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행복한 때
<우리 집사가 바보는 아니거든. 전생이 없다고 해도 이런 거래는 하지 않을 거야. 네가 이토록 원하는 걸 보면 귀한 것이 분명한데 너라면 하겠어?>
나호의 말대로였다.
시스템이 원할수록 더 팔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50% 할인된 정보 값이 1만 마나나 하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면 10년이 아니라 그 이상 쓸모가 없다고 해도 가지고 있어야 했다.
부피가 커서 가지고 있는데 부담이 된다면 다시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부피도 크지 않은 물건이었다.
"우리가 요즘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어지간해서는 네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 대신 이달에 황금 10% 더 팔아줄게."
치유버섯과 황금의 생산량 30%를 시스템에게 팔고 있었다.
황금은 상당량 확보가 되었으니 이달만 40%를 팔아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치유버섯까지 10% 더 팔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미안해도 그건 안 돼. 치유버섯은 사실 이달에는 팔고 싶지 않은데 계약이 되어 있어서 파는 거야."
대변혁이 다가오니 할 수만 있다면 많은 치유버섯을 확보하고 싶었다.
[그럼 이달만 황금을 전부 넘겨주시죠. 그럼 저희도 치유버섯을 이달에는 사지 않겠습니다.]
<우와! 이렇게 들으면 엄청 우리를 배려해주는 것처럼 들리네. 30% 포기하고 70%를 확보하는 거면서.>
"뭐 나쁘지 않아. 그렇게 해. 대신 이거 정보를 조금만 주면 좋겠는데···."
[저도 그러고 싶지만 그건 제 권한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시간이 해답을 줄 것입니다.]
"조급해 하지 말라는 말이지?"
시스템은 더 이상의 힌트는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꼬물아! 자!"
꼬물! 꼬물!
꼬물이가 기쁨의 꼬물댄스를 추며 푸른 씨앗이라는 작은 돌멩이를 받았다.
꼬물!
^너무 좋아요. 잘 키울 거야.^
잘 키운다더니 꼭 끌어안고만 있었다.
<저거 황금처럼 먹는 거 아니겠지?>
꼬물!
^ㄴㅎㅂㅂ^
<너! 욕한 거지?>
꼬물! 꼬물! 꼬물!
^아닌데? '나호변비'라고 한 거야. 너 요즘 똥 못 싸잖아.^
꼬물이가 나호의 뼈를 때리고 있었다.
실체를 갖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절대 아니었다.
이상과 현실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우리는 날마다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배변이었다.
하루에 단 10분만 몸을 가질 수 있지만 먹고 싸야했다.
먹는 것이야 큰 문제가 되지 않는데 싸는 것이 문제였다.
충분히 소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영체로 돌아가니 배변이 원활하지 않는 것이었다.
전생에는 단3년만 몸을 가졌지만 이렇게 하루에 몇 분만 몸을 갖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호 자신도 이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단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배변 때문에 고민도 되고 당황스럽기도 한 나호였다.
그런데 꼬물이가 정확하게 그 문제를 말한 것이었다.
나호의 꼬리와 귀가 동시에 축 쳐졌다.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쫑!
^쌀 수 있다! 희망을 잃지 마!^
꼬물이가 통역을 한 것이니 쪼롱이가 정확하게 이렇게 말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쪼롱이는 나호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환수들이 위로할수록 나호의 어깨가 좁아지는 것 같았다.
<뭐든 대가가 필요한 거였어. 집사아아!>
나호가 품으로 파고들었다.
가슴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영체 상태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호의 머리가 내 가슴 앞에 나와 있었다.
축 쳐진 귀가 지금 나호의 감정을 말해 주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으로 파고들어서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마나통이 기분 좋게 흔들렸다.
나호가 가슴으로 들어올 때마다 느껴지는 기분 좋은 반응이었다.
나호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는지 축 쳐졌던 귀가 살살 다시 서기 시작했다.
그때 시스템의 음성이 들렸다.
[클리어 된 던전이기 때문에 잠시 나가셔야 합니다.]
<흥! 자기들 필요할 때는 재촉하지도 않으면서. 우리 골렘 도축도 해야 해!>
투정부리는 아이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나호였다.
[30분 후에 퇴장시켜드리겠습니다.]
"밖에 사람 많으니까 신경 좀 써줘."
[알겠습니다.]
<확실히 해. 심장 떨어지게 하지 말고!>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더니 나호가 딱 그 짝이었다.
