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일미의 손
"우리 월평은 창일과 더 이상 어떤 관계도 맺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오오오! 이거 의외다. 원리원칙은 철저하게 따지시지만 잔걱정이 많아서 저렇게 말씀하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나호가 아버지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며 말했다.
영체 상태인 것을 십분 활용해서 허공에서 옆으로 반쯤 누워 아버지의 얼굴을 본 것이었다.
꼬물이의 뿌리가 살짝 꼬물거리려다가 멈추었다.
나호를 제지하려다가 만 것이었다.
꼬물!
^아버지는 집사 생각뿐이다!^
꼬물이의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공무원이 체질인 분이었다.
뭐든 정해진 법률과 방식에 맞게 처리하시는 것에 익숙하셨다.
그렇게 처리하시면서도 몇 번이고 잘못된 것은 없는지 확인하셔야 마음이 편한 분이셨다.
어떤 것을 결정하고 판단해야 하는 자리는 원하지도 않았고 편해하시지도 않았다.
그런 아버지의 입에서 창일과 연을 끊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정말 의외였다.
꼬물!
^집사가 어떻게 할지 아니까. 대신하시려는 거야. 욕은 본인이 먹겠다는 거지.^
꼬물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세심한 감정도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뭐! 뭐라고! 내가 직접 찾아왔는데···."
박원일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돌아가시오. 여기는 사유지요."
아버지의 단호한 음성이 주위에 울려 퍼졌다.
장벽 밑에 터를 잡고 있던 사람들이 관심 있게 쳐다보고 있었다.
저들도 찾아온 사람이 만만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괴물이 돌아다니는 이런 시국에 몇 대의 차를 몰고 수십의 경호원을 대동하고 온 사람이 일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이러고도···. 이러고도 월평이 무사할 것이라고···."
"추한 꼴 보이지 말고 가시오."
"이깟 담장 부수고 들어갈 수도 있어! 다 부숴버릴 수도 있다고!"
<저런 놈들은 꼭 저렇게 나오더라. 이해할 수가 없어. 너무 단순해!>
나호가 코웃음을 쳤다.
자신들의 차로 밀고 붙이면 정문을 부수고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건 알아서 하고! 살펴 가시오! 대한아! 가자!"
아버지께서 몸을 돌리셨다.
"여기서 당한 수모는 백 배! 천 배!로 돌려줄 거야! 창일 아니 일미의 힘을 보여주지."
"들었어? 창일이래. 설마 창일 주식회사를 말하는 건가?"
"거기 대표하고 얼굴이 비슷한 것도 같고?"
"에이! 아무리 여기가 소문이 많이 났다고··· 창일이 왔겠어?"
"아니야! 맞는 것 같아. 내가 경제 뉴스는 빠지지 않고 보는데 확실해."
"창일도 쫓아내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여기 이렇게 있어도 희망이 없는 거 아니야?"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어제 세 명 받아줬다고 하더라고. 들려올라갔대."
"그건 나도 들었어. 젊은 여자만 받아줬다고 말이 많던데···."
"무슨! 남자도 하나 포함되어 있었어. 이상한 소리하지 마. 다 지켜보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그래? 말조심해야겠군."
웅성웅성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았다.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있었지만 너무도 명확하게 들리는 소리들이었다.
"회장님! 칠까요?"
"쳐서 뭐하게? 가자고!"
"그래도 저놈들 하는 짓이···."
"치더라도 더 데리고 와야지! 친다면 저기를 우리가 가져야지. 안 그래? 가자고!"
박원일이 짜증을 내면서 차에 오르는 것이 보였다.
'꿈도 야무지네.'
<그러게.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것 같아.>
아버지께서는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계셨다.
<아버지도 점점 자리를 잡아가실 수 있겠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럼 좋지.'
"앞으로 저런 놈들은 네가 상대하지 마라. 받아들일 건지 아닐 건지만 말해. 내쫓는 것은 내가 할 테니."
"받아들이는 것은 제가 하고요?"
"그래야지. 그래야 네가 여기를 통솔하는데 편해."
"여기의 지도자는 세 분이 되셔야죠."
"대한아."
아버지께서 내 눈을 들여다보셨다.
"대한아.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야. 더구나 이런 때는 힘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어. 그런 사람들이 모르겠어? 여기의 실질적인 리더가 누구인지?"
<아버지 말씀대로지. 집사가 아무리 뒤로 빠지려고 해도 사람들은 알게 마련이야.>
뮤! 뮤! 뮤!
