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시작과 끝
세상에 쉬운 일은 없는 법이었다.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없는 법이고···.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이런 씨이이바···.>
"애들 들어. 꼬물이 반복 학습이 장기인 거 알지? ㅈㄹ 같은 거 다시 만들지 말자."
<으으으!>
나호가 꼬물이를 슬쩍 쳐다보더니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1회성 던전!
공격력과 방어력 10% 상승!
일회성 던전에만 주어진 특전이지만 어디서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임에는 분명했다.
그런 것을 결코 쉽게 줄 리 만무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망각했다.
그리고 그 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스걱! 스걱! 스걱! 스걱!
끝도 없이 밀려오는 몬스터를 처리하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서 본 생명체가 새였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 던전은 아주 독특했다.
마치 오픈 테스트를 치르는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더니 교재 밖에서 문제가 출제된 것과 같았다.
우리가 입장하고 봤던 것은 이 테스트의 베이스, 즉 일종의 배경화면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 봤던 몬스터는 공략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호처럼 허상이었다.
베고 베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허상!
정말 몬스터는 그 이후 등장했는데 벌새와 비슷한 생명체였다.
벌새를 처음 보면 말벌이라고 착각을 하곤 한다.
어릴 적 화순에서 벌새를 처음 보았을 때 말벌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소리가 말벌소리와 비슷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도 그랬다.
말벌 소리를 내는 벌새를 닮은 몬스터!
그런데 이 이름도 알 수 없는 몬스터는 허상이라고도 그렇다고 실체를 가졌다고도 할 수 없었다.
열 번 정도 공격을 할 때까지는 분명히 허상이다.
이곳에 있는 다른 몬스터들이 그렇듯이···.
그런데 열 번을 넘어서면서 어느 순간 실체를 가졌다.
실체를 가진 순간 공격을 해서 죽여야만 잡을 수 있었다.
그 순간을 놓치면 점점 몸이 희미해지면서 다시 허상이 되어버렸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양한 던전에서 별 이상한 몬스터를 다 만나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으아아악! 으아아! 그래 오랜 만에 푸는 몸이니 이 한 몸 불살라보지 뭐.>
그나마 고무적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는다면 벌새를 닮은 몬스터가 허상일 때 나호의 공격이 통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기 때문에 처음 이 몬스터를 접했을 때 나호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정도였다.
하지만 정도라는 것이 있는 법이었다.
한 마리에게 최소 열 번 이상의 공격을 해야 하는 몬스터가 끝도 없이 밀려오고 있으니 지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시간차를 거의 두지 않고 연속해서 공격해야 하는 것도 이 몬스터를 잡기 어렵게 하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다시 처음부터 공격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몬스터를 잡아둘 수 있기라도 하면 쉬울 텐데 영체 상태일 때는 어떤 방식으로도 잡아둘 수 없었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이 벌새를 닮은 몬스터의 공격은 허상일 때도 타격을 준다는 것이었다.
스걱! 스걱!
이렇게 창을 빠르게 휘두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등에서 땀이 흐르는 것도 잊을 만큼 전투에 집중하고 있었다.
몬스터의 공격이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찌르면 아픔이 상당했다.
스걱! 스걱!
허상을 베어내면 벌새를 닮은 몬스터는 쉽게 반으로 잘렸다.
이렇게 잘라지는 것이 한 번!
금세 붙는 녀석을 다시 베어내면 두 번!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작은 덩치를 가진 녀석이 열 번이었다.
열 번 이상을 베어내고 나면 실체를 갖는 시간은 채 10초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시간 안에 베지 못하면 다시 영체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이었다.
숫자라도 적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 녀석들이 떼로 덤비고 있었다.
<아우우! 정말!>
나호의 발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발톱을 최대한 세워서 몬스터를 가르고 얼굴 가까이로 다가오는 놈은 물어뜯었다.
사냥조들도 최선을 다해 돕고 있었다.
그 와중에 몇 번 찔리면 대기실로 들어가서 치료를 받고 나왔다.
