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데려와야죠.
화순 던전에 컨테이너를 적재하고 나오자 아버지께서 먼 산을 쳐다보고 계셨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잖니. 지금은 입 냄새도 나지 않고 가슴 통증도 없어서 좋은데 다시 시작된다고 생각하면···. 너에게도 미안하고, 네 엄마에게도 미안하고···. 아무 보탬이 되지 못하고 짐만 되면 어쩌나 싶어."
"운동 열심히 하고 계시잖아요. 대변혁 초기에는 몸을 잘 만들어둔 사람이 어지간한 각성자보다 나아요. 그리고 아버지 덕분에 일반인들도 어깨를 펼 수 있을 거예요."
<맞아. 다 각성자만 있으면 일반인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
"과수 던전에는?"
"거기도 다녀올게요. 뭐 드시고 싶은 과일 있으세요?"
"거기서 가지고 오는 것은 뭐든 맛있지."
"그래도 드시고 싶으신 것이 있으실 거 아니에요?"
"사과면 괜찮을 것 같구나."
아버지를 뒤로 하고 화순 던전 바로 옆에 있는 과수 던전에 입장했다.
던전에 입장하자 단 냄새가 확 풍겨왔다.
<냄새 좋다.>
나호가 어깨를 들썩였다.
실체를 가지고 싶은 몸짓이었다.
하루에 10분밖에 실체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실체를 가지고 싶을 때도 참는 것이었다.
<집사! 왜 그것을 거기에 둬? 대기실에 두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데?>
"대기실에도 둘 거야. 어느 곳이 더 나은지 보려고."
소리지옥1 던전에서 얻은 곡물을 그릇에 조금 담고 치료수를 부었다.
이렇게 두고 싹이 나면 과수던전에 심어볼 생각이다.
똑같이 해서 대기실에도 하나를 두었다.
곡물이 담긴 그릇을 황이가 제 옆으로 챙겼다.
<후후! 기특해. 다들 너무 예뻐.>
소환수도 소환수지만 소환식물들이 정말 의외였다.
소환식물을 어디에 쓰나 했는데 각자 자신이 할 일을 찾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어지간한 사람보다 나은 것 같았다.
가장 의외의 식물은 아수라와 아수리였다.
호기심이 많고 신중하다고 하더니 요즘 그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각종 도구를 이용해서 여러 물품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던전 도깨비들과 협업까지 하고 있었다.
<이제 만약고는 꼬마 주지 그래?>
화순 던전에서 만약고를 꺼내서 인벤토리에 넣어둔 상태였다.
아직 마나가 깃들지 않았지만 전생에 약탕기처럼 사용했던 것이니 꼬마를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만약고라는 말에 꼬마의 작은 뿌리가 꿈틀거렸다.
지금 모습을 보면 한 때 많이 아팠다는 것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줘야지. 이곳이 모든 것이 잘 자라잖아. 그래서 여기서 주고 싶어서 인벤토리에 넣어뒀지. 자! 꼬마야!"
꼬마의 작은 뿌리가 밖으로 나오더니 야무지게 만약고를 감쌌다.
하지만 작은 뿌리로는 만약고를 들어 올릴 수 없었다.
다른 줄기 하나가 더 나오더니 만약고를 받치고는 대기실로 가지고 들어갔다.
그러더니 제 앞에 만약고를 놓았다.
<어? 왜 저기다 두지?>
"아직 마나가 깃들지 않아서 그런가봐."
<그러나? 그나저나 조제실도 만들어줘야겠다.>
꼼지락!
조제실이라는 말에 아수라가 반응을 보였다.
제작 스킬을 가진 아수라와 아수리가 조제실을 만들어주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재료를 넣어줘야 해. 목재나 석재를 넉넉하게 넣어줘야겠어. 내일은 건축자재를 파는 곳에 가봐야겠다."
꼬물! 꼬물!
^우왕! 재밌겠다. 아수리, 아수라도 보고 싶대요.^
꼬물이가 만약고에 뿌리 하나를 넣은 채 말했다.
만약고가 신기한지 모든 소환식물들이 뿌리 하나씩을 만약고에 넣고 있었다.
"꼬마는 필요한 거 없어?"
꼬물!
^약재시장 가고 싶대요.^
"그래 내일 약재시장도 가자."
대부분 던전에서 나오는 재료를 가지고 약을 만들지만 현실에서 나는 재료도 사용했다.
그러니 넉넉하게 구매를 해오면 좋을 것 같았다.
