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여유
"시스템에게 파는 것이 상상이 안 되지만 유통 구조가 단순화되면 소비자도 좋고, 우리도 좋고, 시스템도 좋겠구나."
"그렇죠. 시스템은 우리에게 제조법 팔면서 마나를 벌었고, 유통을 담당하면서 다시 한 번 마나를 벌게 되었어요."
물론 나도 유통업자에게 독도를 넘길 때보다 훨씬 많은 마나를 벌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저랑 던전에 좀 가셔야겠어요."
"또?"
밤새 던전에 있었는데 또 가자고 하니 조금은 황당하신 것 같았다.
"칡을 캐려고요."
"칡? 칡을 캐러 던전에 간다고? 가만 이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회귀한 것을 말씀드릴 때 한 번 이야기를 했었다.
"화순 던전에서 나는 칡은 독도를 만들 때 최고의 약재예요. 시스템과 유통 계약을 완전히 맺기 전에 칡부터 캐와야겠어요."
[띠링! 계약부터 맺으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시스템이 계약을 종용했다.
하지만 서둘러서 체결할 필요가 없는 계약이었다.
통증이 심해졌다고는 해도 아직은 참을 만하기 때문이었다.
"서두를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그렇기는 합니다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지 않습니까? 체결을 해두시고 움직이시는 것이 어떨 것 같습니까?]
"아니야. 다녀와서 할게. 아직은 급하지 않아."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저런 인사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네.>
우리는 시스템의 인사를 뒤로 하고 화순 던전으로 이동했다.
전생에 내 소유의 산에 있던 던전을 미우라에게 팔고 난 후 이 던전에서 칡을 캐는 일을 종종 했었다.
처음에는 왜 칡을 캐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외부에서 나는 칡보다 맛이 있고 약효도 좋은 칡이지만 위험까지 감수해가면서 던전에서 칡을 캐는 것이 비효율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이 칡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도는 이상하게 한국에서 나는 약재로 만든 것이 약효가 좋았다.
사실 한국 이외에서 나는 약재로 만들면 독도가 만들어지질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미우라 놈이 처음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 계기도 어쩌면 독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연히 조제법을 얻게 되었는데 그 모든 재료가 한국에 있다면 나라도 한국행을 결심했을 것이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여기서도 1미터 아래의 것만 사용하니?"
"아니에요. 너무 작은 것만 아니면 여기에서 나는 것은 다 사용할 수 있어요."
"잘 됐구나. 그동안 1미터 아래 것만 캐느라 힘들었는데···."
큰아버지와 나는 화순 던전 입구에서부터 칡을 캐기 시작했다.
던전칡은 정말 실했다.
어떤 것은 칡이 맞나 싶을 정도로 굵은 것도 있었다.
꼬물!
^이런 건 저희가 할 게요. 이런 일은 저희가 정말 잘해요. 특히 황이, 금이의 특기에요.^
<집사! 생각해보니까. 그렇다. 이걸 사람이 캐고 있을 필요가 없지. 심고 캐는 것에 특화된 아이들이 있는데 말이야.>
"소환식물들이 캔다고 하네요."
"그래? 이런 일도 할 수 있는 거야?"
"그렇다고 하네요, 좀 쉬고 계셔도 될 것 같아요."
"이왕 왔는데 놀고 있을 순 없지. 재료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고."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잠시 후 큰아버지께서는 일손을 멈추고 소환식물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시기만 하셨다.
"시원시원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겠구나."
<정말 시원하게 뽑아내네. 마치 가래떡 뽑아내는 것 같아.>
우리가 칡을 캐면 땅을 파고 들어가야 하는데 소환식물들은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았다.
자신들의 뿌리나 줄기를 땅속으로 넣은 후 밑에서 칡을 밀어 올렸다.
이렇게 밀어 올릴 때 위에서도 함께 잡아당겨서 아주 손쉽게 칡을 채취했다.
땅속에 들어가서 직접 보고 일정 이상의 칡만 캐기 때문에 헛수고를 하는 일도 없었고, 칡에 손상도 거의 없었다.
너무 예쁘게 올라와서 약재로 쓰기 아까울 정도였다.
<이거 몇 사람 몫을 하는 거야?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하면서도 워낙 빠르게 칡을 채취하니 하는 소리였다.
꼬물!
^관리구역 안의 칡은 다 캘까요?^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꼬물!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그럼 관리구역 안의 칡은 다 제거해줘."
