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혹 떼려고
"그래서 그 여자는 여전히 구치소에 있다고요?"
"예. 어젯밤까지 거기에 있었으니 지금도 있을 겁니다. 현행범으로 잡혔으니까요. 미우라 씨가 절대로 용서는 없다고 했습니다."
<박원미라는 여자 이를 갈겠는데?>
'그러겠지. 성질이 보통은 넘는 것 같던데. 가는 곳마다 경찰서에 가네.'
"제가 신경을 써야 하는 겁니까?"
"예?"
"법대로 처리하면 될 것 같은데."
"저기···. 같은 한국인이고···. 악의는 없어 보이고···. 사장님을 개인적으로도 아는 것 같던데···.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영국에서 돌아오셨다고···. 혹시···."
<지금 야마구치가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지 않아?>
'살짝 그런 것도 같네.'
<흐흐흐! 집사! 기분이 어때? 하지도 않는 연애에 사랑싸움까지 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집사가 연애를 할 나이이기는 하지. 한참 좋을 나이야. 암! 그렇고말고! 하하하!>
나호가 웃음을 참지 않았다.
"모르는 여자입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십시오. 스토커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스, 스토커? 혹시 정신이 이상하다거나···. 그제 조금 이상하기는 했습니다. 보통 사람의 범주를 벗어난 것 같았지만 사장님과 지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야무구치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스토커라는 말이 주는 무게 때문인 것 같았다.
<저리 겁이 많아서 대변혁 이후 어떻게 살려고···.>
'그래도 다 살아. 처음부터 겁이 없는 사람은 없어. 적응할 수밖에 없고.'
<그래도 저리 겁이 많으면 적응이 힘들지.>
'야마구치 생각보다 겁 없어. 그래도 장례관련업종에 평생을 종사한 사람이야.'
<그거 편견인데. 오히려 그래서 더 겁이 많은 경우가 더 많은데···.>
나호가 구시렁거리는 사이 야마구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우라 씨가 사장님 처분에 따라 그 여자 처벌 수위를 정하겠다고 했습니다."
<미우라가 집사에게 정말 잘 보이고 싶나보네.>
"미우라가요?"
"예. 테러, 기물파손, 산업스파이, 모독··· 등등 걸 수 있는 것은 많다고 했습니다. 사장님 처분에 따라 추가하거나 뺄 수도 있다고···. 사장님만 괜찮다면 고발을 취하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경찰이 오고도 사무실의 문을 차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고 했다.
고소를 취하를 한다고 해서 바로 경찰서에서 나오기는 쉽지 않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미우라가 나서면 바로 나올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일본은 그런 나라였다.
민주적인 나라라고 하지만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나라가 일본이었다.
특히 지역사회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집사! 어떻게 할 거야?>
'글쎄? 큰아버지께 연락해서 어떤 집안 여자인지부터 알아봐야겠네.'
막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똑!
다시 한 번 노크 소리가 나자 야마구치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미우라 밖에 없었다.
<집사가 온 것은 어떻게 알고 오는 거야? 신기할 노릇이야. 그놈 이 근처에 카메라 설치해둔 거 아니야?>
나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산다는 것이 참 묘한 것이 나는 미우라 놈이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은데 미우라는 나를 좋아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정도는 날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무시하고 괴롭히던 놈이 사업을 제의하면서부터 바라보는 시선이 점차 달라지더니 요즘에는 귀찮을 정도로 쫓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출근하는 날이면 어떻게 알았는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사무실을 방문했다.
자기 나름의 인맥관리라고 하는데 욕밖에 나오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야마구치가 조금은 귀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마구치도 얼굴을 들이밀 놈은 미우라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허락을 하면 냉큼 문을 열고 들어오는 미우라인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 노크 소리가 났다.
똑! 똑!
<오늘은 뭔 지랄이야? 그냥 들어오지.>
나호가 보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야마구치가 귀찮은 내색을 감추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들어오라는데 왜···. 누구···."
야마구치의 투덜거림이 이내 멈추었다.
문 밖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에서 온···."
