것을 언제까지 미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세 분과 이야기를 하고 화순을 떠나 장거리 워프게이트를 품고 있던 던전이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전국을 돌아다니는 일이라 차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앞으로는 보름에 한 번 정도는 던전이나 던전 덩굴이 보이는지 확인을 할 생각이다.
그러려면 더 바빠지겠지만 이 정도의 수고는 몇 번이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던전을 찾아 해맬 때였다.
강원도 횡성의 치악산 자락을 올라가고 있는데 꼬물이가 뜬금없는 반응을 보였다.
이곳은 던전이 있던 곳은 아니었다.
전생에 치악산 던전은 산의 정상부근에 던전이 형성됐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삼분의 일도 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 뭐가 있는 거야?"
꼬물!
<너 또 가락지 찾으려고 하는 거지?>
X
꼬물이가 바닥에 X를 그렸다.
뿌리를 사정없이 가로 저으며 아니라는 몸짓을 병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에서 금반지를 찾아낸 이후 꼬물이는 지금까지 네 개의 금붙이를 더 찾아냈다.
물론 제대로 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심하게 부서진 귀걸이나 팔찌조각 같은 것들이었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금으로 된 제품이라는 것이었다.
<금붙이가 아니야?>
꼬물!
<그럼 뭔데? 다이아몬드?>
ㄷㅈㄷㄱ
"이 근처에 던전 덩굴이 있다고?"
꼬물!
<치악산에는 정상에만 던전이 있었는데?>
던전 덩굴은 죽지 않으니 덩굴이 있다는 말은 이 근처에 던전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전생에 횡성의 치악산에 던전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 던전에는 장프가 자라고 있었고, 당연하게 장거리 워프게이트를 품고 있었다.
대부분 장거리 워프 게이트가 있는 곳은 단거리 이동도 가능하기 때문에 장단거리 워프게이트가 있는 것과 같았다.
우리나라에 있는 장거리 워프 게이트 일곱 개 중 하나여서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던전 덩굴 있어!^
^ㄷㅈㄷㄱ^
"알았어. 안내해 줘."
^ㅇㅇ^
꼬물이가 바닥에 글을 쓰면서 갑자기 앞뒤로 산 모양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양이 꼬물거리는 꼬물이를 꼭 닮아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쫑? 쫑!
꾸루?
음머어?
안하던 표시를 하니 쪼롱이를 비롯한 소환수들도 호기심을 드러냈다.
<고구마의 힘이 크네.>
"그러게. 비슷함에서 오는 동질감 같은 거겠지."
꼬물이가 고구마를 먹는 것을 본 이후로 소환수들은 꼬물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그렇다고 가까이 다가와서 친근하게 어울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보다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았다.
여전히 냄새는 어찌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어? 정말 던전이 있네. 그런데 이렇게 작은 던전도 있나?"
<워낙 작아서 발견할 수 없었나?>
아직 던전이 제대로 형성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완전히 형성이 되고 나면 던전은 누가보든 확연히 던전인 것을 알 수 있다.
던전입구 양쪽으로 덩굴이 휘감긴 기둥이 생겨나기 때문이었다.
물론 예외는 항상 존재하지만 던전입구가 이렇게 좁은 경우는 몇 번 보지 못한 것 같다.
[띠링! 미개방 던전을 발견하셨습니다. 입장하시겠습니까?]
"입장해야지."
전생에 발견되지 않았다면 1회성 던전이었을 수도 있었다.
물론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다.
미개방 던전인 관계로 덩굴손의 검사 없이 던전에 입장할 것이 분명한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입장하겠다고."
[이 던전은 직접 입장하셔야 합니다.]
저 작은 문으로 직접 들어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집사 들어갈 수 있겠어?>
"들어가야지. 어쩌겠어. 욱여넣어봐야겠다."
<내가 먼저 들어가 볼까?>
"네가?"
나에게 5미터를 벗어날 수 없는 나호가 나보다 먼저 던전을 들어간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먼저 들어가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체이니 분명 가능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나호가 먼저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에이! 됐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실체를 갖기 전에 이런 거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ㄴㅎㅋㅋ^
^ㅈㅅㅎ!^
"알았어! 조심할게."
<으하하하! 글씨도 꼬물거려. 하하하!>
나호가 시원스럽게 웃는 동안 나는 던전의 입구를 통과하고 있었다.
입구에 어깨가 꽉 끼어서 정말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이렇게 들어가는데 앞에 뭐라도 나타난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눈앞으로 뭔가가 쓰윽 지나갔다.
속도가 무척 빨랐는데 분명 생명체였다.
