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희생
분명 몸을 일으킨 사람은 미우라였다.
그런데 당연히 있어야 할 왼팔이 없는 것 같았다.
바람에 힘없이 옷이 날렸던 것이다.
저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 큰아버지께서는 왼팔을 잃으셨다.
물론 큰아버지는 왼팔이 붙어 있기는 했다.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지만 말이다.
기능을 상실한 팔은 급격하게 살과 근육이 사라졌다.
나중에는 왼팔은 뼈만 앙상했는데 그래서 바람이 불 때면 팔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미우라 놈처럼 말이다.
<집사! 저거 미우라 맞지? 내가 미우라를 잘못 볼 리는 없는데···. 저놈 팔 어디로 간 거야?>
콰당!
"억! 도, 도와주···."
한쪽 팔이 사라지면 균형을 잡기 어렵다.
나중에는 적응을 하지만 처음에는 미우라 놈처럼 저렇게 넘어지기 쉬웠다.
미우라 놈이 왼쪽으로 넘어지는 것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달려가서 부축을 할 뻔했다.
큰아버지 생각이 났던 것이다.
<지긋지긋한 놈! 살아있는 것도 미운데 왜 하필 저런 모습이야? 팔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미우라가 다리가 하나 사라졌다고 하면 지금과 마음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팔이라도 오른팔을 잃었다면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놈이 오른손에 쥐고 있는 것이 검이 아니고 창이었으면···.
순식간에 너무도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만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호도 놈을 보면서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들어가자."
<집사! 조금 있다 들어가는 것이 어때? 집사 표정이···.>
"너도 만만치 않아."
<그러니까. 5분만 있다 들어가자. 그 안에 저놈들이 죽을 것도 아니잖아.>
"그러자."
미우라를 비롯한 열두 명의 신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지만 우리는 동굴을 등지고 서 있었다.
이 던전은 유난히 하늘이 푸르렀다.
눈이 부시도록 푸르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던전이었다.
액체 젤리 같은 몬스터가 하늘에 떠 있을 때는 구름 한 점이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구름이 하나씩 보였다.
바람이 구름을 몰아가면서 모양이 바뀌는 것을 보고 있었다.
<집사도 어릴 때 구름 보면서 놀았어?>
"구름 볼 틈이 없었지. 한국의 학생들은 그럴 시간이 없어. 특히 도심에 살아서 더 그랬고. 아! 화순 할아버지 댁에 오면 마루에 누워서 하늘을 보기는 했다."
<할아버지 엄하지 않으셨어?>
"아버지와 큰아버지께는 엄하셨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았지. 얼마나 예뻐하셨다고. 장손이라고···. 나에게 남겨주신 땅 봤잖아? 내가 세 살 때부터 조금씩 사주신 거야."
<대단하네.>
"시골 땅이어서 가능했지."
<앞으로는 금싸라기 땅이 될 거야.>
"그런 거에는 크게 관심 없어."
땅값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월평을 세울 때는 잠시 관심을 가졌지만 지금은 의미가 없었다.
보유하고 있는 던전으로 충분했다.
"이제 들어가 보자. 보기 싫어도 봐야지."
동굴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손을 내밀며 물을 청했다.
하지만 무작정 물을 줬다가는 자칫 죽일 수도 있었다.
'꼬마야. 물을 줘도 되는지 봐줘.'
심상으로 꼬마에게 말을 했다.
꼬마는 의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의사 못지않게 진찰을 잘했다.
뿌리로 접촉을 하면 더 정밀하게 진찰이 가능하지만 뿌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간략하게만 살펴보라고 한 것이었다.
꼬물!
^헝겊에 물을 묻혀서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대요.^
재빨리 헝겊에 물을 적혀서 물을 찾는 사람들 입술 위에 올려주었다.
그 사이 나호는 천기재가 있는지 살폈다.
<집사! 여기 천기재야.>
천기재는 가장 구석진 자리에 누워있었다.
몸이 상당히 좋지 않아 보였다.
꼬물!
^잘 먹고 잘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네요.^
눈치 빠른 꼬마가 진찰을 한 모양이었다.
"고, 고맙습니다."
헝겊을 입에 물려주자 천기재가 말했다.
지금 천기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이어서 그런지 한국어로 말하는 천기재였다.
천기재에게 치료수를 먹였다.
물론 꼬마의 허락을 받은 후였다.
치료수를 마시고도 천기재는 바로 눈을 뜨지 못했다.
상당히 오래 먹지 못한 것 같았다.
