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못된 버릇
지금까지 우리는 일본에 적지 않은 선물을 주었다.
일본은 원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 선물들이었다.
하지만 아직 일본에 가장 주고 싶은 선물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으로 돌아와서 꼭 필요한 일들만 정리한 후에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집사! 이번에는 있겠지?>
'있을 거야.'
비행기 안이었기 때문에 심상으로 대답했다.
<하아아암! 피곤하네. 장시간 비행은 늘 피곤한 것 같아. 비행기 탈 때마다 대변혁 이후가 기다려진다니까.>
대변혁 이후 가장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워프 게이트로 원하는 곳에 쉽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워프 게이트만 있다면 런던보다 더 먼 곳도 한 번에 이동할 수 있었다.
'귀한 것은 늘 그만한 대가를 요구했어. 기억하지?'
<기억하고말고. 하아아암!>
'좀 자. 피곤해 보이네.'
<단 10분밖에 가지지 못하는데 이러더라.>
나호는 실체를 갖게 된 후부터 피곤을 느꼈다.
영체 상태로만 있을 때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몸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나호에게는 익숙지 않은 일이어서 처음에는 상당히 당황스러워했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됐지만 여전히 낯설어했다.
'그래도 원하는 실체를 갖게 됐잖아.'
<충분히 만족해. 단지 조금 불편할 뿐이야. 비행기 안이 아니면 잠깐 실체를 가졌다 돌아오면 되는데···.>
'그 점은 정말 부럽더라. 너는 피로회복이나 체력 회복제 같은 것은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나까지 먹어대면 안되지. 집사가 챙겨야 하는 아이들이 한둘이야?>
나호는 신기하게 실체에서 영체, 영체에서 실체로 바뀌면 이전에 느꼈던 피로가 말끔히 사라진다고 했다.
푹 자고 일어난 것보다도 더 개운하다고 하는데 정말 부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 녀석들 뭐하는 거야?>
나호가 대기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기실을 보니 사냥조와 전령조가 군무를 추듯 움직이고 있었다.
꼬물!
^전술훈련한대요.^
꼬물이가 냉큼 대답했다.
사냥조와 전령조가 저러고 있는 것이 신경 쓰인 것은 나호만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집사! 전령조들은 전투와는 담 쌓은 거 아니었어?>
'대부분은 담 쌓았지. 전투에 참여하는 것도 돌 떨어뜨리는 것이 전부고.'
<그런데 저런 훈련이 필요해?>
꼬물!
^처음부터 준비된 병사는 없다고 쪼롱이의 꾸루 설득 했어요.^
'괜찮다고 했는데···.'
<하하하! 어설프기는 하지만 쪼롱이 말대로 연습하다보면 언젠가 훌륭한 병사가 되어있을지도 모르지.>
전투할 때 눈을 가리지 않은 것만도 장족의 발전이었는데 그렇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쪼롱이가 욕심이 났던 모양이었다.
덩치도 작은 녀석이 훈련을 야무지게도 시키고 있었다.
각성을 하면서 지휘(F)가 생기더니 새들을 더 잘 다루는 것 같기도 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심하지 않아서 좋네.'
<집사는 정말 먹지 않아도 배부르겠다.>
'너만 보고 있어도 배불러.'
<그래? 그럼 오늘 내가 집사 밥까지 다 먹어도 되지?>
나호가 장난스럽게 말을 하며 부러운 시선으로 대기실을 보고 있었다.
나호는 자신이 지금 어떤 눈빛으로 대기실을 보는지 알고 있을까?
함께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지 아주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이곳이 비행기 안이 아니었다면 실체를 가진 후 바로 대기실로 들어갔을 것이 분명했다.
전령조는 훈련은 사냥조 못지않게 잘 따라했다.
훈련하는 모습만 보면 전령조도 전사 못지않을 것처럼 보였다.
<훈련의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면 무섭기는 하겠다. 대변혁 이후가 되면 사냥조들은 더 이상 몸을 숨길 수 없잖아. 하지만 전령조들은 여전히 집사가 허락한 사람이 아니면 볼 수 없잖아. 그런 아이들이 전투까지 잘 한다면 게임 끝이지.>
'사람 성격 바뀌지 않듯이 전령조들도 마찬가지야. 훈련의 효과가 나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야.'
1회성 던전에서 보낸 3년과 비세계에서 1년, 각종 던전들에서 보낸 시간들···.
전령조들이 돌이라도 떨어뜨리게 되는데 걸린 시간은 5년 이상이었다.
그것도 돕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돌이라도 떨어뜨리는 것은 초기에 대기실로 불려온 녀석들이었다.