<집사! 뭐야?>
그런데 묘한 상황이 펼쳐졌다.
인사를 하는 남자의 뒤로 건장한 체격의 두 사람이 접근한 것이었다.
인사를 하던 남자의 눈이 두 사람에게 향하더니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잘 하고 있네.>
건장한 체격의 두 남자는 경호원이었다.
괜찮다고 해도 큰아버지께서 붙여준 사람들이었다.
사무실로 개인방송을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일이 잦아지면서 붙여주신 것이었다.
그제는 갑자기 귀국해서 사무실에 왔기 때문에 경호원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제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 경호원들이 예민한 상태인 것도 같았다.
이유야 어쨌든 경호대상자가 위험할 뻔했기 때문이었다.
"'일미' 주식회사의 회장님이신 '박명식' 회장님의 심부름으로 온 비서 '권오훈'입니다."
남자가 경호원들을 잠시 쳐다보다가 제 신분을 밝혔다.
<일미? 일미주식회사라고? 집사 들어본 적 있어?>
'없어.'
경찰서에 잡혀있는 여자의 집안에서 나온 것 같은데 일미라는 회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현생에서도 그렇지만 전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는 짓이 딱 거머리 집안이었는데 아니었나?>
'그러게. 박명식이라는 이름도 처음 듣는 이름이고.'
우리가 반응이 없자 남자가 살짝 뻘쭘해 하더니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아! 일미라는 회사는 익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창일'이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일미는······."
남자가 주저리주저리 말을 이으며 자신의 회사와 회장의 파워를 은근히 자랑했지만 그 말이 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귀에 꽂힌 단어 '창일'이 너무 거대했기 때문이었다.
<'창일'이라고? 집사! 제대로 들을 거 맞지?>
'맞아. 창일이라네. 허어어!'
악연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박원미라는 여자가 창일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창일 주식회사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박원미라는 여자의 아버지라고 하는 박명식의 이름도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를 비서라는 남자가 말하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그래서요?"
"예? 그래서라니 요?"
"그래서 왜 찾아왔냐는 말입니다. 남의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으면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원미 아가씨! 아니 박원미 씨를 여기서 고발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저희 회장님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어이가 없는 사람들이 많네. 창일이라는 이름만 내세우면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나? 아니! 그것보다 전생에 창일에 박원미나 박명식은 없었는데?>
'대변혁의 날 죽었을 수도 있지.'
<살아있었으면 조용히 살 여자는 아니더라. 죽었다면 모를 수밖에 없지. 창일의 사람을 우리가 몰랐을 리가 없잖아.>
"고발할 만하니 고발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CCTV 한 번 보실래요? 얼마나 진상을 부렸는지? 아! 야마구치! 영상 아직 안 넘겼죠?"
"예! 아직 안 넘겼습니다."
"넘기십시오."
"알겠습니다. 당장 넘기겠습니다."
내 얼굴을 슬쩍 본 야마구치가 대답을 하더니 바로 컴퓨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유난히 소리를 크게 내는 것이 야마구치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눈치 하나는 정말 빠른 사람이야.>
"저기. 사장님 말씀 좀···."
비서 권오훈이 내 앞으로 오더니 허리를 숙여보였다.
<깡패야? 왜 저래?>
정중함 보다는 조직의 냄새를 풍기는 몸짓이었다.
"회장님 걱정이 많으십니다. 고소취······."
"저 사장 아닙니다. 저에게 말씀하셔 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공식적으로 회사는 야마구치 것이었다.
그러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예?"
권오훈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분명 내가 사장으로 보이는데 아니라고 하니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더니 야마구치 앞으로 가서 더 깊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일본인에게 저러고 있는 것은 더 보기 싫네. 이건 도대체 무슨 심리야?>
'전생에 우리가 워낙 일본에 많이 당해서 그래.'
<집사! 창일이라는데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기는? 법대로 하는 거지.'
<법대로?>
'그래. 법대로! 대변혁 전이니 그게 최선이잖아.'