치료수를 마신 천기재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S급 치료수를 먹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시스템에게서 F급 치료수를 사서 한 병씩 먹였다.
사실 F급 치료수를 사는 마나도 아까웠지만 미션을 위해서는 이 정도는 투자할 수 있었다.
F급 치료수를 먹고 정신을 차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죽지 않을 것이었다.
이들을 꺼내 몬야크의 등에 태웠다.
퇴장까지 시켜야하기 때문이었다.
<말을 조금씩 하던 놈도 있었는데 왜 치료수를 먹고 다 정신을 잃어?>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고 잠이 든 거야. 천기재처럼."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데? 천기재와 다르잖아.>
"S급과 F급 차이지."
<아!>
열세 명을 몬야크의 등에 태우고 나자 도뮤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러더니 어서 동굴 속으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뮤! 뮤! 뮤!
^가보면 후회하지 않는다. 정말이다.^
도뮤가 내 옷을 잡아끌었다.
못이기는 척 따라가 주었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 재미있나 본데?>
나호와 나는 만감이 교차하는데 도뮤와 꼬물이는 신이 난 상태였다.
그렇게 도뮤의 이끌림에 따라 들어갔더니 동굴 속 상당히 깊은 곳에 샘이 하나 있었다.
"미우라 일행은 왜 이곳을 발견하지 못했지?"
<어두워서 발견하지 못한 거 아닐까?>
"목이 마르면 물 냄새를 맡았을 텐데?"
<자기들 오물 냄새에 물 냄새를 맡지 못했을 수도 있어.>
"냄새는 맡지 못했어도 저 소리는 들었을 것 같은데? 감각 능력치를 개방한 사람이 없었나?"
미우라는 감각 능력치를 개방한 것이 분명했다.
그랬다면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을 것 같은데···.
뮤! 뮤! 뮤!
^여기는 우리랑 함께 왔기 때문에 올 수 있는 거다.^
"도깨비와 함께 왔기 때문에 올 수 있었다고?"
꼬물!
^정확하게는 이 샘을 모르면 올 수 없다는 거예요. 존재를 알지 못하면 인지할 수 없도록 되어 있어요.^
<저 말이 무슨 말이야? 집사는 이해해?>
나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알 듯 모를 듯 하네. 너희는 처음에 어떻게 알았는데?"
뮤! 뮤! 뮤!
^우리는 던전 도깨비다! 던전 도깨비의 눈과 귀를 속일 수 있는 것은 없다.^
"히든 탐색에는 잡혔을라나?"
이미 발견한 것이라 히든 탐색을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는데 히든 탐색이 발동되었다.
히든 탐색이 발동되면서 샘 옆으로 푸른빛이 빛났다.
그곳에 뭔가 있다는 말이었다.
"도뮤 너도 저것이 보이는 거야?"
뮤! 뮤! 뮤!
^이 샘은 나도 잘 보인다.^
"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말이야."
푸른빛이 빛나는 곳을 짚자 괴이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튀어 올라왔다.
그런데 그것이 샘 속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꼬물!
^뭐에요?^
"잘 모르겠어. 이 샘물 만져도 되는 거지?"
뮤! 뮤! 뮤!
^이 샘물 좋은 거다. 마음껏 만져라.^
도뮤가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하더니 샘 옆에 차근히 앉았다.
그러더니 제 앞발로 물을 떠서는 내게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도뮤의 앞발이 두 개인 것처럼 보였다.
"어?"
<와우! 저거 뭐야? 이 물 정말 신기하다.>
나호가 그 말을 하면서 도뮤의 앞발 하나를 건드렸다.
그러자 사라져버렸다.
물을 보면서 감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허상을 만드는 물입니다. 이 물에 닿은 것은 무엇이든 일정시간 허상을 만들어 냅니다.]
<집사! 신기하다. 그래서 이 던전에 그런 몬스터가 있었던 건가?>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아까 물속으로 들어간 것은 뭐지?"
깊지 않은 샘이기 때문에 손을 넣어서 조금 전 물속으로 들어간 것을 꺼냈다.
뮤! 뮤! 뮤!
^어? 그거 우리가 제거한 핵 같다. 우리 그거 잔뜩 가지고 있다.^
도뮤가 입에서 핵을 하나 꺼냈다.
새끼 손톱만한 것이었다.
도뮤가 꺼낸 것은 연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는데 샘 물속에서 꺼낸 것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색깔이 다르잖아.>
뮤! 뮤! 뮤!