치료를 책임지고 있는 것은 전령조와 도깨비들!
꼬물이는 부지런히 치료수를 받아주고 있었다.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는 전장이었다.
반반이 가족만 대기실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큰 덩치가 이럴 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밟아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부딪히는 것은 이 몬스터들에게는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나와 있으면 괜스레 공격대상이 될 뿐이어서 대기실로 보냈다.
<집사! 이 녀석들 취향이 이상한 것 같아. 왜 이렇게 꼭 여러 번 찢겨야 실체를 드러내는 거야? 이해할 수가 없네. 아야!>
나호도 영체 상태가 아니었다면 반반이처럼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날아다니는 몬스터라 바닥 가까이로는 잘 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무척이나 빨라서 잘도 피했다.
더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녀석들의 침에 쏘이면 나호도 아프다는 것이었다.
처음 찔리고 아픔을 느꼈을 때는 환희를 느꼈다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찔릴 때 마다 온갖 인상을 쓰면서 더 열심히 공격을 했다.
실체가 없는 나호는 치료수로 치료를 할 수도 없었다.
벌침처럼 생긴 뾰족한 부리에 쏘여도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기 때문인지 더 집요하게 나호를 공격하는 몬스터들이었다.
사냥조들이 막아주려 하지만 영체 상태인 몬스터는 오히려 그런 사냥조를 공격했다.
사냥조들이 부리와 발톱으로 공격을 하고 있지만 워낙 빠른 녀석들이라 모두 막아낼 수는 없었다.
스걱! 스걱! 스걱!
"우리 팀은 거의 무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구나. 요즘 조금 풀어지려고 했는데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겠어."
다른 것은 몰라도 전력(戰力)은 어디 내놔도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적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바로 실체가 되게만 하면 어려운 일이 아닌데···.
치료수를 뿌리면 혹시 바로 실체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 비싸다는 치료수도 뿌려보았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런 저런 방법을 다 사용해보았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아야! 와아아! 집사! 정말 이 녀석들 짜증나 죽겠어. 예민한 부위만 골라서 찔러대고 있어!>
사방에서 공격을 하니 완전히 방어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찔린 만큼 방어력을 올려준다는 말이었나?"
하도 어이가 없으니 별 말을 다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해결책이 멀리 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몬물소의 뿔이나 꼬리를 맞으면 바로 실체를 가지려나?"
<엥? 그게 말이 된다고···? 아니지?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야. 전생에 몬물소의 꼬리로 귀신 잡던 거···. 집사! 빨리! 빨리 꺼내봐.>
몬물소의 꼬리를 말하는 순간 나호가 저리 흥분하는 이유가 있었다.
던전에 들어가면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몬스터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친숙하게 생긴 녀석들부터 기기괴괴하게 생긴 녀석들까지.
그런 녀석들 중 귀신같은 녀석들도 있었다.
완전히 귀신인 경우도 있지만 귀신을 많이 닮은 몬스터도 존재했다.
귀신을 처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금 눈앞의 몬스터들처럼···.
그런데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무기가 등장했다.
바로 몬물소의 꼬리로 만든 채찍!
왜 그렇게 되는지 알 수 없지만 몬물소의 꼬리는 귀신들에게는 최고의 무기였다.
몬물소의 꼬리로 만든 채찍은 귀신형 몬스터에게는 망나니의 칼과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 더 위력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몬물소의 꼬리의 가격이 한 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적도 있었다.
귀신형 몬스터에게 워낙 위력적이어서 다른 몬스터에게도 같은 위력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기대심리가 반영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다시 가격은 안정세를 되찾았다.
귀신형 몬스터가 출몰하는 던전이 많았다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겠지만 다행히 그런 던전은 많지 않았다.
어쨌든 몬물소의 꼬리는 위력적이다.
어지간한 장인이 만든 어중간한 무기보다는 백 배 나은 것이 몬물소의 꼬리였다.
이걸 왜 이제야 생각을 한 것인지···.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몬물소의 꼬리를 꺼냈다.
