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나쁘지 않지.
"내도 한 자리 끼어도 되제?"
막 컨테이너를 대기실로 넣으려고 하는데 만약고 어르신이 얼굴을 내미셨다.
"물론이죠."
다른 사람이라면 조금 조심스러웠겠지만 만약고 어르신은 믿을 수 있었다.
"마술을 부린다고? 마법이라고도 허든디?"
"뭐든 상관없죠."
"그랴! 뭐라고 부르든 무슨 상관이여. 내는 젊은 사장이라먼 뭐든 믿구만. 믿어!"
만약고 어르신의 미소에는 신뢰가 가득했다.
눈가의 외로움은 여전해서 안쓰러웠지만 말이다.
<집사! 저런 아버지, 할아버지면 좋을 것 같은데 자식들이 참 박정해. 그 사람들 조심해야 해. 만약고 어르신도 조심하라고 하셨잖아.>
'걱정하지 마. 그리고 이제 내가 이곳에 왔으니까 외롭지 않게 해드려야지.'
나이가 있으시지만 만약고 어르신이 참 좋았다.
<자식 겉 낳지 속 낳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해되지 않은 일들이 참 많아. 어떻게 저런 부모를 외롭게 할 수 있지?>
나호는 만약고 어르신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만약고 어르신이 워낙 귀한 것을 주시기도 하셨지만 대할수록 좋은 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고 어르신은 자식복은 없는 것 같았다.
자식들이 하나같이 받을 줄만 알지 베풀 줄은 몰랐다.
만약고 어르신 덕분에 이곳에 취직시켜준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취직시키고 집까지 줘서 이주까지 시켰는데 자기들 잘나서 이곳에 산다고 생각했다.
처음 이주 오고 잠시 어르신께 잘하더니 이내 어르신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웠다.
그래도 아이들이 많고 활기 찬 마을이라 해남에 사실 때보다는 얼굴이 훨씬 밝았지만 말이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아이들과 만약고 어르신이 눈을 빛내고 있어서 조금 과장된 동작을 취했다.
나호가 끼득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꼬물이의 하얀 뿌리 하나가 밖으로 나와서 마술봉처럼 움직였다.
하얀 마술봉과 함께 움직이면 정말 뿅 소리가 나면서 컨테이너가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손을 뻗어 살짝 까딱거렸다.
"우와아아아아! 사라졌다! 사라졌어!"
"와아아! 마법이다! 마법이야!"
아이들은 소리만 지르지 않았다.
사라진 컨테이너가 있던 자리로 달려가더니 그 위에서 방방 뛰기도 하고 바닥을 만져보기도 했다.
반응 하나는 확실했다.
"이런 맛에 마술사를 하나 보네요."
"저 기분 이해하지."
아버지께서 충분히 이해한다는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셨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버지와 달리 만약고 어르신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계셨다.
"내 살아생전에 이런 것을 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혔구만. 별별 소문이 다 돌고 자고나먼 사라지기도 허니께 어느 정도 예측은 혔어. 그란디 이리 직접 보니 놀랍구만. 이거 어떻게 허는 것이여?"
만약고 어르신께서 호기심을 드러내셨다.
"내년이 되면 어르신도 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뭔 일이 있을 것이라고 허더니 참말이여?"
직원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았다.
밖의 사람들보다도 뭔가 준비한다는 것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준비가 얼마나 철저한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전쟁이 나는 것이여? 그래서 식량을 그리 모으는 것이여? 들여오는 대부분이 식량이라고 허던디.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허더만."
만약고 어르신의 얼굴에 여러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본인도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시간과 열정, 돈을 쏟아부어봤기 때문에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형! 또 해봐요. 이거 해봐요. 이거!"
"야! 너 나와! 거기 서 있다가 너까지 사라지면 어쩌려고 그래?"
꼬마 하나가 다른 꼬마를 컨테이너에서 떼어놓으며 말했다.
아이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대기실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면 많은 문제가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손 대고 있어도 괜찮아! 그럼 사라진다!"
아이가 방금 손을 가져다 댄 컨테이너를 대기실로 옮겼다.
아이들이 사라진 컨테이너가 있던 자리로 달려갔다.
아이들은 놀이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손을 댄 컨테이너를 사라지게 하자 서로 자기가 손을 댄 것부터 사라지게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아이들에게는 이런 것까지 놀이가 되는구나. 어른들이라면 머리 아프게 생각했을 텐데 아이들은 현상 자체로 즐거워하네.>
'어쩌면 그래서 어린 아이들이 마법사로 각성한 경우가 많았을 거야.'
