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구원자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존이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마을의 경비로 세워두면 딱인데···. 저 등치를 보면 적어도 인간은 얼씬하지 않을 거야.>
나호의 눈이 존의 우람한 팔에 닿았다.
그간 잘 먹지 못했을 텐데도 근육이 장난이 아니었다.
"오빠! 고마워! 오빠가 나 찾아줬다면서?"
노엘이라는 아이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스스럼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아이였다.
홀트에게 잡혀 있어서 걱정을 했는데 아이는 구김살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꼬물!
^강한 아이에요. 작지만···.^
존의 딸이어서 덩치가 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노엘은 정말 작았다.
여섯 살이라고 했는데 서너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빠! 나 오빠 좋아!"
존의 팔에 앉아있던 아이가 그대로 몸을 날렸다.
"어이쿠! 노엘!"
존이 노엘을 잡으려고 했지만 이미 노엘의 몸은 공중에 있었다.
<영리한 아이네. 집사가 잡아줄 것을 안 거야.>
"꺄르르르! 와! 재밌다! 꺄르르!"
노엘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존이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마치 망을 보는 미어캣 같았다.
"와아아! 아! 빠! 재밌어! 와아아!"
존의 키가 훨씬 커서 존에게 안겨 있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은데 노엘은 내 품에서 더 즐거워했다.
노엘이 즐거워하는 만큼 존의 불안은 가중되고 있었다.
자신이 소리를 질렀을 때 좀비가 몰려오던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관리구역이라 안전한데···.>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거지.'
노엘을 찾은 후 사람들을 데리고 런던 던전으로 왔다.
환경이 아주 좋은 것은 아니지만 밖에서 자는 것보다는 이곳이 안전했다.
"존! 여긴 안전해요. 좀비들은 저기를 넘지 못합니다."
아이의 소리를 듣고 좀비들이 몰려오기는 했다.
하지만 2킬로미터 경계를 넘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보는 존은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것 같기는 한데···. 제가 이 던전을 드나든 것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이런 것은 본 적이 없는데···."
존은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존! 뭘 그리 고민하나? 저기 봐! 넘어오지 못하지 않나. 마치 벽이 있는 것처럼···. 안심하라고! 저기만 넘어가지 않으면 우린 안전해."
콘라드가 존을 안심시켰다.
그런데도 존의 시선은 자꾸 좀비에게로 향했다.
"딸이 있으니 더 불안한 거지. 존! 잘 봐! 내가 보여줄 테니."
옆에서 존과 콘라드를 보고 있던 콘이 관리구역을 벗어났다.
관리구역을 벗어난 순간 콘의 주변으로 좀비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콘이 관리구역으로 들어오자 좀비들이 따라오지 못했다.
"이거 은근 재미있어! 잘 이용하면 안전하게 좀비를 잡을 수도 있겠어."
관리구역 안에서 밖으로 창을 내밀며 말했다.
창이 다가오자 좀비가 멀어졌지만 관리 구역을 잘 이용하면 안전하게 사냥도 가능할 것 같기는 했다.
"봤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좀비는 다가오지 못해. 정말 저 분은 대단한 분이신 것 같아. 분명 이것도 저 분 덕일 거야."
런던 던전으로 함께 온 콘이 말했다.
"내가 말했지 않나. 콘! 자네는 운이 좋은 사람이야. 아니지. 노엘을 도와준 선행에 대한 대가인 거지."
"노엘을 보라고. 천사처럼 생겼지 않나. 저런 아이가 거리를 헤매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나!"
"그건 그렇지."
콘과 콘라드는 말하는 방식이 비슷했다.
나이도 비슷해서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뭐예요?"
노엘의 손이 목으로 다가왔다.
브으으!
^만지지마!^
깜짝 놀란 똑이가 대기실로 들어가 버렸다.
"사라졌어요. 오빠! 오빠 목에 붙어있던 거미 사라졌어요."
노엘의 눈에는 거대 몬날 문어가 거미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밥 먹자. 요리가 다 된 거 같으니···."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진 밀을 이용한 음식이 준비되었다.
"저것들 좀 멀리 가버리면 좋겠는데···."
관리구역 밖에서 소리를 지르는 좀비들을 보며 앤드류가 말했다.