^적당히는 힘을 드러내고 조직을 장악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거 은근히 중요하다. 안 그러면 바퀴벌레 생긴다. 지긋지긋한 놈들!^
도뮤가 인상을 찡그린 채 발로 밟아 죽이는 시늉을 했다.
생각만 해도 짜증스러운 모양이었다.
<쟤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야? 나보다 더한 풍지풍파를 경험했나봐.>
'너는 영체 상태였으니 풍지풍파를 겪을 일은 없었잖아?'
<이런 걸 팩폭이라고 하던데. 직접 당해보니 아프네. 근데 집사! 그거 알아? 지켜봐야 하는 것이 더 아플 때도 있어.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보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지.>
"······."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저기 장벽 너머에 있는 사람들도 받아들일 사람은 너무 시간 끌지 말고 받아들이자. 날씨도 추운데.>
'네 마음은 아는데 아직은 아니야.'
빨리 받아들이는 것도 좋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적당히 고생도 해봐야 고마운 것도 아는 법이었다.
"너는 좋은 역할만 해. 물론 항상 그럴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내가 악역은 맡을 테니. 그래야 안정감도 들 거야."
"악역을 맡을 일이 없도록 해야죠."
"그럼 더 좋고. 던전은?"
"좋았어요. 무기도 얻었고요."
"무기?"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며 회관으로 돌아오며 꾸루를 시켜서 박원일에게 전령조 한 마리를 붙였다.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도 전령조를 보지 못하니 한 마리만 붙여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회관으로 거의 왔을 때 꾸루가 조금은 다급한 이야기를 했다.
꾸! 꾸! 꾸!
^구완과 이근택에게 붙였던 전령조에게 연락이 왔어요.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하네요.^
"어디야? 심각하대?"
심상으로 말을 해도 되는데 다급하니 소리를 질렀다.
꾸!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일이냐?"
"잠시만 요."
꾸루가 하는 말이 우리 마을에서 광주로 가는 길의 중간 정도 된다고 했다.
광주를 통해 서울로 향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이근택이 죽는 것은 언제든 환영이지만 구완은 구하고 싶었다.
전생에는 이근택을 죽이려다 죽은 사람인데 이번 생에서는 이근택과 함께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어떻게든 구완을 도우라고 좀 전해줘."
꾸!
꾸루가 대답했지만 전령조들은 전쟁과는 거리가 먼 생물이었다.
우리와 생활한지 제법 된 녀석들이 겨우 돌을 던지는 정도의 공격만 가능했다.
워낙 겁이 많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저 밖에 나갔다 와야겠어요. 2팀에게 연락 좀 해주세요.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요."
"그래. 어서 다녀와."
그대로 마을을 벗어날까 하다가 반반이를 대기실에서 나오게 했다.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는 반반이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훨씬 빠르기 때문이었다.
음머어어!
반반이가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쓰임을 받아야 기분이 좋은 거야. 그치?>
"그래. 가자. 반반아. 꾸루가 말하는 곳으로 가면 돼."
음머어!
반반이가 대답을 하더니 정문 앞에서 다시 한 번 소리를 내질렀다.
정문 입구에 몰린 사람들에게 피하라는 신호였다.
반반이의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잽싸게 도로에서 내려섰다.
한두 번 반반이를 경험한 사람들은 반반이가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려움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도로에서 물러난 사람 중에는 반반이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반반이는 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창일의 차를 만났다.
반반이의 덩치에 비하면 장난감 같은 차였다.
"어? 괴물이다! 쏴! 쏴라!"
탕! 타아앙!
창일의 경호원으로 왔던 놈 중 한 놈이 총을 쏘았다.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자칫 반반이가 총을 맞을 뻔했다.
하지만 총알은 반반이에게 맞지 않았다.
아수라와 황이가 더 빨랐기 때문이었다.
아수라와 황이는 각성을 하면서 방어 스킬을 얻었다.
둘 다 현재는 F급에 불과하지만 인간의 F급보다는 월등한 것 같았다.
창일의 경호원들이 총을 꺼내자 바로 총구를 틀어버린 것이었다.
타앙! 타아! 타앙! 타타타앙!
<어떻게 겁 없이 우리 마을까지 왔나 했더니 나름의 보험이 있었네. 웃기지도 않지만 말이야.>
나호는 웃고 있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총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수는 생각보다 많아진다.