<마법사로 각성한 경우는 대부분이 아이나 노인이었지. 신기한 일이었어.>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마법사의 연령은 극단적이었다.
마법사로 각성한 사람은 10대나 20대 초반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는 70대 이상이었다.
이 나이에 마법사로 각성한 사람들이 마법을 잘 사용하기도 하고 응용도 잘했다.
"신기허구만. 이런 것을 내도 내년에는 헐 수 있다는 거제?"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하게는 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혔으면 미쳤다고 했을 것이여. 허지만 젊은 사장이 말을 허먼 믿제. 믿고 말고. 병원에서 다 죽는다고 허는 병도 낫게 해줬는디 뭘 못믿것어?"
"꺄르르르르! 와아아! 재미있다아아!"
"꺄아아아! 와아아! 명훈아! 마법이야!"
"내가 마법이라고 했잖아?"
"나도 조금은 믿었어. 산타클로스가 선물도 주고 갔거든."
"꺄르르! 나도 선물 받았는데. 여기! 이번에는 이거 해주세요. 와아아!"
마법이 없다고 명훈이에게 바보라던 아이들이 지금은 명훈이의 손을 잡고 마법을 즐기고 있었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데···. 아이들은 저렇게 쉽게 하나가 되는데 말이죠."
"쉽게 하나가 되는 만큼 금세 갈라서기도 하지."
아버지께서 미소를 지어보이셨다.
아버지 말씀대로였다.
아이들만 같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정말 아이들 같다면 머리 아플 일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이 놀이를 쉽게 끝낼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어쩌죠?"
"이왕 이리 됐으니 직원과 직원 가족에게는 노출시켜도 좋을 것 같다. 다들 궁금해 하니까."
"더 시끄러워질 것인디? 밖으로 금세 퍼질 것이여. 누군가가 찍어서 팔지도 몰러. 우리 새끼들부터 그럴 것이여. 돈이라먼 환장을 허니께. 썩을!"
만약고 어르신께서 조금 민망한 얼굴을 하셨다.
"그란디 전쟁 같은 것이 나는 것이여? 내는 외계인 같은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혀. 그란디 전쟁이라면 말이 되제. 젊은 사장이 외국에 나가 있었잖여. 뭔가 들은 것이여?"
농담처럼 건네시는 말씀이 아니었다.
이런 말씀에 되지도 않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준비하는 겁니다. 전쟁은 아니지만요."
"전쟁은 아니라는 말이제?"
"예. 전쟁은 아닙니다."
"전쟁만 아니먼 됐어. 선친이 전쟁을 경험하셨제. 6·25말이여. 전쟁보다 험헌 것은 없다는 말씀을 달고 사셨제. 세상이 변허먼 아그들이 불쌍혀서 어쪄."
만약고 어르신의 눈이 아이들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파고드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
'연륜 아닐까? 믿음일 수도 있고.
그동안 내가 올 때마다 컨테이너가 사라졌으니 어느 정도 예상은 하셨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도 쉽게 납득을 하신 것이었다.
"내도 준비를 혀야것구만. 이리 물건을 사들이는 것을 보니 현금보다 현물이 나은 세상이 온다는 거잖어?"
"그렇습니다."
"고마워. 이리 고마울 수가 없구만. 내 병을 낫게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디···. 앞으로 살 길까지 갈챠주고."
"관장님께서 알아내신 거죠."
"젊은 사장은 말을 참 곱게 허는 재주가 있어. 어찌 이리 아들을 잘 낳은 것이여? 우리 새끼들은···. 어휴우!"
어르신께서 아버지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셨다.
부자가 이렇게 나란히 걷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한 없이 부러우신 것 같았다.
"와아아! 저기 강아지다!"
"같이 가아!"
"갸르르르! 논으로 간다아!"
"잡아아!"
"집에 데려다 주자!"
"나도 같이 가아!"
조금 전까지 마법이면 뭐든 될 것처럼 굴던 아이들이었지만 강아지를 보는 순간 강아지에게로 관심이 쏠렸다.
한 아이가 강아지를 쫓아가자 이내 나머지 아이들까지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아이들이 멀어지자 고요가 찾아왔다.
"허허허! 그럼 일 봐. 내도 가볼 테니께."
"함께 계셔도 됩니다."
"아니여. 바쁜디 방해되제. 애들 넘어질까 싶으니께 따라가 봐야제."
어르신이 멀찍이 떨어진 채 아이들 뒤를 따랐다.
저렇게 아이들을 좋아하시는데···.