<나갔다 들어오는 것도 문제던데.>
마을 인근에 워낙 많은 사람이 몰려있어서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대형 트럭이 많이 다니고 있어서 안전사고가 날까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새벽에 나갔다가 여기 들어올 트럭 신세 좀 지면 돼. 이제 나가자."
과수 던전에서 넉넉하게 사과를 따서 던전을 나왔다.
가장 맛있어 보이는 사과를 아버지께 건넸다.
"여기 사과를 먹고 난 후에는 다른 사과를 못 먹겠어."
사과를 베어 문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평생 과일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몬스터도 나온다고 했잖아?"
"과수 던전은 F급 몬스터만 나와요. 일반인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어서 안전해요."
"그럼 다행이지. 과수 던전이나 책임지고 살까?"
"더 큰 일을 하셔야죠. 여기에 관리해야 할 던전이 얼마나 많은데요."
월평리 2구에 있는 던전만 해도 열 개가 넘었다.
내가 옮겨 심은 것이 그만큼 많았다.
모두 내가 소유한 땅 위에 심을 것이고 현재 건설되고 있는 장벽 안에 위치한 것이었다.
던전을 관리하시는 것만 하셔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 분명했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
"실감이 나지 않을 수밖에 없죠. 보이지 않으니까. 2구에 황금이 나는 던전만 해도 두 곳이나 돼요.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릴 거예요."
월평리 2구가 평평한 곳이어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뒷산도 높지 않고 앞으로 들도 넓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이 내 소유였다.
그 위에 던전이 형성되어 있고 말이다.
사람들은 아무도 던전을 보지 못했다
던전은 고사하고 입구 양쪽에 세워진 기둥도 보지 못하고, 던전 덩굴마저 인지하지 못했다.
대변혁 전까지 시스템이 보호해주는 것 같았다.
간혹 던전 덩굴을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흥미를 느끼지는 않았다.
"도로 확장부터 하겠구나."
"그럴 거예요. 서울 부럽지 않게 바뀔지도 모르죠."
월평리 2구는 서울보다 더 유명한, 그리고 더 많은 기회가 있는 도시가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 마을은 어떻게 되는 거니? 사람이 많이 드나들면 지금 같은 정취는 사라질 텐데. 아이들도 안전하지 않고."
던전은 기회의 땅이기도 하지만 절망의 땅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생에도 던전부근에서는 늘 사건사고가 많았다.
"그렇지 않아도 장벽을 세우려고요."
"또?"
"지금 세우는 것은 외곽 방어이고 앞으로 세울 것은 주거공간을 구분해주는 공사가 될 거예요."
"구분이 되는 것이 좋기는 하지."
월평 주식회사는 회사라기보다는 마을 같았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대변혁 이후에도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던전에 드나드는 헌터들이 마을을 통과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미리 큰아버지께 부탁해서 세울 수도 있었지만 직접 장벽이 위치할 자리를 알려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미뤄왔던 것이다.
미리 자재는 준비를 해두었으니 토목 공사만 끝나면 장벽의 설치는 금방 끝날 것이었다.
"장벽공사까지 하려면 여기가 더 시끄러워지겠구나."
"아무래도 그렇겠죠."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며 회사에 쌓인 컨테이너를 모두 화순 던전으로 옮겼다.
개인방송을 하는 사람들이 봤다면 기함할 일이었다.
컨테이너를 옮긴 후에는 칡을 캤다.
1미터 아래의 칡만을 쓰기 때문에 캘 때 주의가 필요했다.
"이제 내려가자. 밥 먹어야지."
아버지와 마당에 칡을 내려놓고 들어오자 저녁상이 이미 차려져있었다.
"큰아버지는요?"
"곧 오실 거다."
어머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큰 문제를 만들어놓고는 큰아버지와 어머니께만 짐을 떠넘겼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일에서 뭐라고 했어요?"
"뭐라고 해도 상관이야 없지. 대변혁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안 좋은 말을 들으신 것 같은데?>
나호가 그런 말을 했을 때 큰아버지께서 들어오셨다.
"저 때문에 기분 나쁘셨죠?"
"상관없지.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그런데 아무래도 물류로 장난질을 할 것 같아."
"이미 계약이 되어 있잖아요."
"계약이 되어 있어도 창일이야. 창일이 지속적인 계약을 빌미로 장난을 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지."
이런 이유 때문에 두 분의 얼굴이 어두우셨던 모양이었다.
"이달에 들어올 양 중에 10%만 들어왔다고 하셨죠?"
"그렇지. 앞으로 90%는 더 들어와야 해. 앞으로는 더 많은 트럭이 드나들어야 하는데 방해가 있으면 대변혁 전까지 주문한 것을 가지고 오지 못할 수도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정 안 되면 제가 가서 가지고 올게요."
