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 / 0225 ----------------------------------------------
제2장 - 회귀, 그 새로운 시작
판타지 소설에서는 아기로 환생해서 거대한 젖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놀라고 엄마의 가슴을 보고 부끄러워한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진 얘기임을 알 수 있었다.
눈은 흐릿해서 아직도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가 없어서 그런지 항상 입을 살짝 벌리고 있는 자신의 입에 젖을 물려주는 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라 어머니인 손예진의 고유권한일 뿐이었다.
사실 모유의 맛도 잘 느껴지지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젖이 물려지면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젖을 빨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살기 위해, 생존을 위해,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반사적으로 젖을 빨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엄마의 가슴을 볼 수 있고 어떻게 부끄러워한단 말인가?
다시 말하지만, 아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역시 먹고 자고 싸는 것 밖에는 없다.
‘아니야. 난 그냥 아기가 아니야. 다 자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는 없어. 뭔가 해야 해. 아무리 내가 아기라고 해도 그냥 이대로 천금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옳지 않아. 내가 금수저라면 모를까 이미 흙수저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이상, 출발선 자체를 변화시켜야만해.’
서진은 젖을 먹어서 그런지 오랜만에 생각이라는 것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는 강하게 다짐했다. 비록 자신이 아기의 신분이지만 반드시 뭔가 해내고야 말겠다고 말이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고르르르 고르르르…….”
젖을 배불리 먹고 나서 그런지 몰아닥치는 식곤증의 파도에 그는 한순간에 빠져 버렸다.
서진은 지금 전형적인 작심삼초(作心三秒)의 예를 훌륭하게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 * *
신생아는 대부분 눈을 감고 지낸다.
그래서 서진이 눈을 감고 있어도 다들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아기가 눈을 감고 있거나 자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
‘역시 그것 밖에 없겠지?’
태어난 지 1주일이 지난 갓난아기 서진은 틈틈이 생각을 정리하다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출생에서 만 2세까지의 시기인 영아기에, 자신이 마루3호로 지낼 때 연마했던 ‘뇌정(雷霆)’을 다시 익히기로 한 것이다.
‘뇌정’은 지각 초능력자들에 의해 복원에 성공한 고대의 심법(마음을 쓰는 법)이자 무공이다.
지각 초능력자들은 이것이 고도로 발달한 형이상학적인 무공일 가능성이 높다고 흥분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대격변 이후, 불덩이와 얼음의 창을 만들어내고 번개와 구름을 소환하는 능력자들의 스킬이 난무하는 시대에 고작 고대의 심법 따위가 주목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뇌정’은 소리 없이 묻혀버렸다. 아니 묻히는가 싶었다.
서진이 마루3호가 돼서 중추신경 (central nerve)과 말초신경 (peripheral nerve)을 자극해 감각신경(somatosensory system)과 운동신경(motor system)을 극대화하기 위해 ‘뇌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마루3호로 지내던 당시, ‘뇌정’은 뇌와 척추 밖에 남지 않은 서진이 배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심법이자 무공이었다.
서진은 ‘뇌정’을 익힌 후로 기억력, 판단력, 지각능력, 인지능력, 반사신경, 동체시력 등이 우수해져 다른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에 비교할 수 없는 전투력을 보였다.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뇌정’을 수련하면 예민한 감각과 빠른 신경을 얻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어차피 달리 할 것도 없는데 그냥 뇌정(雷霆)을 익혀보도록 하자.’
서진은 쿨(cool)하게 마음을 굳히고 처음 뇌정을 수련했을 때를 기억해 차분히 수련하기 시작했다.
이날부터 그는 먹고 자고 싸는 아기의 일을 충실히 행하면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열심히 뇌정을 연마했다.
사실 뇌정의 이론은 지극히 간단하다.
천지간에 존재하는 모든 기운을 모아 정수리에서 꼬리뼈까지 척추의 길(마나로드, 穴道)을 타고 끊임없이 왕복하게 한다. 이를 지속하면 기운은 정화가 되어 정수리(百會穴)에 차곡차곡 쌓이고 뇌를 자극해 마침내 상단전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 좋아 심법이자 무공이지 결국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일 뿐이다. 얼마나 의지를 집중시킬 수 있는가가 뇌정을 익히는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수리에 의지를 집중시켜 천지간의 기운을 모으는 일은 절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어라! 쉽네.’
그런데 서진에게는 쉬웠다.
그것도 아주 쉬웠다.