그 순간 쪼롱이가 그대로 대기실을 출발했다.
쪼롱이의 뒤로 꾸루와 반반이가 따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얗고 여린 뿌리가 내 볼을 감쌌다.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소환수들이 반응한 것 같았다.
다른 곳 같으면 힘으로 뚫고 금세 들어가겠지만 이곳은 던전의 입구였다.
유난히 길고 좁은 통로형 입구!
빨리 빠져 나가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나가는데 시간이 걸리는 곳이었다.
힘을 최대한 빼고 꼬물이가 꼬물거리듯 안으로 들어섰을 때 이미 소환수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녀석들 빠르네.>
"소인국에 온 것 같아."
비좁은 통로형 입구를 지날 때 분명 뭔가가 지나가서 긴장을 하며 던전에 들어섰는데 들어온 순간 긴장이 풀려버렸다.
분명 던전이라 긴장을 해야 하지만 주위의 풍경이 워낙 아기자기해서 긴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입구에서 기다리니 잠시 후 소환수들이 돌아왔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일행이 있었다.
<집사 저건 뭐야?>
"강아지인가? 쥐는 아닌 것 같은데?"
<쥐는 아니야. 던전에서 저렇게 생긴 쥐는 존재하지 않아.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강아지! 프랑스 사람들이 애지중지하는 강아지 닮았다.>
"토이 푸들?"
꼬물!
가까이 다가온 생명체를 본 꼬물이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열심히 공부하던 뿌리를 대기실 입구에 대고 있었다.
나오라고 허락하면 당장 나와서 다가온 생명체를 만져볼 것 같았다.
뮤! 뮤! 뮤! 뮤!
마치 죄인이 잡혀온 것 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생명체는 매우 억울한 듯한 표정으로 신기한 소리를 냈다.
쪼! 쫑!
고급스럽게 보이는 분홍색 털을 가진 생명체를 위협하는 쪼롱이었다.
툭 치면 데구르 굴러갈 것 같은 생명체가 움찔하더니 혼을 내는 쪼롱이가 아니라 그 옆에 선 반반이의 눈치를 보았다.
뮤! 뮤!
조금 전과 달리 공손해진 몸짓을 취하는 생명체였다.
"어떻게 된 일이야?"
쫑! 쪼로로로로! 쪼쪼로로롱!
쪼롱이가 제법 길게 설명했다.
던전입구를 통과할 때 놀라게 했던 녀석을 잡아왔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더 이상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도깨비^
"뭐라고?"
^도깨비^
쪼롱이의 말을 받아쓰는 것인지 아니면 생명체 말을 받아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의문을 가진 순간 시스템이 의문을 해소시켜주려는 듯 메시지를 전해 왔다.
[띠링! 축하합니다. '던전 도깨비'를 발견하셨습니다. 던전 '도깨비 마을'이 강대한 님의 소유로 넘어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클리어가 됐다고? 뭐가 클리어 조건이었어?"
[이 던전의 클리어 조건은 도깨비 족장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 처음으로 마주한 도깨비가 족장인 관계로 소환수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도깨비?"
던전 도깨비와 도깨비가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생에 도깨비를 소환수로 둔 사람이 생각났다.
초반에 상당한 활약을 하다 사라진 사람으로 소환수인 도깨비에 의해 처리가 됐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있었다.
<집사! 도깨비라면···? 우리 도깨비를 만나게 해주었다는 물건을 찾아다녔었잖아. 발견하지 못했지만···.>
회귀 초반 특성에 소환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인사동을 이 잡듯이 뒤졌었다.
하지만 도깨비와 인연을 맺어줬다는 물건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던전에서 도깨비라고 하는 생명체와 인연이 닿았다.
뮤! 뮤! 뮤!
도깨비라고 하는 생명체는 아주 작은 토이 푸들을 보는 것 같았다.
둥글둥글 미용을 시킨 푸들 강아지를 축소시키면 딱 눈앞의 생명체와 흡사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분홍 도깨비가 앞발을 세우고 몸을 세웠다.
<오!>
몸을 세우자 더 동그랗게 변했다.
모든 발이 털 속으로 감추어졌기 때문이었다.
<도깨비가 아니라 분홍털공 같아.>
굴리면 또르르르 소리가 나는 공 모양의 장난감이 생각나기도 했다.
[지금 도깨비 족장을 소환수로 등록하실 수 있습니다. 5분 이내로 등록하지 못하면 던전 도깨비는 소환수로 등록할 수 없습니다. 소환수 등록 절차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태어났다! 네 친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