관리구역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벽을 세워도 좋을 겁니다."
"그래도 됩니까?"
"좀비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면 가능하죠."
"아! 그럼 오늘 밤에 당장이라도 해야겠습니다. 눈높이만이라도 담을 쌓으면 가족들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높이 쌓아야 좀비들이 관심을 끊을 것 같아?>
담장을 쌓는다고 하자 나호가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글쎄. 여기 좀비들은 어떨지 모르지.'
좀비들은 생각보다 영리했다.
담장을 쌓아서 보이지 않아도 그 너머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고 싶으면 좀비들도 뭔가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이성을 잃은 시체 정도로 생각했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관리구역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지만 말이다.
<담장을 쌓는 일이 헛수고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은 해주지 않을 거야?>
'직접 경험해보는 것이 좋지. 그리고 아주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기는 한데···. 이 사람들은 이곳에서 계속 살 수 있을까? 마나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이곳은 우리나라가 아니었다.
그 말은 관리구역에서 하루를 머물기 위해서는 최소 2마나 이상을 지불해야한다는 말이었다.
오늘은 좀비 사냥을 많이 해서 누구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지만 날마다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었다.
'열심히 살아야지.'
<집사가 깎아주자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럴 생각 없어. 일본에 비하면 저렴하잖아. 엘리스가 영국 사람이 아니었으면 이것보다 훨씬 많은 마나를 받았을 거야.'
<부채의식 느끼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어?>
'느끼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았지. 귀족 아가씨라 때가 아니라고 했지.'
사실 엘리스에 대한 감정은 조금은 복잡했다.
전생에 엘리스는 대변혁 8년 후 마나통을 구매할 수 있다고 양심 고백했다.
이때 비로소 부모님의 고통의 이유를 알았지만 이유를 안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번민만 깊어졌다고 느낀 순간들도 많았다.
부모님께서 왜 고통스러워하시는지 아는데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다는 무력감!
그때 그 감정들이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 엘리스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정작 때려죽일 놈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그런 세월이 길었기 때문인지 대변혁 전 엘리스를 만났을 때도 특별한 인연을 만들지 않았다.
단지 독도를 건네기만 했는데···.
"오빠! 무슨 생각해? 어서 먹어. 오빠가 빨리 먹지 않으면 내가 다 뺏어 먹을 거야."
"더 먹어. 자."
"와! 나 주는 거야? 나? 고맙게 먹을게."
"죄송합니다. 이거라도 드십시오."
"괜찮습니다. 저는 배가 많이 고프지 않네요."
"혹시 신이라서···?"
도널드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것이 무엇이든 신과 잇고 싶은 것 같았다.
"신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
"아무리 아니라고 하셔도 다 압니다. 이런 안전한 곳도 만들어주신 것도 신님께서 만들어주신 거죠? 다 압니다."
<이런 사람 데려다 종교를 만들면 포교는 확실하겠네.>
"차라리 고무신이 낫겠네."
도널드가 계속 신으로 몰아가고 나호까지 종교니 포교니 해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물고 늘어지는 도널드였다.
"신의 존함이 '고무'이십니까? '고무신'! 이보게들! 신의 존함이 고무신이라고 하시네. 앞으로 절대로 잊지 않아야할 이름이야. 우리에게 새 삶을 허락하셨으니···."
<프하하! 프하하! 고무신이래. 검정 고무신이라고 하지 그랬어! 하하하!>
뮤! 뮤! 뮤!
^고무! 고무! 나쁘지 않은 단어다. 이 사람들을 격려하며 기운을 북돋아주었으니 고무신이기는 하지.^
흐흐흐!
^고무 보다는 고문이 더 끌리기는 하지만···. 주인이 고무라면 고무겠지.^
흐엉이 손바닥에서 곰지락거리며 말했다.
"그럼 저희가 앞으로 신님을 고무신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대한입니다. 제 이름."
"대한요? 많이 들어본 단어인데···. 어디서 들었더라?"
사람들은 한참을 나를 뭐라고 부를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니 구원자로 결정했다.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더니 이름을 직접 부를 수는 없단다.
<고무신보다는 낫잖아! 흐하하!>
흐흐흐!