물론 마루3호일 때 열심히 뇌정을 수련한 경험이 있기도 했지만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막상 자신의 의지를 정수리에 집중시키자 머리끝이 간질거리면서 뭔가 기운이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전에는 이렇게 기운을 빨리 느끼지 못했다.
족히 3달은 밤낮을 잊고 가부좌를 튼 채 도인 행세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숨골이 열려있는 아기의 몸인 서진은 단번에 그 3달을 뛰어 넘었다.
쉬익 쉬익!
마치 정수리가 숨이라도 쉬는지 그가 숨을 쉴 때마다 기운이 계속 들락거렸다.
‘이래서 선조들이 정수리를 숨골이라고 불렀나?’
그는 기쁜 마음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서진의 미소를 본 어머니 손예진이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꾸준히 뇌정을 수련하면 곧 기운이 쌓이겠지.’
뇌정을 처음 수련하는 날이라 그런지, 아니면 정신력을 많이 소모했는지…….
급격히 잠이 몰려왔다.
오늘도 그는 먹고 자고 싸고…… 또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으아아악! 뒤집었다.”
“네?”
“우리 서진이가 혼자 몸을 홱 뒤집었어.”
이만수는 잔뜩 흥분한 표정을 하고 부엌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손예진에게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고자질을 하듯 얘기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떻게 한 달밖에 안된 아기가 몸을 뒤집어요?”
“진짜야. 내가 봤어. 정말 혼자 홱 하고 몸을 뒤집었어.”
이만수가 흥분하면 할수록 손예진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여보! 제발 육아책 좀 읽어보세요. 아기가 몸을 뒤집는 경우는 대략 100일 전후에요. 빠르면 90일 늦으면 120일 정도 된다고요. 혹시 당신 어제 술 마셨던 게 아직 덜 깬 거 아니에요?”
“아니야. 나 술 다 깼어.”
“앞으로 서진이 근처에도 가지 말아요. 괜히 당신 때문에 우리 아기 알코올 중독자 되겠어요.”
“에엑, 그게 무슨 소리야? 서진이가 왜 알코올 중독자가 돼?”
“당신이 숨을 쉬면 아기에게 알코올 성분이 들어갈 게 분명해요. 그러니 당신은 절대 서진이 근처에도 가지 말아요. 그리고 오늘부터 술 좀 작작 마시고 집에 일찍 좀 들어와요?”
이만수는 손예진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려버렸다.
서진은 답답한 마음에 괜히 몸 뒤집기를 시도했다가 아버지를 양치는 소년, 아니 양치는 아저씨로 만들고야 말았다.
‘이거 몸도 마음대로 못 뒤집겠군. 아기가 100일 전후로 몸을 뒤집는 것을 내가 알았나? 아버지. 일단 미안합니다. 나중에 다 보상해드릴게요.’
서진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다짐하고 앞으로 누가 있을 때는 절대 몸을 뒤집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나저나 뇌정의 수련도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어. 이러다가 유아기도 되기 전에 원정(元精)을 만드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서진은 가만히 자신의 머리를 만져봤다.
머리통이 너무 크고 손이 짧아서 정수리가 쉽게 만져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정수리를 통해 천지간의 기운이 들락날락하는 것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뇌정을 수련한지 겨우 3주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정수리에 쌓인 정화된 기운의 양이 꽤 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정수리와 꼬리뼈사이를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쉴 새 없이 왕복하는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신체발달이 점점 눈에 띄게 가속화되고 있었다.
아직 앉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몸을 뒤집거나 데굴데굴 굴리는 것은 가능했다. 그리고 천천히 기어가는 것도 슬슬 시험을 해보고 있는 중이다.
특히 청각과 시력의 발달이 눈부셨다.
원래 아기는 청각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듣는 것은 처음부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잘 들려서 가끔 잠을 설치기도 했다.
자신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주변 이웃들이 이렇게 대한민국의 인구증가정책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줄은 정말 처음 알았다.
시력은 서진도 다른 아기와 전혀 다를 바 없이 처음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빛을 좀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엄마의 젖과 얼굴이 보이고 눈앞에 뭔가 움직이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목에 힘이 들어가면서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시선을 따라 움직인다던가, 손을 뻗어 잡기도 했다. 보통 생후 3~4개월의 아기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서진의 시력발달은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생후 12개월의 아기처럼 초점 거리가 2m 까지 늘어나 물건의 모양과 색 그리고 형태를 알고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거리는 매일 조금씩 늘어나 현재는 3m 까지 확장된 상태였다.
