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각성문?
동료들이 다가오려고 하자 남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데리고 가달라고 하는 말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지나치게 말이 많은 사람은 쓰지 않는데···?"
"그럼 당장 입을 다물겠습니다."
"네가 뭐라고 하든 데리고 가지 않을 거야."
"선생님! 제발···."
남자의 말이 다시 쏟아지려고 했다.
그래서 살짝 손을 들어서 말을 멈추게 했다.
"대신 너를 이곳의 책임자로 써주지."
"예?"
이곳의 책임자로 써준다는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주변을 쓱 둘러보는 남자였다.
지금 남자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빨리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곳의 책임자로 써주신다는 말씀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남자가 엉거주춤 일어서며 물었다.
<태세전환 하는 거 보소!>
나호가 장단을 맞추는 듯한 몸짓을 보이며 말했다.
그만큼 남자의 태도가 바뀐 것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숨을 구걸하던 남자가 지금은 협상자로 마주서려고 했다.
재앙 전에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말 그대로야. 네가 저 사람들을 관리하면서 여기서 살라는 거야."
"저 놈들을 관리하려면 저에게 힘이 필요합니다."
뮤! 뮤! 뮤!
^권력의 속성을 아는 놈이네. 범상치 않아.^
도뮤가 남자를 관찰했다.
악취가 심한 놈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고 다른 뭔가가 있는지 살피려는 것이었다.
뮤! 뮤! 뮤!
^악취가 진동을 하는데 말이야. 그런데 단순해. 아니 욕망이 확실하다는 거지. 이놈은 군림을 좋아할 것 같은데?^
꼬물!
^맞아. 저놈은 남들을 자신의 발아래 두는 것을 좋아해. 상황 판단도 빠르고 그만큼 배신도 잘할 놈이야.^
<집사! 들었어? 배신을 잘한다는데? 저런 놈을 책임자로 세워도 되는 거야?>
나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더 적합한 거야. 여기서는 배신할 수 없어. 나갈 수도 없는데 배신은 무슨. 그리고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잊었어? 여긴 내 소유의 던전이야. 저놈이 날 배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혹시 배신을 한다면 그 날이 저놈의 제삿날이 될 거야.'
"선생님? 제게 힘을···."
"힘? 줄 거야.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야. 지금 당장은 내가 널 책임자로 세우겠다는 말밖에는 해줄 수 없어."
"그럼 저들을 어떻게···?"
"그것도 할 수 없다면 내가 너를 이곳의 책임자로 세울 필요가 없지. 네가 저들을 장악하고 이곳을 관리해. 지금 당장은 내가 너를 이곳의 책임자로 세우겠다는 그 말 하나로도 충분할 거야."
"······."
"자신이 없는 거야? 그럼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수밖에···."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대신 꼭 모두의 앞에서 저를 책임자로 세웠다는 말씀을 해주십시오."
"좋아. 그러지."
"그런데 저희는 여기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굳이 뭘 할 필요는 없어. 너희를 여기에 두는 이유는 알지?"
"알고 있습니다. 격리!"
"그래 정확하게 알고 있네. 너희 같은 놈들은 앞으로 계속 들어오게 될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
남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것이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곳을 어떤 곳으로 만들지는 너희의 선택이야. 그런데 내 마음에 너무 들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할까?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저라면···. 저라면 솔직히 쓸어버리겠습니다. 다른 놈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남자는 그래도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 그러니 자유롭게 살되 내 뜻을 거스르지는 마!"
뮤! 뮤! 뮤!
^와우! 이거 어렵다. 이거 머리 터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꼬물!
^어렵지 않다. 부지런히 착하게 살면 된다.^
뮤! 뮤! 뮤!
^그러니 어려운 거다. 저놈들은 착하게 사는 것이 그 무엇보다 어렵다. 차근히 피땀을 흘려 뭔가를 일궈내는 거? 그거 절대 쉬운 일 아니다.^
꼬물이와 도뮤가 대화중이었다.
"자유롭게 살되 뜻을 거스르지 말라고요?"