<집사! 잠깐 대기실을 이용할 수는 있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야. 시스템이 허락할 것 같아? 절대로 안 된다고 할 거야. 인벤토리나 공간 주머니로 옮기는 것은 아직은 비효율적이야.>
나호의 말은 단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시스템과 협상을 할 수 있었다.
협조 계약을 맺고 있으니 시스템도 무조건 안 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괜찮겠어? 그럼 지금보다 더 시끄러울 텐데?"
"이제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잖아요."
"그렇기는 하다만···."
"정 꺼려지시면 트럭이 아닌 다른 수단을 이용하는 것도 좋아요. 굳이 이곳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각지의 창고를 빌려서 거기에 넣어두라고 해도 좋고요."
창일이 장난질을 해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방법은 많았다.
특히 우리는 돈을 아낄 필요가 없었다.
"창일보다 더 비싼 값을 불러도 좋고요."
"창일보다 월등하게 비싼 값을 부르면 쉽게 거절하지 못하지. 더구나 바로바로 비용을 지급한다면 더더욱!"
연말이니 다들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럴 때 현금으로 바로 대금을 지급한다고 하면 아무리 창일이 방해를 하려고 해도 방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각자 바쁘게 움직였다.
내가 가장 먼저 간 곳은 황 관장님이 계신 호텔이었다.
황 관장님께서는 딸을 데리고 가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떠날 것 같지 않았다.
병이 나은지 얼마 되지 않은 아람이었다.
마을을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만 봐도 배가 부른다는 분인데 그런 딸을 빼앗길 판이었다.
"아람이를 보러 오지 않은 것 마저 아람이를 위한 것이라고 하고 있어. 그 다음은 임신과 출산으로 보러오지 못했다고 하고. 새로 얻은 아이와 아람이가 함께 자라는 것이 아람이에게도 좋을 거라고···."
이미 법원에 양육권변경 신청을 넣은 상태라고 했다.
신청이 받아들여질리 없지만 엄마라는 것이 강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관장님. 그냥 돈으로 해결하시죠. 비용은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딸을 돈으로 사는 것 같아서 싫습니다."
"돈을 주지 않는다면 요?"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제가 하자는 대로 하시겠습니까?"
"돈을 주지 않고 딸을 데리고 올 수 있다면 데려와야죠."
변호사와 황 관장님의 전처를 만났다.
그리고 15분도 되지 않아 아람이를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아빠아아아!"
아람이가 아빠를 보고 달려와 안겼다.
"아빠! 나 떼어놓고 여행 갔다며?"
"뭐?"
"엄마가 그러던데? 아빠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전화하고 싶었는데 꾹 참았어."
<정말 어이가 없네.>
'아이에게는 그래도 좋은 엄마로 남고 싶었나 보네.'
"아빠아! 나, 아빠 하고 살아도 되지?"
"아빠는 아람이 없으면 못 살아. 다시는 아람이 떼어놓지 않을 거야."
"나도 아빠가 제일 좋아. 엄마는 아기만 예뻐해. 내가 아기 옆에 갔다니 막 혼냈어. 배고프다고 해도 아기만 밥 줬어. 아빠 나 배고파."
"그래. 우리 딸 밥 먹으러 가자."
"밥 올라올 겁니다. 올라오는 길에 말해뒀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아람이는 아빠 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핼쑥해진 아람이었다.
병색이 짙었던 얼굴이 발그레해진 것이 얼마나 됐다고 다시 반쪽이 된 얼굴을 보니 내가 다 속이 상했다.
"아빠 나는 혼자 있는 거 싫어."
"아빠도 그래. 우리 아람이랑 있는 것이 제일 좋아."
"치이! 근데 왜 혼자 여행 갔어? 엄마한테 나 맡기고? 이상한 아저씨 무서웠단 말이야. 나 그 집에 보내지 마. 아빠 여행 가고 싶으면 사장 할머니 집에 맡겨. 아니면 관장 할아버지 집에 맡기든지."
<아이들은 누가 자기를 예뻐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지.>
"그래. 아빠가 미안해. 이제 여행 가는 일 없을 거야. 가도 우리 딸이랑 함께 가야지."
"정말?"
"정말!"
아람이의 눈빛이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처음 여자에게 아람을 넘겨받을 때에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아내느라 애를 먹었다.
아람의 눈빛이 너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얼굴까지 반쪽이 되어 있었느니···.
그러고도 키우겠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때 노크소리가 났다.
당연히 아람이의 식사를 가지고 온 룸서비스라고 생각하고 문을 열었다.
숨이 막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