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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 정신단련 프로젝트
‘여기가 무슨 도떼기시장이냐? 애들이 왜 이렇게 많아?’
서진은 비록 교실이 넓은 편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숫자의 아이들로 인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샛별반에 담임 선생님 한명과 보조 선생님 둘이 배정되어 있는 게 참 다행이었다.
담임 김사랑 선생님
보조 이소망 선생님
보조 박믿음 선생님
교실 칠판에 맨 위쪽에 이름까지 써져있는 것을 보니 확실했다.
‘그런데, 어째 유치원 선생님의 이름들이 하나 같이 특이하네. 믿음, 소망, 사랑? 그럼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냐?’
서진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첫 수업은 샛별반 신입생들이 선생님과 같은 반 원생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커다란 원을 그리며 놓아둔 의자에 앉은 샛별반 신입생들은 한명씩 차례로 일어나 자신이 누군지 소개를 했다.
“저는 다섯 살, 이미란입니다. 책읽기를 좋아합니다. 바나나우유를 제일 좋아합니다.”
“제 이름은 강민찬입니다. 유치원 맞은편에 살고 있습니다. 제 꿈은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대학에 가야합니다. 앞으로 저는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할 겁니다.”
“유소라에요. 장래희망은 의사가 되는 거예요. 아픈 사람을 많이 도와주고 싶어요.”
“장독대다. 사이좋게 지내자.”
꼬맹이들은 자신의 이름과 뭘 좋아하는지 하나씩 얘기를 했다. 개중에는 아이들 같지 않게 어른스런 포부를 밝히기도 하고 가끔은 좀 불량스런 기운을 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꼬맹이들이 하는 짓은 그냥 다 귀여워보였다.
김사랑 선생은 나름 열심히 아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소통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했다.
물론 서진에게는 그녀의 호리호리한 체형과는 달리 보기 드문 볼륨감이 더 가상했지만 말이다.
문제는 뒤에 서있는 학부모들이 너무 유난을 떨어댄다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자식이 일어나 소개를 하는 것만 예쁘게 보이는지 연신 셔터를 눌러대며 경쟁적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아이들은 선생님과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치 보기 바빴다. 게다가 일부 몰상식한 학부모들은 자기자식의 차례가 끝나자 이제는 아예 옆 사람과 대놓고 수다까지 떨면서 수업분위기를 흐려놓았다. 이쯤 되면 학부모들은 좀 알아서 빠져주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오늘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교실에 계속남아서 진상을 떨 것 같았다.
‘그래도 꼬맹이들은 아주 귀엽네.’
사실은 그 귀엽다는 꼬맹이 중의 하나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서진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며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쳐다봤다.
그때 그의 눈에 아주 귀엽고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 한명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부터 눈길을 확 끄는 것을 보니 아마 다 크면 남정네들의 눈물깨나 쏟게 만들 요물들로 잘 자라날 것 같았다.
지도 예쁜 것은 아는지 남자아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빤히 쳐다보자 고개를 팩 돌리면서 ‘흥’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 꼬맹이 이름이 뭐였지? 유소라였나? 꽤나 귀엽네.’
서진은 절로 아빠미소를 띈 채 여자아이를 쳐다봤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즐겁고 흐뭇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진은 금세 흥미를 잃어버렸다.
어느새 시선을 허공에 둔 채 멍한 표정이 된 서진에게 메딕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십장생건축회사의 트리오 중 나태우 십장이 또다시 이만수님을 이유 없이 괴롭히고 있습니다. 아직 수집한 정보가 모자라 일단은 꾹 참으라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휴우.”
서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면 모를까, 당장 메딕을 시켜 나태우 십장이란 놈을 십창나게 응징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정신적, 육체적 성장을 위해 지금은 그저 꾹 참아야했다.
지금 자신이 개입하면 메딕이 세워놓은 마스터 플랜 자체가 아예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서진님, 드디어 한가한의 소재를 확보했습니다. 역시 생각대로 해외로 도주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현재 그의 비리를 추적 중에 있습니다. 곧 증거자료를 찾아 확보하겠습니다. 90%의 확률로 한가한은 오늘저녁 집으로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흐음.”
서진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연이은 한숨소리에 옆에 앉아있던 여자아이가 그의 등을 토닥거리더니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헐! 나 긴장하는 거 아니다.”
“정말? 난 긴장되는데…….”
꼬맹이의 말에 서진은 그만 맥이 탁 풀렸다.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한마디 쏴주려고 해도 이렇게 맑고 순수한 눈빛으로 쳐다보니 도저히 차갑게 대할 수가 없었다.
서진은 최대한 무뚝뚝한 말투로 속삭였다.
