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 피난을 가는 것이여!
나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나호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기 때문에 누구도 나호를 보지 못한 상태였다.
간혹 내가 허공에 대고 이야기를 해도 혼잣말을 한다고 생각을 할 뿐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강하지 않았으면 뭐라고 한두 마디 했을지 모르겠지만 워낙 강한데다 새와 몬야크를 부리고 있으니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걱정할 거 없어. 사냥조들만 나서도 다 처리될 거야.'
<팀원들은?>
'사냥을 보는 것도 큰 공부야.'
<그렇기는 한데···.>
"여기부터는 정수백, 서종호, 김사랑 씨만 사냥에 참여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충분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십시오. 사냥조들이 호위는 해줄 겁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김기현 이장님께서 아쉬워했다.
똑똑한 분이니 마나가 중요한 것인지 바로 알아챘을 것이다.
<정수백 씨 입 꼬리 올라간다.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야. 그래서 더 믿음이 가는 걸까?>
정수백씨는 묘하게 믿음이 가고 안정감이 드는 사람이었다.
'인상도 복이지.'
대변혁 이후의 세상에서는 인상도 정말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상황에 따라서 너무 순한 인상이 문제가 되기도 하고, 복이 되기도 했다.
천의 얼굴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연기자도 여러 얼굴을 가지기는 어려웠다.
"출발하겠습니다."
세 사람을 데리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다른 열일곱 명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던전 공략은 거의 나의 독무대였다.
낮의 경험이 있어서 세 사람은 방어력을 뚫고 겨우 유효타를 먹일 수 있었지만 한 마리를 잡는데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래서 다리를 하나씩 부러뜨린 몬스터를 흘려주어서 세 사람이 힘을 합쳐서 처리하게끔 했다.
그렇게 세 시간이 지나자 던전 공략이 완료되었다.
보스가 없는 던전이었던 것이다.
[띠링! 축하합니다. 던전이 클리어 됐습니다. 이 던전은 상시 던전입니다. 던전의 입구를 통해 퇴장하시기 바랍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참으로 반가웠다.
시간 비율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행들이 걱정됐었던 것이다.
"상시 던전이라면 이 던전이 늘 이렇게 남는다는 겁니까?"
이장님께서 물으셨다.
"그렇습니다."
"이거 큰일이구만. 저런 놈들은 매일 처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처리해야죠. 하지만 한동안은 문제없을 겁니다. 클리어를 해뒀으니 이곳에서 다시 몬스터가 튀어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래도 들어와서 잡아야 한다고 하던데···."
뒤따라오면서 우리 일행에게 제법 많은 정보를 얻은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이제 마나가 돈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무슨 말인 건지."
전생보다 훨씬 혼란이 적었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나라는 한동안 화폐가 겸해서 사용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그렇게 변하면 보험은 어떻게 되는 것이여?"
던전 밖에 교통사고가 많이 나있으니 묻는 것이었다.
"보험이든 연금이든 기대하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습니다."
"참말이여? 이런 썩을! 안락한 노후를 누려보겠다고 안 먹고 안 입고 이중 삼중으로 노후 준비를 해놨는데···."
이런 분이 김기현 이장님뿐만이 아닐 것이다.
전생에도 이런 문제로 화병이 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변한 세상도 원망스럽고 젊어서 고생한 것도 한스럽다고 하신 분들이 많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것도 실컷 하고 살 것을···."
던전의 입구를 향해 걸으면서 이장님께서 넋두리처럼 말씀하셨다.
"우리 선배들은 제대로 된 노후 준비를 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어. 갑자기 고령화가 시작됐으니까."
지금도 노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이 많기는 했다.
"그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서른이 되기 전부터 노후 준비를 했는데···. 나름 지혜롭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바보짓을 한 것이 됐구만. 어휴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변한 세상은 어르신들에게 특히 가혹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체계와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것은 어르신들에게 조금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정보가 많지 않고 그 정보를 차근하게 설명해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힘드시면 저희 마을로 언제든 오셔도 좋습니다. 마을 분들 모두 함께 이주하셔도 좋죠."
"고마워. 하지만 쉽게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여. 나야 무자식이니 문제가 없는데 다른 집들은 자식을 기다리려고 하지 않겠어? 여기가 고향이기도 하고."