^구원? 구원(舊怨)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흐흐흐! 구원자(舊怨者)! 오래된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 이것도 괜찮을 것 같다.^
꼬물!
^제가 잘 가르칠게요. 저 녀석 교육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아요.^
꼬물이가 흐엉의 말에 뿌리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오빠 우리나라 사람 아니지? 어디서 왔어?"
"대한민국!"
"와! 예쁜 언니오빠들 많은 나라? 나 거기 가보고 싶은데···. 아빠 우리 오빠 따라갈까?"
"대한민국에서 오셨습니까? 그 분단국가로 유명한?"
"그렇습니다."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고요?"
"대한민국은 땅에 있으니 하늘에서 온 것은 아니죠."
"그럼 어떻게? 정말 저 기계가 이동을 시켜주는 기계입니까?"
"그렇습니다. 마나만 충분하다면 당장 한국으로 가실 수 있죠."
"아!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겁니까?"
"얼마나 모아야 갈 수 있습니까? 그것보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그곳도 저런 몬스터가 많습니까?"
"먹을 것은 어떻습니까?"
"아이들이 살만합니까?"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사람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해줄 수 있는 대답은 친절하게 해주었다.
나라간 이동을 위해 3년을 허비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가 가서 살기는 쉽지 않겠죠? 말도 통하지 않고···."
"먹고 살기 힘든데 외국인들까지 오면 나라도 싫을 것 같아. 그런데 여기는 먹고 살 것이 너무 없어."
런던의 던전들은 토질도 좋지 않았다.
<런던이 전생에 힘들기는 했어.>
'대신 성장은 빨리 했지.'
고난은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했다.
전생에 영국의 헌터들은 적당히 강해지고 나면 주변 국가로 이주를 했었다.
영국은 던전 공략이 찾지 않는 헌터도 많았다.
"이곳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물이나 식량은 상점을 통해 구매하면 그만입니다. 이곳은 좀비는 넘쳐나니까요."
"저런 것들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이건 세상 어디를 가나 똑같습니다."
"그렇죠? 우리 영국만 이렇게 바뀐 것은 아니죠?"
사람들 생각은 비슷한 것 같다.
전생에 우리도 우리나라에만 이런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했다.
이런 의심은 대변혁 3년 후 국제 이동이 시작되면서 사라졌다.
"세상 모든 곳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나타나는 몬스터의 종류가 조금씩 다르지만 삶의 모습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럼 여기에 사는 것이 낫겠네요. 이곳은 익숙하기라도 하니···."
콘라드가 말했다.
"멀쩡한 세상에서도 이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잘 생각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구원자님 말씀대로 삶의 거처를 옮기는 것은 쉽지 않죠."
사람들은 식사를 하면서 궁금한 것을 계속 질문했다.
누군가 대답을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지 표정들이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나는 오빠 따라가고 싶은데···. 아빠! 우리는 이 오빠 따라가자."
"오빠가 아니고 구원자님이라고 해야지."
"구원자는 너무 어려워. 그냥 오빠라고 할래. 아빠! 따라가자. 응!"
"구원자님! 죄송합니다. 우리 노엘이 이렇게 고집을 부릴 애가 아닌데···."
존이 노엘을 말려보려고 했지만 노엘의 고집을 꺾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잘한다! 노엘! 계속 밀어붙여!>
존을 꼭 마을로 데리고 가고 싶은 나호가 노엘을 응원했다.
꼬물!
^존도 노엘도 데리고 가도 좋을 사람이에요. 그런데 노엘은 각성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요.^
'여섯 살 아이가 각성을 한 것 같다고?'
순간 심상으로 말하는 것을 잊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전생에도 유난히 어릴 때 각성을 한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여섯 살에 각성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각성이라고? 따라오겠다고 하는 것도 각성과 연관이 있나?>
'생존과 관계된 스킬이 있다면 가능한 일이지.'
노엘이 각성했다면 하얀 나비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엘! 함께 가고 싶어?"
"나는 오빠 따라 갈 거야. 오빠가 나 구해줬으니 책임져야지."
"뭐?"
"살려줬으면 책임지는 거야. 동화 속에서는 다 그랬어. 왕자님은 공주를 책임져야 하는 거야. 아빠! 그치?"
어떻게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