최근에 불려온 전령조들은 여전히 전투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좀 어때. 그리고 뭐든 변하기 마련이야.>
나호는 실체를 가진 후부터 조금 여유로워진 것 같았다.
아주 좋은 변화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우리가 향한 곳은 '햄스테드 헬스'공원에 있는 연못이었다.
<전생에 이곳은 이런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는데···.>
나호가 공원을 둘러보며 하는 말이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짜증을 많이 부렸었는데 이번에는 여유 있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나호였다.
사람이 많이 찾는 공원답게 오늘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공원에서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이제 이곳에서 던전덩굴을 찾기만 하면 우리의 여행 목적은 이루는 것이었다.
벌써 이 덩굴을 찾아 네 번째 오는 것이었다.
매번 던전도, 덩굴도 찾을 수 없었지만 우리는 소환이 끝나면 이곳에 왔다.
이 던전은 꼭 일본에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꼬물!
그때 꼬물이가 반응을 보였다.
<꼬물아! 있는 거야? 시커먼 던전 덩굴이?>
꼬물!
^있어요. 징그러운 덩굴!^
꼬물이가 징그럽다고 하는 덩굴은 주로 좀비나 뼈다귀들이 나오는 던전이었다.
드디어 찾게 되는 모양이었다.
꼬물!
꼬물이가 꼬물거리며 안내를 시작했다
꼬물이가 안내하는 곳은 전생에 좀비 던전이 있었던 곳이었다.
전생에 '지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던전!
정식 이름은 '햄스테드 헬'이었다.
이 공원의 이름에서 비롯된 이름이었지만 지옥이라는 이름과 이곳보다 더 잘 어울리는 던전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 던전은 얻을 것이 없는 것도 문제였다.
보통은 좀비나 뼈다귀들을 사냥해도 얻을 것이 있었다.
그것이 쓰레기에 가까운 것이어서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던전은 정말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냥을 하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사냥 효율도 떨어졌다.
사냥을 하면 마나를 벌 수 있는데 이 던전은 마나를 준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미량의 마나를 지급했다.
그래서 최악의 던전이라는 오명을 늘 달고 살았던 던전이었다.
<흐흐흐! 우리 꼬물이를 보고 늘 최악의 던전이라고 하던 놈들이 이번 생에는 어떻게 말하는지 봐야지. 흐흐!>
나호가 사악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싫지 않았다.
"쓰레기 버섯 던전은 그래도 양반이었지. 인명 피해는 없었잖아. 하지만 이곳은 아니야. 여기는 돈은 물론이고 생명까지 먹는 하마였어."
<영국을 쇄락의 길로 안내한 던전이었지.>
이 던전 하나 때문에 영국이 힘을 잃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른 여러 요인도 많았다.
그런데 이 던전이 상당한 몫을 담당했던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최악의 던전들이 그랬듯 이 던전도 자주 공략을 해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좀비와 뼈다귀들이 도로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재앙이 되었다.
전생에 이곳에 왔을 때를 생각하며 공용연못에 도착하자 꼬물이가 어느 한 곳을 가르켰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덩굴이 땅위로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꼬물이가 어느 한 곳을 가리키자 나호가 망설임 없이 땅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영체 상태이기는 하지만 볼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는 장면이었다.
<오오오! 집사! 맞아. 좀비 덩굴이야. 이 녀석은 아주 제대로야. 새까매. 흐흐흐!>
좀비나 뼈다귀를 쏟아내는 던전에 자라는 덩굴들은 주로 검은색이 많았다.
그 색이 진할수록 안에서 나오는 몬스터의 수와 난이도가 올라갔는데 새까맣다는 것으로 보아 전생의 수준은 되는 모양이었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바로 덩굴이 있는 곳을 큐브 모양으로 떠낸 다음 스텐 용기에 담아 대기실에 보관했다.
그때였다.
시선이 느껴져서 꼬물이를 쳐다보았다.
"꼬물아. 왜? 무슨 일 있어?"
꼬물! 꼬물!
^저걸 망원경이라고 하죠?^
꼬물이의 뿌리가 어느 한 곳을 가르켰다.
멀리 한 사람이 우리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당한 크기의 망원경을 든 채였다.
요즘은 저런 망원경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줌을 당기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었다.
<빈티지 제품인 것 같아. 고물처럼 보이지만 수백, 수천만 원씩 하는 거야.>
나호는 여유롭기만 했다.
그런데 나는 여유로울 수 없었다.
망원경으로 우리 쪽을 보던 사람이 일어나더니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덩굴을 떠내는 것을 봤나봐. 가자."