보통 6살이 되면 초점 거리가 5m 정도까지 확대되어, 시력이 완성되는 시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진의 경우, 아마 돌이 채 지나기도 전에 시력이 완성될 가능성이 아주 높아보였다.
이 모든 것이 뇌정을 수련한 덕분이라는 것을 서진은 잘 알고 있었다.
너무 빠른 성장은 주변의 이목을 끌어들일 수 있어 당분간은 아무도 자신의 폭풍성장을 모르게 하는 것이 좋았다.
‘기는 것은 아무리 빨라도 소용없다. 차라리 걷는 시기가 올 때까지 좀 기다리자.’
아기는 생후 10개월부터 14~17개월 정도면 걷는다.
서진은 10개월이 되면 얄짤없이 일어나 걸어 다니기로 결정했다.
* * *
“서진아 생일 축하해!”
“우리 사랑하는 서진이의 돌을 축하합니다.”
“축하해!”
서진은 이만수와 손예진의 사이에, 높게 만들어 놓은 의자 위에 의젓하게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영 마뜩치 않은 표정이다.
‘돌잔치는 도대체 왜 하는 거야? 나한테 좋은 것은 하나도 없고 다 자기들 좋아하는 것만 잔뜩 가져다 놓았네.’
그렇다.
서진은 자신의 생일날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먹을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짜증이 난 것이다.
이미 덩치는 12개월 남자아이 평균인 체중 10kg, 신장 76cm에서 아득히 벗어나 24개월 된 남자아이 평균인 체중 12.3kg, 신장 86cm를 넘어서고 있었다.
한마디로 우량아라는 소리다.
그런데 서진이 그냥 단순히 우량아만일까?
그건 아니었다.
돌이 지나기도 전에 걷고 뛰는 것은 물론이고 말문이 트이기가 무섭게 글을 읽어대는 신동으로 벌써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이것도 서진이 적당히 자신을 감춰서 그렇지, 안 그랬다면 분명히 해외토픽에 능히 대서특필됐을지도 모른다.
‘이제 갓 돌이 됐는데 뇌가 놀라울 정도로 발달하고 있어. 뇌정을 수련하는 효과가 기대이상으로 정말 대단하네. 나 이러다 정말 천재되는 거 아냐?’
서진은 요즘 스스로 생각해도 무서워질 정도로, 뇌의 활성화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뇌정을 수련하면서부터, 정수리와 꼬리뼈 사이를 왕복하는 기운들이 뇌와 신경을 자극해서 그런지 기억력이 장난 아니게 좋아졌다. 그래서 한번 본 것은 ‘포토그래픽 메모리’처럼 머리에 딱 찍혀서 잊히지 않았다.
거기에다 요새는 무슨 개안(開眼)이라도 한 것처럼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느껴지지 않던 감각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걸 예감이나 직관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육감이나 촉이라고 불러야할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뇌정의 기운이 제3의 눈이라고 불리는, 머리 한가운데에 있는 송과체(松果體, pineal gland)를 드나들며 자극을 해서 활성화시킨 게 아닌가 싶었다.
“네가 서진이구나. 참 귀엽게 생겼네.”
“아야!”
그때, 아버지의 친구로 보이는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남자가 다가오더니 대뜸 서진의 볼을 잡아당겼다. 어린아이 살결이 얼마나 연약한지 모르는지 이리저리 마구 잡아당기는 그 무례한 작태에 서진은 절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뭐 이런 무식한 놈이 다 있어? 콱 눈깔을 쑤셔버릴라.’
서진은 과거로 회귀하자 예전에 가지고 있던 자격지심과 자기비하를 완전히 털어버렸다. 대신 타고난 본성인 강하고 담대한 성격으로 조금씩 바뀌어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 남자의 얼굴을 만지는 척 하다가 손가락으로 눈을 푹 쑤셔서 자신을 아프게 한 놈에게 통렬한 응징을 가하려고 했다.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계획이다.
설마 돌잔치의 주인공인 서진이 의도적으로 남자의 눈알을 찌르리라곤 아마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어! 가만,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바로 복수를 하려던 서진은 일단 자신의 계획을 잠시 보류했다.
아무래도 눈앞의 이 기생오라비 같은 자의 얼굴이 무척 낯이 익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즐겁게 읽어주세요.
선호작, 추천, 코멘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