<박물관이 대변혁 이후에도 유지되면 좋겠다.>
"그렇게 만들어야지."
"한 번 다녀와야 하지?"
"예. 던전에 비우고 와야겠네요."
"그럼 같이 가. 칡도 캘 겸."
이제 다시 칡을 캐야 하는 시기였다.
대변혁 이후 한동안은 캘 시간이 없을 것 같으니 지금 부지런히 캐서 모아두어야 했다.
"아람이는 어디 간 거예요?"
"아우! 말도 마라! 황 관장 요즘 속이 말이 아니다."
산을 향해 걸으며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왜요?"
"그년···. 아니! 황 관장 전처가 아람이를 데리고 갔어."
"예? 양육권까지 포기한 거 아니었어요? 면접교섭권도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아람이가 그렇게 보고 싶다고 해도 오지도 않던 사람이 왜요?"
"그러게 말이다. 형수 같은 사람인 것 같아."
형수 같은 사람!
아버지 보시기에 최악의 사람에게 하는 욕이었다.
"황 관장님은요?"
"찾으러 갔는데 걱정이구나. 문제를 일으킬 사람은 아니지만 막무가내라고 하더구나."
"회사 변호사 붙여주지 그러셨어요?"
"붙여줬어. 면접교섭권인가 뭔가를 핑계 삼아 데리고 가더니 아람이를 내놓지 않고 있어. 황 관장이 바쁘니까 자신이 양육권을 갖겠다고 설친다고 하더라."
"돈이 목적이군요?"
"돈이 아니면 뭐겠니? 막상 데리고 가면 잘 돌볼지 걱정이라고 하더라. 재혼까지 했다는데···."
"그래도 아람이는 엄마를 오랜만에 봐서 좋았겠어요."
"모르지. 애들도 속이 빤할 텐데. 요즘 여섯 살이면 알 거 다 알아."
<집사! 어떻게 할 거야? 전생과 같은 아픔 겪게 할 수는 없잖아?>
"데리고 와야지."
"그렇지 않아도 황 관장에게 말을 했는데 돈을 주고 데리고 올 수는 없다고 하더라. 자식을 돈을 주고 사는 것 같다고."
길드장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 여자 지금 어디에 있어요?"
"고향에 있다고 하는데···. 왜? 가보게?"
"가서라도 데리고 와야죠."
"황 관장도 고집이 보통이 아니어서···. 걱정이 돼서 경호원 한 명과 변호사 대동해서 보냈다. 황 관장이 그동안 쌓인 것이 많잖아. 네가 전생에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데 지켜줘야지."
"잘 하셨어요."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다른 길드원들도 그렇지만 길드장은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 생에는 큰아버지께서 길드장을 하실 테지만 전생에 입은 은혜를 갚아야 했다.
전생처럼 허망하게 보낼 수는 더더욱 없었고···.
"다녀와."
화순 던전 입구에 도착하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던전입구를 보시는 것은 아니지만 늘 이곳에서 내가 사라지니 위치를 기억하시는 것이었다.
"다녀올게요. 아버지."
"바삐 올 것 없어. 천천히 다녀와."
"예."
대답을 하면서 던전에 입장했다.
미개방 던전이니 던전 근처에서 은신을 사용할 수 있지만 화순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화순 던전에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컨테이너였다.
웬만한 컨테이너 부두보다 이곳의 컨테이너가 더 많을 것이다.
우선 이번에 방금 대기실에 넣었던 컨테이너를 종류별로 분류해서 적재했다.
나중에 찾기 쉽도록 앞에 내용물이 크게 적혀있기 때문에 분류를 하는 것도 쉬웠다.
<엄청난 양이다. 이거 한동안은 걱정이 없겠는데?>
"몇 명의 사람이 먹느냐에 따라 다르지."
<국민 전체를 먹여 살릴 것은 아니잖아? 이 근처 사람만 생각하면 상당시간 버틸 수 있을 거야. 집사는 바로 사냥도 할 거잖아.>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쉽게 생각했거든. 이 근처 사람만 감당하면 될 거라고 말이야.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을 책임져야 할지도 모르겠어."
<갑자기 무슨 말이야?>
"개인 방송들. 이렇게 까지 몰릴 줄은 몰랐거든.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여기에 엄청난 양의 식량이 있다는 것을 알 거야. 그럼 대변혁이 일어나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
<아! 엄청난 사람들이 몰릴 수도 있겠구나? 약탈을 하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약탈을 당할 리는 없지. 그런데 더 많은 대비를 해야 하나 싶어."
<지금보다 더 모은다고?>
"할 수 있다면 더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데려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