꼬물!
^어린 것도요?^
"응! 이곳에 농사를 지을 거거든. 그렇다고 씨까지 제거할 필요는 없어."
꼬물!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꼬물이가 소환식물들을 데리고 칡을 제거해나가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는 굵은 것만 제거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린 칡까지 제거했다.
씨까지 제거하라고 하면 씨까지 제거할 수 있지만 씨는 그대로 두라고 했다.
주기적으로 제거해서 약재로 쓰기 위해서였다.
<집사 어린 칡은 버릴 거야?>
"왜 버려? 관리 구역 밖으로 옮겨 심어야지. 관리 구역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니 가까이 심어도 좋잖아. 자라면 캐서 약재로 사용하면 되고 그 전까지는 울타리도 될 테고 말이야."
<울타리는 싸리나무를 옮겨 심어도 되잖아.>
"그것도 좋고."
싸리나무는 지금 잘 자라고 있었다.
공기 중에 마나량이 늘어나면서 나무들의 성장도 촉진된 상태여서 머지않아 여러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소환식물들 하는 것이 신기하구나. 나무 같지가 않고 동물 같아."
"저도 그렇게 느끼고 있어요. 똑똑하기도 하고 글도 잘 알아요."
<집사 팔불출 같아. 이미 몇 번이고 자랑한 내용이잖아.>
"자랑하고 싶은 걸 어떻게 해. 저렇게 잘 하는데···."
소환식물들은 캔 칡을 크기별로 분류까지 하고 있었다.
정말 똑똑한 아이들이었다.
약재로 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칡은 관리구역 밖으로 옮겨 심었다.
이 일도 당연히 소환식물들이 했다.
옮겨 심는 것이 캐는 것보다 어려울 것 같은데 소환식물들에게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금세 관리구역 밖으로 모두 옮겨 심었다.
사람이 나가서 옮겨 심었다면 몬스터들이 접근을 했겠지만 몬스터들은 소환식물에게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식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움직이고 있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꼬물!
^다 했어요. 엄청 많아요.^
"고마워. 조금 쉬고 있어."
꼬물!
^저희 물놀이 조금만 하면 안 돼요?^
꼬물이가 관리 구역에 흐르는 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화순던전은 물이 풍부한 던전이다.
과수 던전만큼은 아니지만 가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이곳에 물은 바로 먹어도 될 정도로 깨끗하기 때문에 따로 물을 싸오지 않아도 되었다.
꼬물!
^일을 해서 흙이 잔뜩 묻기도 했고···. 붕대도 갈고 싶고···.^
"하하하! 그래. 놀아. 한 시간이면 되지?"
꼬물!
^충분해요.^
허락이 떨어지자 꼬물이가 충분하다는 글을 다 쓰기도 전에 서로 붕대를 풀어주느라고 난리였다.
붕대가 풀릴 곳을 유심히 살폈다.
다친 곳이 잘 아물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었다.
<그래도 많이 나았다. 다행이야.>
"나오면 바로 치료수 바르라고 해야지."
붕대를 푼 소환 식물들이 그대로 물로 돌진했다.
식물이 흙을 핑계로 대고 물놀이를 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아이들 같구나."
순간 큰아버지의 얼굴에 아련함 같은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딸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 물놀이를 한 적이 있었는 것 같았다.
물론 미국의 딸은 기억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우왕! 나도 놀고 싶다!>
나호가 영체 상태로 소환식물들의 물놀이에 합세했다.
그러자 다른 소환수들도 물놀이를 하고 싶어했다.
"너희도 놀아도 돼."
음머어어!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의외로 몬야크들이었다.
몬야크들은 개울로 들어가 앉아서 털 사이로 흐르는 물을 즐기기 시작했다.
"물을 싫어할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니구나."
"몬야크들은 은근히 씻는 것을 좋아해요. 추운 곳에 있을 때는 흙으로 목욕을 즐기지만 물도 좋아하죠."
<물을 많이 먹기도 해요. 저 녀석들 물이 없는 곳에서는 눈도 먹어요.>
나호가 몬야크에 대한 것을 추가로 설명했다.
"털 사이의 기생충 때문인가?"
"그런 것 같아요. 사냥조들이 간혹 몬야크 등에서 뭔가를 쪼아 먹는 것 같더라고요."
<맞아. 그럼 몬야크들 좋아해. 아예 몸을 내주잖아.>
소환수들은 서로 도울 수 있는 일을 도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뮤! 뮤! 뮤!