<여기에 잡혀 있다가 죽을 사람이 죽지 않으면? 저런 여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수도 있는데?>
전생에 박원미라는 여자가 대변혁이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혹여 살아있었다고 하더라도 박원미는 전생에 대외활동을 하지 않았다.
'상관없어. 처리하면 그만이야.'
<하긴 우리가 무서워할 것은 없지.>
"저희 아가씨를 구해주시면 저희 창일이 결단코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회장님의 전언이십니다."
<은혜가 아니라 원수겠지? 일본인 명의의 회사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찾아와서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겠지. 어떻게든 밟으려고 했을 거야.>
"오션 28 찌꺼기 사업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인의 찌꺼기 처리를 여기서 담당하실 수 있도록 힘을 써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처리 비용도 두 배 이상 받으실 수 있도록······. 좋은 인연 만들어보시죠?"
<진짜! 어이가 없네. 그게 어떤 건줄 알고 일본으로 넘기겠다는 거야? 하는 짓이 어쩜 이리 전생과 똑같지?>
나호가 열을 냈다.
아무리 지금은 쓸모없는 찌꺼기로 알고 있다고 해도 저런 처리는 이치에 맞지 않았다.
두 배 이상의 비용까지 지불하겠단다.
한국의 화장장은 거의 국가에서 운영하니 그 비용은 오롯이 국민의 세금으로 지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저에게 말씀하셔도 소용없습니다. 화장(花葬)주식회사로 찾아가 보십시오."
야마구치가 말을 하자 권오훈이라는 비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펴며 말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들렀다 오는 길입니다. 거기 담당자께서 여기의 처분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야마구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러더니 슬쩍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만으로도 야마구치는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정색을 했다.
지금까지 예의를 차리던 것과는 사뭇 다른 기색을 내뿜은 것이었다.
야마구치의 표정 변화를 본 비서가 살짝 긴장을 했다.
"창일이라고 했던가요?"
"그렇습니다."
"창일은 사과를 이런 식으로 하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는데···. 문어발식 기업 확장으로 유명한 곳이 창일이죠? 돈이 된다고 하면 무엇에든 손을 뻗는 것으로도 유명하던데 이번에는 오션 28입니까?"
"예? 무슨 말을 그렇게···."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으면 하시죠."
야마구치가 CCTV영상을 재생시켰다.
재생시킨 영상이 참으로 극적이었다.
와장창! 챙그랑! 콰아앙! 쾅! 콰앙!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야이 개새끼야!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알고! 찌꺼기 처리나 하는 새끼가! 이런 거 우리도 당장 할 수 있다고! 야아! 너 들어가는 거 다 봤어! 나와! 나오라고!"
<창문까지 깼었어. 저거 깨기 쉽지 않은 건데?>
마나통을 보관하는 곳이라 어지간해서는 깨지지 않는 유리로 바꿔놨었는데 너무도 쉽게 깨부수는 박원미였다.
<불량 유리를 끼워주고는 비싼 값을 받았나? 입 냄새도 나지 않았었잖아? 그래서 각성예외자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독도를 마셨을 수도 있지. 한국인이니까 당연히 마셨다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우리가 그걸 놓친 거야.'
<야마구치는 왜 유리까지 깬 것은 말하지 않은 거야?>
'한국인이 그걸 짓을 벌였다고 하면 내가 민망스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이래도 저희가 너무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거기 아가씬지 뭔지가 개인 방송하는 모양이던데 저희도 올려볼까요? 박원미 씨 때문에 저희가 받은 피해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날이면 날마다······."
야마구치가 그동안 쌓인 짜증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여기에 내가 근무한다는 것을 올린 이후에 심심치 않게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나야 사무실에 붙어 있지 않으니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야마구치는 아니었다.
스트레스를 혼자 다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인센티브 때문에 늘 기분이 좋아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었다.
"아니···. 그래도···."
"그래도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우리는 법대로 할 겁니다! 여기 죽인다고 소리 지르는 것도 들었죠? 협박도 추가할 겁니다."
<혹 떼려고 왔다가 혹 붙여서 가게네. 후후후!>
벌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