채찍으로 가공을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집사! 휘둘러!>
휘이이잉! 휘이이잉!
꼬리에서 살벌한 소리가 났다.
그만큼 세게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퍼버버버벙! 퍼버버버벙! 퍼버버벙!
이 던전에 들어오고 처음 듣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꼬리에 맞은 몬스터가 바늘에 찔린 풍선이 연달아 터지는 소리를 내며 실체를 갖게 된 것이었다.
스걱! 스걱! 스걱!
실체를 가진 녀석들을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오오오오! 속이 다 시원하네. 실체를 가진 놈들에게도 공격이 통하면 아주 찢어놓을 텐데.>
나호의 공격은 아쉽게도 실체를 갖춘 몬스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쫑! 쫑!
음머어어어!
꼬리에 맞은 몬스터가 바로 실체를 갖자 쪼롱이와 반반이가 자신들이 꼬리를 휘두르겠다고 나섰다.
쪼롱이 옆으로 덩치가 커다란 사냥조들이 시립하듯 서서 꼬리를 청하고 있었다.
저 만한 덩치의 사냥조라면 꼬리를 잡고 흔드는 것쯤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사냥조에게 여섯 개의 꼬리를 건네고, 반반이와 반반이 짝에게도 하나씩 꼬리를 건넸다
반반이와 반반이 짝은 내 양쪽으로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섰고, 사냥조 여섯 마리는 꼬리를 물고 날아올랐다.
다음부터 들려오는 소리는 마치 여름 해변에 와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몬스터가 실체를 가질 때 나는 소리는 풍선이 연달아 터지는 것처럼도 들리지만 해변에서 퐁퐁 쏘아 올리는 폭죽소리 같기도 했던 것이다.
그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며 몬스터들이 실체를 가졌다.
실체를 가진 몬스터들은 조선의 청룡언월도를 닮은 내 긴 창에 썰려나갔다.
쪽쪼쪼로로! 쪼록!
몬물소의 꼬리를 들지 않은 사냥조들은 실체를 가진 몬스터를 공격하는데 동원되었다.
꼬리에 맞은 몬스터들도 10초 정도가 지나면 다시 영체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했다.
사냥조들은 손속에 여지를 두지 않았다.
그동안 찔리면서 당했던 아픔을 그대로 되갚아주고 있었다.
<사냥조들 덩치가 크니까 저 긴 꼬리를 쥐고도 전혀 힘겨워하질 않네.>
꼬리를 발에 쥔 채 전장을 누비는 사냥조들의 모습은 위풍당당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찌 보면 게임을 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닿기만 해도 퍼벙하며 몬스터가 튀어나오니 어릴 적 했던 게임이 연상되는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골머리를 썩게 했던 녀석들이 재미있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쉬운데···. 시스템 아무래도 수상해?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겠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몬스터가 사라지자 관람자가 된 나호가 하는 말이었다.
스걱! 스걱! 스걱!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최소 다섯 마리 이상의 몬스터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도 워낙 수가 많아서 전투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집사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겠지?>
"설마!"
스걱! 스걱!
<아니야. 이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해. 집사가 전리품의 일부를 꼭 남겨두는 것을 아니까 다 팔라고 하지 않은 거야. 다 팔았다고 생각하면···. 으으으! 생각하기도 싫어.>
몬물소의 꼬리가 없었다면 이런 전장에서는 정말 고생이 극심했을 것이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을 거야. 저 몬스터에게 찔려서는 죽기가 더 어려워."
<그만큼 고생했겠지. 이 던전을 소개한 것도 수상하고···.>
나호의 소설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 번 시작된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다.
"시스템이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파리보다 쉽게 죽일 수 있을 거야."
<아니야. 직접 뭔가를 할 수 없을 수도 있다니까. 직접 할 수 없으니 죽으라고 이런 곳에 보냈을 수도 있어.>
나호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스걱! 스걱!
오른 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꼬리를 잡고 몬스터를 처리하다 보니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전투의 끝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모두가 지칠 정도로 정신없고 힘들었던 시간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