"제가 종종 찾아오겠습니다."
"그럼 고맙지. 우리가 오늘 참말로 좋은 인연을 만났구만. 고마워 대장."
"그렇게 부르지 마시고 정 부르시려면 강 팀장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랴. 강 팀장. 고마워."
우리는 그렇게 하나의 인연을 만들었다.
던전에서 나와 시간을 확인하자 현실과 던전의 시간 비율이 똑같았다.
어떻게 보면 아쉬운 면도 있지만 현실과 던전의 시간 비율이 같으면 좋은 점도 많았다.
<시간 비율이 같은 던전은 회귀 이후 처음이지?>
'그런 것 같아.'
일행이 있는 곳에 돌아오자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자지 않고 기다렸던 겁니까?"
"아닙니다. 번갈아가며 잤습니다. 또 걸어야 하니 잘 쉬어야죠."
"잘 하셨습니다. 밥을 먹고 움직여야할 것 같은데?"
"우리 마을로 가십시다. 우리가 따뜻한 밥 한끼는 대접하겠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요?"
"더 많아도 대접 해야죠. 우리 마을의 화근을 잠재워줬는데."
두세 번 거절을 했는데도 강권을 해서 어쩔 수 없이 김기현 이장님의 마을로 가서 식사하기로 했다.
"거기도 함께 갑시다!"
김기현 이장님께서 우리 일행과 적당히 떨어진 사람들을 불렀다.
우리 일행이 아닌 것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까지 선한 손을 내민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한 사람들이 재빨리 우리 뒤로 따라붙었다.
<껌 딱지가 따로 없네.>
나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마을로 들어선 이장이 밤새 지하실에서 기다린 십여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나왔다.
"걱정이 돼서 죽는 줄 알았어. 절대로 나오지 말라고 해서 나오지 않았지만 조금만 더 늦었으면 나왔을 것이여."
"괴물 때려잡는다고 혔잖어. 다 때려잡았구만. 하하하! 멧돼지 새끼들이 나오더라고."
마을 분들이 신나게 전투 중에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유난히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놓는 분들이 있어서 아침 준비가 즐겁기만 했다.
"이 고기는? 아까 그 고기가 맞는 것 같은데···?"
"맞습니다. 아까 잡았던 땅돼지와 땅멧돼지입니다."
"먹을 수 있는 것이여?"
"한 번 드시면 또 잡으러 들어가실 겁니다."
"입구에서 땅돼지만 잡을 것이여. 땅멧돼지는 아직 안 되제."
"그러십시오. 한두 마리 잡으시면 부리나케 돌아오시고요."
"고맙구만. 강 팀장 아니었으면 돼지들 특성을 몰랐을 것이여."
도축된 땅돼지와 가죽을 넉넉히 한 쪽에 꺼내 놓았다.
"우리가 잡았던 것보다 많은데?"
"이 정도는 드려도 됩니다. 아침 밥값이라고 생각하셔도 좋고요."
"여러 가지로 고맙구만. 우리 마을 사람들끼리 똑같이 나눠···."
이장님께서 나눠가지겠다는 말을 하려고 할 때 마을 사람 한 분이 급하게 이장님을 찾았다.
"이장님! 이장님! 큰일 났습니다. 감나무 집 아주머니가···."
"또 쓰러진 것이여?"
"예. 어서."
"아이고오오. 길이 막혀서 병원도 못갈 것 같은데···. 119에 전화해도 소용도 없을 것이고···."
말을 듣자마자 일어나 이장님께서 간 곳은 회관이었다.
회관에서 밥을 하다 쓰러진 아주머니가 계셨다.
"은실아! 은실아!"
"은실 엄마. 정신 차려. 정신 놓으면···."
자녀의 이름이 은실이인 모양이었다.
"이거 어쩌면 좋습니까? 병원에 가도 의사도 없을 텐데."
"이걸 드시면 좋아지실 겁니다."
꼬물이의 버섯치유수였다.
지금까지 만난 어떤 치유수보다 나은 것이었다.
<저게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알까?>
'사람의 목숨이 더 중요하지. 더구나 우리 밥을 해주시려다 쓰러지신 거잖아.'