물론 얼마 가지 못해 더 이상 총알을 구하지 못하게 되고 무용지물이 되지만 말이다.
너무 빨랐다.
대변혁이 일어난 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놈들은 벌써 무장을 하고 있었다.
대변혁 이후에 준비를 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거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 아니야?"
<난다 긴다 하는 놈들이니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지. 있는 놈들의 세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니까.>
몇 자루 정도는 이미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너무 많아."
<그러네. 너무 많네. 두 자루씩 가지고 있는 놈도 있어.>
꼬물!
^뺏을까요?^
타아앙! 타앙!
"이, 이게 뭐야! 이게 왜?"
"팀장님! 이거 이상합니다."
갑자기 허공에서 나무줄기나 뿌리가 나타나 총을 잡으니 당황하는 것이었다.
총이 잡히자 쏘지 않는 경호원도 있지만 그런데도 열심히 총을 쏘는 경호원도 있었다.
타아앙!
그런 총알 중 일부는 자신들의 차량에 가서 맞기도 하고 동료를 맞추는 경우도 있었다.
"아아악! 쏘지 마! 쏘지 말라고 새끼들아! 눈깔이 썩었어?"
"으아악!"
<원 샷 투 킬이야? 놀랍네.>
"꼬물아! 다 뺏으라고 해."
꼬물!
꼬물이가 대답하는 순간 던전 덩굴들이 잡고 있던 총을 빼앗아 버렸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뭐야?"
"어? 내 총! 내 초오옹!"
"팀장님! 이거 어떻게 합니까?"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아직 처리하지 못한 거야?"
박원일이 창문을 내리더니 소리를 질렀다.
"회장님 이상한 괴물과 뿌리가 나타나서···."
"결론만 말해!"
"총을 빼앗겼습니다."
"뭐라고?"
박원일이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회장님 내리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총도 모두 빼앗겼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놈들! 도대체 누구에게 빼앗겼다는 거야?"
"저, 저기···."
그제야 반반이를 확인한 박원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워낙 거대한 덩치에 질린 것 같기도 했다.
놈의 눈이 반반이의 다리를 따라 점점 위로 향했다.
어깨 높이가 5미터인 반반이었다.
고개를 젖힌 박원일의 눈에 드디어 내가 잡힌 모양이었다.
놈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너는?"
"차 한 대는 밟고 가야할 것 같은데? 사람은 다 나온 것 같으니 괜찮지?"
"뭐, 뭐야? 네노오오옴!"
박원일이 벼락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몬스터들이 환장을 하고 달려들 텐데. 여기 먹이 있소! 하고 홍보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뭐, 뭐야! 이노오오옴!"
<할 줄 아는 말이 저 말 밖에 없나봐. 이노오오옴!>
나호가 박원일의 흉내를 내었다.
"내가 바쁘지 않으면 상대를 해주고 싶은데 바쁘네. 구해야 할 사람이 있어서!"
"뭐? 뭐야! 우리가 청한 도움은 나 몰라라 하더니 구하러 간다고? 누구를? 얼마나 대단한 사람을 구하러 가기에!"
"새똥은 절대 맞지 않을 사람이지. 어떻게 살았기에 새들이 한두 마리도 아니고 떼로 몰려와서 똥을 싸?"
"뭐? 뭐야! 이놈! 이 노오오옴!"
"뭐? 뭐야! 네 여동생인가 뭔가 하는 여자도 그 소리 참 잘하던데. 그러다 경찰서에 잡혀서 갇히고. 지금쯤 고생이 많겠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가? 돌아다녔으면 몬스터에게 잡혀 먹혔을 테니···."
"네 이노오오옴! 썩 이리 내려 오거라! 이노오옴!"
"빨리 구하러 가라고 당신 아버지에게 전해. 자칫 통조림이 될 수도 있으니. 몬스터 눈에는 통조림 아니겠어?"
"이이이!"
박원일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구하고 싶지도 않았잖아. 안 그래? 그 여자 구해오지 못하면 상속에서 불리하게 한다고 했어? 그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올 리도 없지."
"네, 네놈! 창일보다 무서운 것이 일미다! 일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어. 너는 곱게 죽지 못할 거다. 이놈!"
"그러든지. 살아 돌아가야 고자질도 할 텐데 말이야. 그럼 잘 돌아가 봐. 살려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음머어어어어어어!
반반이가 살기를 담아 길게 울었다.
그 순간!
방어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