^물놀이냐? 좋을 때다! 많이 놀아라!^
도뮤가 소환수들이 노는 것을 대기실 입구에 앉아서 구경했다.
걸터앉아서 발을 까닥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고 오랜만에 한가해 보였다.
<집사! 도뮤 입 자세히 봐봐.>
"봤어. 잠시도 쉬지 않네."
언 듯 보면 도뮤의 입은 전혀 움직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오래 도뮤를 보다보면 미세한 차이를 알 수 있는데 도뮤는 지금 금을 제련 중이었다.
남들 보기에 놀고 있는 것 같은 시간에도 도뮤는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것이었다.
꾸!
^무지개에요!^
물에 푹 담갔다가 솟구쳐 오르며 꾸루가 말했다.
꾸루 몸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햇볕이 부리는 마술에 의해 무지개가 되었다.
꾸루가 무지개를 만들기 시작하자 다른 새들도 가세를 해서 한꺼번에 수십 개의 무지개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거 불꽃놀이보다 멋있구나. 한꺼번에 수십 개의 무지개를 봤다고 하면 다들 미쳤다고 하겠지?"
"더 이상한 것도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믿을 거예요."
대변혁 초기에는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을 경험했다고 하면 실없이 허황된 이야기를 꾸며낸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것은 모두 사라졌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상으로 일어나는 세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간혹 변한 세상이 더 나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 특히 이럴 때 말이다."
전생에는 저런 생각을 할 겨를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큰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왜? 무슨 문제 있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지나치기는 하지. 죽어나가는 사람도 많은데 좋다고 했으니···."
"그래서 웃은 거 아니에요. 좋아서 웃었어요. 잘하고 있구나 싶어서요. 전생에는 이런 여유는 생각도 못했거든요."
큰아버지께서 안쓰러움이 가득 담긴 얼굴로 나를 쳐다보셨다.
"전생에는 어땠는지 모르겠다만 이번 생에서는 힘이 되도록 하마."
"전생에는 제가 큰아버지 도움만 받고 살았어요.이제는 제가 힘이 되어드려야죠."
"하하! 그래. 좋지. 정말 좋구나. 하하하!"
유쾌한 시간이 지나고 다시 현실로 복귀해야할 시간이 되었다.
소환수들은 정확하게 한 시간이 되자 대기실로 복귀했다.
던전에서 나와 마을로 돌아오자 점심시간이 되어 있었다.
점심을 먹고 월평 밖의 미개방 던전의 개방을 위해 외출을 하려는데 전령조에게 연락이 왔다.
바로 만화경을 켰다.
만화경의 수많은 화면 중 방금 연락을 해 온 전령조의 화면을 확대시켰다.
<대기업 애들이네. 몬스터 공격을 받고 있네.>
5대 그룹 사람들에게 전령을 붙여놓았다.
지금 그들은 몬스터의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나름 선전하고 있었다.
이백여 명의 사람 중 150명 이상이 경호원이었기 때문에 총이 없어도 충분히 상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 정도면 서울까지 무사히 돌아갈 것 같았다.
"아! 대한아! 빼앗은 무기들은 어쩔 생각이냐?"
"아직 그대로 보관하고 있으려고요."
"총이 무섭기는 하지."
큰아버지께서 목소리를 낮춰 말씀하셨다.
"도와주지 않아도 되고?"
"괜찮을 것 같아요."
"그놈들 군대를 끌고 올지도 모를 놈들이야. 정부에 항의도 엄청나게 할 것이고, 정부도 우리가 도와주지 않았으니 곱지 않을 것이고···. 기업과 정부가 손을 잡고 공격하면 생각보다는 머리가 아플 수도 있어."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누구를 상대하든 어려울 것은 없어요. 맘만 먹으면 정부든 기업이든 다 잡을 수 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지. 그런데 일본은 언제 다녀올 생각이냐? 지진에, 던전 개방에 힘들 거라고 했잖아."
"가보고 싶으신 거죠?"
"나이가 들어도 호기심은 어쩔 수 없나봐. 일본은 여기와 얼마나 다른지 궁금하네."
큰아버지의 눈이 빛났다.
함께 일본에 다녀와도 좋을 것 같았다.
"오늘 밤에 한 번 다녀와요."
"오늘 밤이라고? 그럼 준비해야겠구나."
큰아버지의 입 꼬리가 불안하게 올라갔다.
시스템은 중개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