"그래. 어렵지 않지? 그리고 여기가 첫 번째 구간이라는 것은 알지?"
"알고 있습니다. 항아리 입구처럼 좁은 곳을 지나면 두 번째 구간으로 들어가게 되죠."
"그래. 거기. 첫 번째 구간에서는 뭘 하든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두 번째 구간으로는 들어가지 마."
"왜?"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고 괜한 호기심 갖지 말고. 거기 S급 몬스터가 있어서 가지 말라고 한 거야. 목숨이 여러 개면 들어가도 상관없어."
"아예! 알겠습니다."
<집사 왜 첫 번째 구간에서는 자유롭게 다녀도 된다고 한 거야? 2킬로미터를 벗어나면 위험하잖아.>
"아! 저기 입구에서 2킬로미터까지는 안전구역이야. 그 안으로는 몬스터는 들어오지 않아. 그러니 되도록 벗어나지 않는 것이 좋겠지."
"저어···. 선생님! 몬스터 들어와 있는데요?"
사실 이게 의외이기는 했다.
새끼 문어들이 당연히 관리구역 안으로 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경계를 넘어 버렸다.
아마 나에 대한 적의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지금은 공격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들어온 거지."
"갑자기 바뀌면···?"
새끼 문어에게 제대로 당했던 남자는 그 이후로 새끼 문어들을 무서워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너희가 이상한 짓만 하지 않으면 공격할 일은 없어."
"저희 하기 나름이라는 말씀이시죠?"
"그래. 너희가 내 뜻을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너희를 공격할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저 애들이 내가 없는 동안에도 너희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테니 괜한 허튼짓은 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관리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잘 관리하면 보상을 줄 수도 있어. 그러니 잘해. 잘 하면 잘 할수록 좋은 일이 많이 생길 테니까."
"알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놈들에게 최소한의 농기구와 씨앗을 제공할까?'
살짝 고민이 되었다.
그동안 살아왔던 것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의 개간을 생각하면 최소한의 농기구와 씨앗을 제공하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뮤! 뮤! 뮤!
^집사! 내 경험에 의하면 말이야. 이번에는 아무것도 주지 말고 그냥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처음부터 뭔가를 주면 고마운 거 모른다. 고생을 하고 난 후 줘야 고마운 거 안다.^
음머어어!
^도뮤 말이 맞을 것 같다. 이번에는 그냥 가고 한 열흘 쯤 후에 와서 호미와 씨앗 몇 개 던져주면 좋을 것 같다.^
<나도 도뮤와 반반이 의견에 찬성!>
'밖의 시간으로 열흘 있다 들어오면 이곳은 백 일이 지나게 돼. 그럼 저들에게는 너무 가혹해. 며칠 내로 입장하기에는 마나가 아깝고···.'
<이곳에 오는데 드는 비용이 너무 비싸기는 해. 한 달에 한 번 무료로 해주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600마나잖아.>
꼬물!
^그래도 그만큼 마나도 많이 들어올 것 같은데···. 여기는 시간이 열 배로 흐르잖아.^
그랬다.
밖에서 하루를 사는 동안 여기는 열흘의 시간이 흐른다.
이곳도 관리 계약을 맺었으니 이놈들이 이곳을 개간하고 발전시킬수록 나에게 마나가 들어올 것이었다.
하루에 열흘 분의 마나가 들어오니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번은 아무것도 주지 않고 나가야겠어. 주더라도 며칠 후에 와서 줘야지.'
<집사! 잘 생각했어.>
"다들 모이라고 해. 이야기하고 나는 갈 테니까 네가 잘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남자가 동료들에게로 달려갔다.
내 앞에서 비굴하게 굴었던 것과 달리 동료에게 가까워질수록 등과 어깨가 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 그 정도가 심했다.
남자의 몸짓에서 지배자의 그것이 언 듯 비췄다.
<묘한 놈이야.>
뮤! 뮤!
^저놈 남의 위에 군림해본 놈이다. 분명하다.^
동료들에게 달려갔던 놈이 제 무리를 데리고 왔다.