<알고 있어. 그저 그렇다는 소리야. 전생에 이런 것이 얼마나···. 알았어. 그만할게.>
나호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
치료수나 치유수는 마나가 있어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서 먹이기만 해도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마나가 없어서 구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이뿐만 아니라 마나를 아끼기 위해 치료수를 두고도 끙끙 앓아야 했던 적도 많았다.
그런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억울한 것은 아니지만 묘한 감정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작은 병이 건네지고 그 안에 든 버섯 치유수를 먹고는 정신을 차리는 아주머니를 보자 그런 감정은 말끔히 사라졌다.
잠시 들었던 감정들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괜찮아?"
"괜찮아요. 어? 병원도 아니데 어떻게···?"
"여기 강 팀장이 준 약을 먹였어. 강 팀장한테 감사하다고 혀."
"고맙습니다. 무슨 약인지 모르겠지만 개운하네요. 늘 머리가 맑지 않았는데."
"좀 쉬어. 음식 준비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어제 놀라서 더 그럴 것이여."
동네 분이 은실 엄마를 회관 안쪽의 방으로 눕혔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우리 때문에···. 죄송하네요."
"아니여. 강 팀장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이지. 은실 엄마 저러는지는 2년도 넘었어. 갑자기 머리가 하얘지면서 정신을 잃는다고 하더라고. 여기 저기 병원에 가 봐도 병명이 나오질 않아."
<아주 예전에 못 먹고 사는 사람들 중에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간질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나호가 이야기했다.
간질이라면 병명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은실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다음부터 저렇더라고. 마음의 병이지 싶어. 쓰러질 때가 아니면 우리가 은실이 이름도 꺼내지 않는다니께."
이장님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대기업에 취직했다고 좋아했는데···. 사내 괴롭힘을 당한 것 같더라고. 이상한 상사를 만나서···. 죽은 사람만 억울하지. 절대로 그런 일 없었다고···. 은실이가 예민하고 사회 부적응자였다고 몰아가서 더 저래. 은실이가 얼마나 야무졌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장님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사회생활이 녹록하지 않지.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 만나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아.>
나호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전생에 길드가 와해되고 나서 어떤 길드에도 들어가지 않았던 것도 저런 이유 때문이었다.
어쩌면 길드가 와해된 후 내 아량이 좁아져버린 건지도 모른다.
마음의 여유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혼자 활동하기 때문에 손해를 볼 때도 많았지만 당시 내겐 여러모로 혼자가 편했다.
"미안혀."
"아닙니다. 언제든 마을 분들과 저희 마을로 이주하셔도 좋습니다. 여기 마을 분들을 위한 자리는 늘 비워두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고맙구만. 고마워. 그람 여기서 자식들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은······."
계속 사양만 할 것 같은 이장님께서 은실 엄마를 살려내는 것을 보더니 마음이 바뀐 모양이었다.
은실 엄마처럼 기다릴 사람이 없는 사람은 데리고 가달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당장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셨다.
마을 주민이 있는 한 자신이 자리를 비울 수는 없다고 했다.
"너무 적은 숫자가 남으면 위험합니다."
"어차피 당장 따라갈 수 있는 주민은 많지 않지. 열댓 명은 남을 것이고. 이야기를 좀 해야 쓰것구만."
이장님께서 분주히 움직이셨다.
음식 준비를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나를 따라 월평으로 이주하라는 설득이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가로젓던 주민들이 이장의 설명과 설득에 하나둘 따라 나서겠다고 했다.
"화순까지 아무리 빨리 가도 이틀은 더 자야할 겁니다. 걸어야 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러니 여기서 넉넉하게 음식을 준비해서······."
마을 주민 일부가 따라나서기로 하자 준비하는 음식의 양이 대폭 증가했다.
회관과 마을 공터는 물론이고 체험학습장의 주방까지 이용해서 음식을 준비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준비하니 아침은 금세 준비되었고 이른 아침을 해결한 후 다시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했다.
함께 이주하기로 한 사람들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건 가지고 가야 할 것 같은데?"
"당장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다음에 가지고 가시죠."
"이사를 가는 것이 아니여! 피난을 가는 것이여! 돈도 필요 없고 갈아입을 옷 몇 가지만 챙겨들."
이장님께서 나서고 나서야 이삿짐을 줄일 수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는 오전 열 시였다.
이제 다시 화순을 향해 출발해야 할 때였다.
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