소환수들에게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괜스레 시스템에게 불퉁하게 대했다.
언제부터 시스템이 만만한 존재가 된 건지···.
전생의 사람들이 봤다면 기함할 일이었다.
30분 후 시스템의 말처럼 우리는 던전에서 퇴장했다.
언제나 관광객이 많은 박물관이어서 은근히 신경이 쓰였는데 우리를 본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그 여자는 어떻게 됐을까?>
"지옥에서 봤던 여자?"
<어! 어떤 집안 여잔데 그리 당당한지 궁금하기도 하고.>
"큰아버지께 연락하면 금방 알아봐주실 거야."
<그럼 당장 해보자. 궁금하다.>
"뭘 그리 서둘러?"
<이거 내 촉인데. 그 여자 분명 '거머리' 집안일 거야.>
전생에 나라나 국민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개인의 부귀와 영달만을 쫓던 놈들이 있었다.
이런 놈들은 다양하게 불렸는데 그 중 하나가 거머리였다.
한두 번 이득을 취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국민의 고혈을 뽑아먹는 놈들을 특히 거머리라고 불렀는데 가장 악질적인 놈들은 일반인을 상대로 이런 짓을 저지르는 놈들이었다.
"그거 편견일 수 있어."
<편견은 무슨. 아까 그 여자 하는 짓이 딱 거머리 족속이 하던 짓거리였어. 그런데 집사 바로 일본으로 갈 거야?>
"왜?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지난번에 얻어둔 던전 들렸다 가도 좋을 것 같아서. 얼마나 넓어졌는지도 볼 겸.>
영국에는 방금 얻은 천사 던전 이외에 몇 개의 던전을 더 가지고 있었다.
올 때마다 한두 군데의 던전을 얻다 보니 이렇게 많이 소유하게 되었다.
"다 갈 수는 없고 한두 군데는 들렸다 갈 수 있을 것 같아. 어느 던전을 가고 싶어?"
나호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 시스템의 메시지가 먼저 들려왔다.
[띠링! 협조계약에 따라 도움을 요청합니다.]
<또? 왜 일을 이렇게 해서 사람을 고생시켜? 처음부터 사람이 오갈 수 있는 곳에 던전을 심었으면 좋았잖아?>
협조 계약 이후에 쉴 틈이 더 없어졌다.
도울 때마다 마나통을 얻고 있지만 간혹은 지나치다 싶을 때가 있었다.
"섬나라는 늘 불안하더라. 이번에도 물속은 아니지?"
[이번에도 바다입니다.]
육지에 있는 던전은 운동한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대부분 삽질을 하는 것이어서 지루하기는 하지만 특별히 힘들지는 않았다.
간혹 커다란 바위가 나오면 고생은 좀 하지만 그래도 못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물속은 아니었다.
물은 들어가는 것부터 쉽지 않은데 삽질까지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더 힘이 들었다.
챙겨야하는 장비도 많고···.
"지금 겨울이어서 들어가기 쉽지 않은데? 허락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바다라고 해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가 모두 책임져드리겠습니다.]
<네가 그렇게 나올 때가 가장 무서워. 도대체 어딘데?>
[해안으로 가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스템의 부탁을 들어주다보니 아예 스킨스쿠버 장비를 모두 가지고 다녔다.
인벤토리나 대기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스템을 위한 일이기 때문인지 대기실에 보관하는 것을 허락해줘서 대기실에 모든 장비를 보관해두고 그때그때 사용하는 편이다.
"보트를 빌리지 않아도 되는 거야?"
[보트로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수영으로만 가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집사! 이거 너무 불안하다. 하지 마. 장비를 다 갖춘다고 해도 지금 너무 추워. 정말 큰일 나.>
나호가 결사반대를 했다.
[체온이 떨어지지 않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지금 물살도 심하던데?"
[그것까지는 저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안 된다고. 물살이 얼마나 중요한 줄 알아? 물이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라니까. 물에도 길이 있어. 육지에서처럼 어디를 가자고 하면 바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시스템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물속을 들어가면서 가장 많이 느낀 것은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은 마냥 부드럽지만 무서운 존재도 될 수 있었다.
물도 마찬가지였다.
한 없이 부드러운 것이 물이지만 그만큼 거센 것도 물이었다.
특히 물길을 갈아타려고 할 때 이런 것을 많이 느끼게 된다.