가장 앞에 서서 걸어왔는데 등은 당당하지만 얼굴은 겸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전에 말이야. 하인을 많이 둔 집들이 있었어. 종이라고도 했는데···. 알지? 종이라고 해서 다 같은 종이 아니야. 종들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들의 표정이 딱 저랬어. 대감을 앞에 두고 다른 종들을 뒤에 뒀을 때 말이야.>
나호가 말하는 순간 사극에서 봤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런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이 표정이 지금 놈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
"사람들에게 내가 말했던 것을 알려!"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말을 하라고 하는 순간 동료들에게 바로 말을 해도 될 것 같은데 남자는 자신이 해도 되냐고 물었다.
동료들 앞에서 자신이 책임자가 됐음을 확인시켜달라는 것이었다.
"이제 네가 이곳의 책임자이니 말하도록 해."
그냥 말을 해도 되지만 목소리에 마나를 실었다.
남자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이제 이들을 장악하고 관리하는 것은 남자의 몫이었다.
마나가 실린 말은 귀는 물론이고 머릿속에 각인되듯 들렸다.
이들도 분명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남자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뒤를 돌았다.
그리고 조금 전 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차근하게 전했다.
'달변가네.'
남자는 말을 참 잘했다.
핵심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도 그랬지만 그 사이사이에 감정도 잘 실었다.
"아니 그럼!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야?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은 곳에서!"
"이건 너무···."
동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조용! 불만은 받지 않는다. 그러니 입 다물고 있도록!"
"네가 뭔데! 으어억!"
늘 그렇듯 여자 한 명이 불만을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자는 불만을 계속 말할 수 없었다.
남자가 사정없이 주먹질을 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순간 서너 명이 여자가 쓰러진 곳으로 튕겨 나가려고 했다.
늘 그랬듯 함께 불만을 터뜨리며 싸움을 걸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의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의 주먹질이 진심임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몸이 움직이려고 했던 사람들 이외에 네댓 사람도 뭔가 말을 하려다가 참는 모습이 보였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참는 것이 아니라 기가 죽어서 덤비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남자가 내뿜는 기세가 흉흉했다.
<저놈 S급 치료수 마시더니 몸이 더 좋아진 것 같아. 저 여자 일어서지도 못하잖아.>
놈의 기세가 강해진 것이 정말 S급 치료수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남자는 내가 전하라고 했던 말을 정확하게 전달한 후 나를 바라보았다.
칭찬을 바라는 시베리안 허스키 같은 표정을 지은 채였다.
"좋아. 이제부터 이곳은 네 책임이야. 그럼 난 가볼 테니 잘 살아!"
"다녀오십시오."
남자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뭐라도 달라고 요구를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남자의 표정에는 기대감도 살짝 감돌고 있었다.
내가 떠나고 난 후에는 자신의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관리구역을 벗어났다.
모든 새끼 문어가 나를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절반 정도의 새끼 문어는 범죄자들이 있는 곳에 남았다.
놈들이 하는 짓을 살피고 관리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인 것 같았다.
나머지 절반의 새끼 문어는 나를 따라왔다.
관리구역을 벗어나고 난 후에는 천천히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워프 게이트가 치료수가 있는 곳에 있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그래서 반반이가 최고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잘 따라오던 새끼문어들이 몇 시간이 지나자 슬슬 힘겨워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라 무리가 될 만도 했다.
"여기에 앉아. 굳이 날 필요 없잖아."
반반이의 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반반이가 속도를 올리고 난 후부터 등에 앉으라고 말을 했는데도 새끼 문어들은 둥실 떠서 움직였다.
그러다 저렇게 색색거리고 있지만 말이다.
꼬물!
^우왕! 저 모습 귀여워요. 힘겨워하니 특이한 문양이 생겨요.^
새끼 문어들이 숨이 가파할 때부터 몸에 특이한 문양이 생겼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문양이었는데 각기 조금씩 달랐다.
"저게 뭘까? 그냥 문양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 똑같은 것도 하나도 없고. 지문 같은 건가?>
"지문? 지문보다는 각성문 같은데?"
<각성문?>
길이 열리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