주변의 흙으로 구멍을 막고는 낙엽까지 덮어서 흔적을 지웠다.
이렇게 한다고 해도 누군가가 파본다면 큐브 모양으로 흙을 떠낸 것을 눈치 채겠지만 이 정도의 흙을 떠내는 것으로 문제될 리는 없었다.
<우리에게 오는 것이 맞은 것 같은데?>
"가자!"
지난번 미국에서 경찰서를 간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후로 특별히 문제된 적은 없었다.
특히 미개방 던전 반경 500미터 안에서는 SSS급 은신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럴 만한 일이 생길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늘 이상하게 이런 일에 민감했다.
최대한 자연스럽지만 느리지 않는 걸음으로 던전 덩굴을 팠던 곳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달려온 사람이 뒤에서 불러세웠다.
"강대한 씨? 맞죠? 강대한 씨!"
부르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정확하게 이름을 부르는데 무시하고 갈 수도 없었다.
"강대한 씨!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습니까?"
<집사! 여자야! 그런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나호도 나와 같은 느낌이 드는 모양이었다.
"누구십니까?"
뒤를 돌아보았다.
"아! 맞군요. 혹시 아니면 어쩌나 했는데. 호호호!"
즐거운 듯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여자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꼬물!
^카메라.^
꼬물!
^망원경이 카메라네.^
꼬물이가 적은 글씨를 본 순간 여자가 들고 있는 망원경을 보았다.
그 동작이 조금 컸는지 여자가 망원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 감각이 남다르다고 하더니 헛소문이 아니었네요. 호호호!"
<아니 여자들은 왜 저렇게 웃어. 이해할 수 없어.>
나호가 질색을 했다.
'모든 여자가 저러지는 않아.'
<그렇기는 해.>
"뭡니까?"
"아이! 까칠하시기는···. 잠깐 이야기 좀 해요. 우리!"
"우리?"
"멀리 타향···에서 만났으니 특별한 인연 아니겠어요? 그렇게 찾아다닐 때는 만날 수 없더니 포기했더니 여기에서 만나게 되네. 호호호! 아이 즐거워. 호호호!"
멀리 타향이라는 가사가 들어가는 노래가 있는지 노래하듯 말을 꺼내더니 미친 듯이 웃어댔다.
<집사! 가자. 미친년인가 봐.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 같아. 이런 사람하고 오래 상대해서 좋을 일이 없어.>
'그냥 갈 수는 없지. 카메라라고 하잖아.'
<아!>
"강대한 씨! 당신, 나에게 딱 걸렸어. 나에게 찍혔다고! 호호호! 아이 즐거워! 호호호!"
여자가 손가락을 비비며 돈을 세는 듯한 동작을 했다.
카메라에 찍힌 영상이 돈이 제법 될 것이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개인 방송합니까?"
"빙고! 내가 일본에 몇 번을 찾아간 줄 알아요? 비행기 값 날린 것을 생각하면···. 뭐 이것으로 다 보충이 되겠지만···. 호호호!"
망원경처럼 보이는 것을 흔들어 보였다.
"지우시죠."
<집사! 살기 조심해.>
순간 짜증이 나서 나도 모르게 살기를 분출한 모양이었다.
여자가 움찔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어머! 무섭게 왜 이러실까? 월평의 왕자님이···. 안 좋은 소문 퍼지면 아무리 큰 기업도 좋지 못하다는 거 몰라요? 제 구독자가 얼마인지 알면 이러지 못할 텐데. 호호호! 호호!"
<저런 웃음을 웃는 것이 완전히 몸에 밴 것 같은데? 저런 걸 좋아할 시대는 지나지 않았나?>
"내가 이번 한 번은 봐줄 테니까 인터뷰 한 번 하죠? 여기에 찍힌 것에 대한 것도 이야기 좀 하고···. 지금 월평리가 난리도 아니라면서요? 그것도 이야기 좀 하고요."
개인 방송 좀 한다는 사람은 다 월평리로 와 있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회사 안으로 들어가는 트럭과 컨테이너를 세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일부 품목에 대해서는 나보다도 더 주문 내용과 수량을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됐습니다. 촬영 허락한 적 없습니다. 제 얼굴이 찍힌 영상이 올라가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무섭게 왜 이러실까? 소리라도 지를까요?"
여자가 망원경을 자신의 가슴에 대고 두 손으로 가렸다.
<허얼! 어이가 없네. 저렇게 하면 가지고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여성을 무기로 삼는 못된 버릇이 있는 여자네.'
<집사 어떻게 할 거야? 저렇게 나오는데?>
찔러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