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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 연어 프로젝트
시간은 아무리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가 없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듯, 이곳 안드로이드 연구소의 시간도 강물처럼 빠르게 흘러만 갔다.
한 달이 지난 오늘!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운명의 날이 밝아왔다.
“으아아아아!”
서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안드로이드의 몸을 가지고 있는 그는 굳이 많은 잠을 잘 필요가 없었다.
단 두 시간의 잠만으로도 누구보다 멀쩡한 얼굴이 되어 잘도 돌아다녔다.
하이드로 스프레이(hydro spray) 방식의 샤워로 몸을 씻은 그는 온풍기로 몸에 물기를 말렸다.
몸에 착 달라붙는 내복을 입고 전신슈트 모양의 내부장갑을 걸쳤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늠름한 모습을 확인하자 서진은 괜히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방을 나섰다.
1번 회의실 앞에 서자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정말 좋은 아침이네요.”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서 그런지 제일 먼저 서진을 반갑게 맞이해준 사람은 민연서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마치 광채가 나듯 반짝거렸다.
그의 꿈과 망상 속에서 갖가지 야한 포즈로 등장했던 아트엔젤 민연서가 자신의 바로 눈앞에 서있다는 사실이 그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서진은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려왔다.
물론 안드로이드 몸에서 그런 현상이 벌어질 리는 없으니 이건 아마 100% 심리적인 요인일 것이다.
“오늘 컨디션 무척 좋아 보이네요.”
“저야 안드로이드 몸이라 항상 컨디션이 좋죠.”
“아,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민연서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볼이 발그스름해지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멋진 화보가 되어 있었다.
역시 미인은 뭐를 해도 아름다운가보다.
“괜찮아요. 전 이미 이런 몸에 적응된 지 오래에요.”
“그래도 혹시 마음 상하셨다면 미안해요. 제가 사과할게요.”
“하하하, 아니에요. 전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니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절 지금처럼 편하게 대해주세요.”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할게요.”
민연서는 서진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웃음을 보자 마치 주변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언제 이런 변을 당하셨어요?”
민연서는 아주 조심스럽게 서진에게 물었다.
서진이 화를 낼까봐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그녀를 충동질하고 있었다.
사실 그날의 악몽은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고 몸이 떨리며 소름이 돋아 진저리를 쳐야했다. 하지만 그녀의 앞이라서 그런지 서진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담담하기만 했다.
그는 오늘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을 꺼내 술술 풀어 얘기했다.
“2019년, 느닷없이 난입한 중대형 마수로 인해 팔다리와 하체를 잃었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대수술을 몇 번이나 받았는지 모릅니다.”
“아!”
“수술은 모두 실패했고 하루하루를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생명을 보조하고 유지시켜주는 장치에 의지해야했습니다. 만약 그때 오 박사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전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오 박사님은 그때 만나신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요?”
민연서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서진을 바라보며 그의 얘기에 푹 빠져들었다.
“3년 뒤인 2021년에 오 박사님이 새롭게 개발한 안드로이드와 합체가 가능해졌습니다. 덕분에 전 이렇게 다시 사람처럼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그 안드로이드 몸체로 마수를 잡은 건가요?”
“마수를 잡으러 갈 때는 이 몸이 아니라 다른 전투용 안드로이드로 갈아타야합니다. 대한민국 정부와 국방부를 비롯하여 각국의 정부와 다국적기업들이 후원하는 대 마수 병기 프로젝트에 의해 만들어진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으로 갈아타야한다는 말이지요.”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으로 갈아타면 중대형 마수들을 쉽게 상대할 수 있는 건가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중대형 마수도 마수 나름이지요. 내부장갑과 외부장갑까지 꼼꼼히 장비하고 철저히 준비해서 사냥을 하지 않는다면 결코 마수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대 마수병기로 수많은 마수들과 싸워오면서 폐기시킨 안드로이드 전투로봇만 해도 두 자리 수에 넘어갑니다.”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시고 계시네요.”
“하하하,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민연서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서진을 쳐다봤다.
그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물기가 살짝 맺힌 그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꽉 끌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서진은 설사 과거로 회귀한다고 해도 민연서를 꼭 다시 만나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그녀에게 달려가서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비록 지금은 누군가와 연인사이지만, 과거로 회귀한 다음에도 계속 연인사이가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녀를 꼭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생각은 아니다.
연인이 되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침 식사 하셨어요?”
“아뇨.”
“우리 같이 라면 먹을래요?”
“아침에 라면을 먹자고요?”
민연서는 서진의 말에 눈을 깜빡거렸다. 속으로 갈등이 엄청난 것 같았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 라면일수도 있잖아요?”
“정말 그러네요. 좋아요. 우리 같이 라면 끓여먹어요.”
라면광인 민연서는 결국 서진의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고 말았다.
둘은 그렇게 아침부터 라면을 끓여먹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한 달 동안 연구소에서 같이 살면서 서진과 민연서와 꽤 많이 친해졌다.
이제는 그녀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거기에다 민연서가 살던 동네가 방배동이라는 귀중한 정보도 입수했다. 자신이 살던 동네는 방배동 바로 옆에 있는 서초동이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란 말이다.
오 박사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여섯 명의 능력자의 주소를 무조건 서로 외우게 한 것이 서진에게는 이처럼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주게 된 것이다.
철컹!
문이 열리며 건장한 몸을 가진 최강철이 안으로 들어왔다.
“강철 씨, 어서 오세요.”
“연서 씨, 일찍 왔네요.”
서로를 존중해주는 의미에서 아직도 상대방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다는 최강철과 민연서!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 아니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자 서진은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연인인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강철 씨. 좋은 아침입니다.”
“네, 굿모닝, 서진 씨.”