밖에서 보면 그냥 흐르는 물 같지만 들어와서 보면 물은 각기 자신이 가진 길이 있었다.
이미 타고 있는 흐름에서 다른 물길로 옮기려고 하면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고 때론 위험하기도 했다.
"해안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어?"
[강대한 님의 평소 수영 실력이라면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이면 될 것입니다.]
"바다 속에서 삽질도 해야 하고?"
[여기는 삽질까지는 아닙니다. 그저 바위 하나만 치우시면 됩니다.]
아무래도 찝찝했다.
바위 하나라고 하는데 자꾸 초거대 바위골렘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바위 크기가 얼마나 하는데?"
[강대한 님의 힘으로 치울 수 있는 크기입니다.]
"생각할 시간을 좀 줘."
[30분 드리겠습니다.]
시스템이 추위까지 느끼지 않게 해주겠다고 하지만 한 겨울에 낯선 바다에 들어가는 것은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아니었다.
<집사! 나 조금 불안해. 돌멩이도 팔지 않았잖아. 아무래도 고생시킬 것 같아.>
"소심한 복수를 할 정도로 시스템의 속이 좁지는 않을 거야."
꼬물!
^좁아! 그것도 많이.^
꼬물이는 의외로 직설적이었다.
우리는 박물관을 나와서 공원으로 이동했다.
공원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할 생각으로 왔는데 의외의 사람이 보였다.
<어? 엘리스다! 이거 인연인가? 미국에서도 보고 여기서도 보고···. 집사! 이번에도 그냥 갈 거야?>
"어! 그냥 갈 거야."
<한 번 만나보면 좋은데···.>
"지금 저길 가라고?"
<뭐 어때? 낭만적이잖아. 그런데 결혼을 했었나? 처음 듣는데···?>
전생에 엘리스가 결혼을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엘리스는 웨딩촬영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보다는 포근하다고 해도 추운 것은 분명한데 얇은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정말 행복해 보였다.
꼬물!
꼬물이가 하트를 만들어서 흔들었다.
물론 꼬마에게 하는 것이었다.
꼬물이와 꼬마 사이에는 조금 전에 내가 줬던 돌멩이가 놓여 있었다.
둘 다 뿌리를 하나씩 올리고 있어서 결혼 서약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꼬물이와 꼬마는 늘 사이가 좋아. 저렇게 살 수만 있다면 결혼도 나쁘지 않은데.>
"너 상처 입은 적 있는 거야?"
<상처 입을 상대가 있기는 하고? 아무도 날 볼 수 없었다니까. 전생에 실체를 얻고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는 것이 가장 신기하더라. 그런데 무슨.>
"그런데 말하는 것이 연애를 수십 번은 해본 것 같아. 상처를 입은 것도 같고."
<그런 거 없어. 그저 이런저런 사례를 너무 많이 봐서 그래. 기대도 없고, 환상도 없고···.>
지금은 이렇게 어우러져 살고 있지만 외롭게 혼자 살아왔던 세월이 녹아있는 것이었다.
"저 사람이 신랑인 것 같은데 왜 결혼하지 않았지?"
<기억에 물어봐. 엘리스라면 분명 정보가 있을 거야.>
권능 기억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스의 가정사에 대한 기억이 있냐고 물었다.
[개인사에 대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대변혁 전에 귀족 가문의 딸이었다는 것은 있습니다만 몇 남 몇 녀 중 몇 번째 딸인지에 대한 기억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예 없어?"
[그렇습니다. 강대한 님께서 가족관계에 대해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엘리스 본인이 숨겼거나 말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변혁 이후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가족관계에 대한 것을 말하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사회가 안정되고 난 후 인터뷰 같은 것을 해도 스스로 밝히지 않으면 가족관계에 관한 것은 묻지 않은 것이 예의였다
아무래도 그래서 기억에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저렇게 행복한 때도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네.>
엘리스는 대변혁에 자신의 집이었던 성이 완전히 부서졌다고 알려져 있다.
아마 그때 가족을 모두 잃었는지도 모른다.
절망의 순간 각성을 해서 그래도 나름 잘 살았는데 양심고백을 하며 나락으로 떨어진 헌터였다.
양심고백을 하며 헌터와 일반인 모두에게 배척을 당한 것이었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사람이 엘리스였다.
"들어가야겠다."
<왜 엘리스를 보다가 그런 결정을 하는 건데?>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엘리스를 보니까 바다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예비신부를 보니 왠지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낯선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