^아! 이런 색깔도 있었다.^
도뮤가 붉은색 핵도 꺼내 보였다.
"한 몬스터인데 같은 색 핵이 아니었던 거야?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 시스템의 장난이었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이 던전의 몬스터는 원래 한 마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같은 몬스터에게서 다른 색의 핵이 발견된 것은 전생에 단 한 번도 없었다.
으드득!
"이건 분명 따져야 해.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맞아. 그냥 넘어가면 안 돼. 그런데 샘물에서 나온 것은 정말 크다. 무언가의 알은 아니겠지?>
"알은 무슨? 그리고 이걸 크다고 할 수는 없어. 저것과 비교하니 크게 보이는 것뿐이야."
물속에서 꺼낸 것은 잘 익은 앵두 같았다.
<알이면 좋겠다. 여기서 작은 새가 태어나면 좋겠어.>
나호는 예전부터 알 타령을 잘했다.
주위에 소환수가 이렇게 많은데도 또 다른 소환수를 가지고 싶은 모양이었다.
"감정해보면 확실하게 알겠지."
['붉은 핵'입니다. 이걸 삼킨 상태에서 저 물속에 들어가면 아바타를 만들 수 있습니다.]
감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이 이상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시스템에게 정보를 사든지 아니면 직접 실험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아바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니까 확실하게 알은 아니야."
<알이었으면 했는데···. 알에서 뭔가가 나오고 그 아이를 키우는 것 너무 해보고 싶은데···.>
"마을에 달걀 많아. 그것도 유정란! 그거 품어봐. 그나저나 이 물을 가져가야 할 것 같은데?"
꼬물!
^치료수 물통에 담아가면 되잖아요. 물이니까. 혹시 저것도 등급이 오를 수도 있고! 그럼 훨씬 좋은 아바타를 만들 수 있을지 몰라요.^
"아바타라?"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나오니 당황스러웠다.
당장은 아바타는 어디에 써야 하는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시간을 끌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 담자."
치료수 물통의 호스를 꺼내서 샘물을 담았다.
이 물의 이름은 뭐로 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물의 양은 많지 않았다.
정확하게 1㎥였다.
그동안 소환식물 전용 치료수를 담아두었던 곳 중 한 칸이 비어서 담았더니 거기에 가득이었다.
"더 있으면 좋은데···."
<다음에 또 오면 되잖아.>
"왠지 이 던전은 1회성 던전인 것 같아."
<그래?>
나호가 꼬물이를 보고 물었다.
꼬물!
^이 녀석 다른 두 식물을 흡수하면서 변형이 되어서 확신할 수 없어요.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야. 너희 덕분에 귀한 것도 얻었잖아. 이제 나가자. 정신 차린 놈이 있을 수도 있겠다."
분명 미우라는 정신을 차렸을 것 같았다.
왜 왼팔을 잃었는지 궁금하지만 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동굴을 돌아 나올 때였다.
도뮤가 미우라 이야기를 꺼냈다.
뮤! 뮤! 뮤!
^미우라 놈이 어떻게 팔을 잃었는지 왜 묻지 않아?^
"궁금하긴 하는데 알고 싶진 않아."
뮤! 뮤! 뮤!
^그럼 말하지 말까?^
"왜 잃었는지 본 거야?"
뮤! 뮤! 뮤!
B22
^봤어.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많이 징그러웠어. 그리고···. 집사가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의 미우라를 봤어.^
"다른 모습? 왜? 동료를 위해서 희생하기라도 했어?"
뮤! 뮤! 뮤!
^맞아. 지금은 이곳에 액체 젤리 같은 몬스터가 한 마리도 없는데 내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는 아니었어. 그런데 그 액체 젤리 같은 녀석들이 뭔가를 먹고 있더라고···.^
<설마?>
뮤! 뮤! 뮤!
^맞아. 그 녀석들이 미우라의 왼팔을 녹여먹고 있었어. 고통이 상당한 것 같았어. 그런데 참더라고.^
"대표로 자신의 몸을 희생했다는 말이야?"
뮤! 뮤! 뮤!
^맞아. 액체 젤리를 닮은 몬스터가 다른 사람에게 가려고 하면 못 가게 계속 막더라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몸은 멀쩡할 수 있었던 거야. 굶주리긴 했지만 말이야. 어쩌면 그런 모습 때문에 시스템이 미우라를 꼭 짚어서 말했을 수도 있어.^
"감동적인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우라가 다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니야."
전생의 미우라와 다른 사람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내 기억 속의 미우라는 퇴색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미우라의 패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