서진은 최강철을 향해 그저 한손을 들어 아침인사를 하고는 1번 회의실 옆에 있는 오 박사의 제3연구실로 넘어갔다.
제3연구실 안에는 오 박사가 한창 작업에 빠져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녀에게 조용히 다가가자 오 박사가 안경을 위로 치켜들더니 반갑게 서진을 맞이했다.
“서진 군, 어서와.”
“오 박사님, 안녕하세요? 언제부터 작업하셨어요?”
“내가 새벽잠이 없는 것 잘 알잖아.”
그녀는 꼭두새벽부터 나와서 작업을 한 것이다.
“이게 우리가 탈 연어호 인가요?”
“맞아. 이게 바로 그거야.”
‘연어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연어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원뿔 모양의 은색의 구조물은 마치 키세스 초콜릿을 커다랗게 확대해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좀 구경해도 되나요?”
“물론이지.”
연어호의 문을 열고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어 살펴봤다.
가운데 기둥이 하나 있고 그것을 기준으로 동그랗게 여섯 개의 의자가 등을 맞댈 수 있게 놓여있었다.
신성일의 회귀능력은 오직 사람만 회귀시킨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래도 영화에서 나온 타임머신 같은 것을 기대한 서진은 무척 실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오 박사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고 있어 실망한 티는 내지 않았다.
“디데이가 오늘인데, 이거 언제 완성되나요?”
“연어호가 완성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야. 지금 내가 테스트를 하고 있는 것은 만약에 일어날 최악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야. 그리고 아마 30분이면 모든 준비가 끝나게 될 거야.”
“그렇군요.”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벽 쪽에 놓인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오 박사님의 작업을 더 이상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는 편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최강철과 민연서를 비롯해 강무호, 원범수, 오공유, 신성일이 차례로 안으로 들어왔다.
“다들 잘 잤습니까?”
“네, 덕분에요.”
“예, 잘 잤습니다.”
오 박사의 질문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얼굴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오늘이 디데이라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무호와 원범수는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오늘따라 유난히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지껄여댔다. 오공유는 연신 어색한 웃음을 흘려대며 신성일의 눈치를 봤다. 최강철과 민연서는 서로를 꼭 끌어안으며 닭살 돋는 짓을 잘도 벌였다. 질투로 인해 머리뚜껑이 열릴 것 같은 서진은 혹시라도 눈을 버릴까봐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오직 신성일만 유일하게 차분한 얼굴로 오 박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참, 나 좀 그만 쳐다보고 저리 가서 서로 마지막 인사나 나눠요!”
“네.”
오 박사는 신성일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무척 신경 쓰이는지 날카로운 소프라노음을 내며 말했다.
신성일은 ‘앗 뜨거워라!’하며 펄쩍 뛰고는 급히 한쪽으로 가서 일행을 불러들였다.
그들은 일단 오 박사의 말대로 서로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꼭 성공합시다.”
“혹시 나 회귀 못하면 내가 살고 있는 곳 가서 뒤를 좀 봐줘요.”
“넌 반드시 회귀에 성공할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다른 사람은 다 실패해도 서진 씨가 실패하면 곤란한데…….”
“그게 무슨 소리야. 서진 씨와 우리 중 한 명 이상은 반드시 성공해야해.”
“다들 성공할 테니 거 부정 타게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맙시다.”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소리가 연구실 안을 소음처럼 울려댔지만 그들의 무거운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서진도 오늘만큼은 뒤로 빼지 않고 적극적으로 악수를 청하며 마지막일지도 모를 인사를 나눴다.
여섯 명이 서로 악수를 나누며 마지막일지 모르는 인사를 나누는 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들은 금세 할 말이 동이 난 듯 서로 멀뚱멀뚱 얼굴만 쳐다보며 어색한 썩은 미소만 지었다.
보다 못한 신성일이 서진을 불렀다.
“서진 씨, 블루볼 안에 들어있는 물품을 꺼내 마지막으로 확인해보도록 합시다.”
“네, 그러죠.”
서진은 신성일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오른손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손안의 공간이 살짝 출렁이더니 당구공만한 그의 아공간이 나타났다. 그는 아공간에 손을 집어넣어 파란 공 하나를 꺼내들었다.
서진에게 블루볼을 넘겨받자 신성일은 블루볼의 아공간을 열어 안에 들어있는 모든 장비와 물품들을 밖으로 꺼냈다.
그러자 신성일을 제외한 여섯 명의 능력자들이 다가와 자신의 무기와 장비, 물품 일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최강철은 우락부락해 보이는 탱커전용 슈트와 직사각형 모양의 대형 타워실드, 커다란 전투도끼(battle axe)와 에너지를 흡수한다는 건틀렛 모양의 에너지옵서버를 꺼내 살펴봤다.
강무호는 근접 딜러답게 튼튼한 전신슈트와 자신의 상징과도 같은 거대한 그레이트소드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원범수는 마법사전용 슈트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 주먹만 한 남색 정수가 달린 마법지팡이를 확인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아이템이 들어있는 배낭을 열어 안의 내용물을 살펴봤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배낭 안에 정확하게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오공유는 날렵하게 생긴 전신슈트를 꺼내더니 자신의 주무기인 컴파운드 보우와 리커브 보우를 차례로 살펴봤다. 화살이 빽빽이 담긴 화살통을 많이 가져가지 못하는 것이 좀 억울했는지 화살촉만 따로 한계치까지 담아 놓은 주머니를 쓰다듬었다.
민연서는 하얀색의 힐러전용 슈트와 남색의 정수를 깎아 만든 마나오브를 꺼내 살펴봤다. 각종 포션이 담긴 포션백을 열어보고, 미리 자신의 마나를 채워놓고 급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획기적인 마법아이템인 마나리차저(mana recharger)도 조심스럽게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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