“긴장하지 말아야지 생각해도 긴장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가 네 집이려니 생각하고 그냥 너하고 싶은 데로 해버려.”
“진짜 그래도 돼?”
“왜 안 되는데? 여기 너 돈 받고 일하러 왔냐? 떳떳이 돈 내고 배우러 온 거야. 네가 갑이야.”
“그래?”
꼬맹이는 눈을 크게 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말을 몇 퍼센트나 제대로 이해하고 알아먹었는지 모르지만 마치 다 알아들었다는 듯 폼을 잡는 게 꽤나 귀여웠다.
물론 박소정의 얼굴은 평범했다.
하지만 눈이 커다란 게 웃을 때 참 귀여웠다.
“이제 마지막으로 차례는 누굴까요?”
“쟤요.”
“서진이요.”
“네, 맞아요. 서진이에요. 자 그럼 이제 서진이의 소개를 들어볼까요?”
“네.”
서진은 김사랑이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자 그제야 자신의 차례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냉정하게 얼음물이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서진이다. 혼자 사색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니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상이다.”
“…….”
순간 샛별반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다섯 살짜리 유치원생의 말치고는 좀 충격적이었나 보다.
하지만 서진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는 쿨하게 모두를 무시해버렸다.
“하, 하하하! 서진이가 나름 까칠한 면을 가지고 있었네요. 그래도 모두 서진이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도록 하세요.”
“네, 선생님.”
김사랑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서진에게는 좀 귀찮기도 했지만 은근히 기특해 보이기도 했다.
“자, 이제 모두 화장실로 가보도록 합시다. 화장실은 어떻게 쓰는 건지 오늘 확실하게 배우도록 해요.”
“네.”
김사랑과 보조교사 둘은 샛별반 아이들을 이끌고 화장실로 갔다.
대부분 화장실을 쓰는 법을 알고 있었지만 혹시라도 모르는 아이가 있을까봐 그들은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그 다음은 유치원 탐방이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유치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또 유치원 안에 뭐가 있는지를 구경시켜줬다.
그렇게 이것저것 유치원에 대해 설명하고 기본적인 정보를 알려주고 나자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버렸다.
스타유치원은 자체적으로 유기농 체험농장을 가지고 있어서 급식의 질이 상당히 좋았다. 나름 식도락가로 자처하는 서진조차 급식으로 나온 음식을 보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물론 특급호텔 뷔페에서 나오는 것 같은 요리가 나온다는 얘기는 아니다.
말 그대로 밥과 반찬, 요리들이 하나같이 정성스럽게 준비됐다는 뜻이다.
서진은 안 그래도 슬슬 배가 고파지려는 찰나에 음식을 보자 벌써부터 눈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선생님이 선창을 하자 아이들이 복창을 했다.
그리고 즐거운 점심식사가 시작됐다.
아이들은 자신의 책상위에 놓인 음식을 정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한참 자랄 때이기도 하지만 급식이 집 밥보다 훨씬 맛있었기 때문이다.
서진도 그 물결에 기꺼이 동참해 순식간에 한 그릇을 뚝딱해치웠다.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다행히 더 먹고 싶으면 얼마든지 더 먹을 수 있었기에 서진은 두 번이나 더 음식을 가져와 먹었다.
그제야 어느 정도 배가 차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생일이 막 지난 만3세(5살)의 서진은 또래의 평균 신장(93cm)과 몸무게(14kg)를 크게 앞지르고 있었다. 그는 만6세(8살) 평균에 해당하는 113cm 의 신장과 20kg 의 몸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또래의 아이들보다 신장이 20cm나 컸고 몸무게도 6kg이나 더 나가는 것이다.
이러니 당연히 먹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우와, 너 참 많이 먹는다. 내 것도 먹을래?”
“아니. 다 먹었다.”
박소정은 제 딴에는 서진을 위한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이 먹다 남은 음식을 그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서진은 쳐다보지도 않고 냉정히 거절했다.
박소정은 우울한 얼굴이 되어 식판을 가져가 반납했다.
서진도 식판을 반납하고 돌아오자 이제는 다들 치카치카를 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녔다. 이를 닦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요란을 떠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냥 애들이라 그러려니 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식곤증이 몰려왔다.
당장 드러눕고 싶었지만 이따 낮잠시간을 준다는 말에 꾹 참고 견뎠다.
김사랑은 아이들과 가벼운 놀이를 하다가 곧 낮잠시간을 줬다.
자고 싶지 않은 아이들은 조용히 휴식을 하던가 밖에 나가서 놀아도 된다고 했다.
서진은 낮잠을 택했다.
하지만 30분 만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야했다.
꼬맹이 둘이 자신의 바로 옆에서 소곤거리는 통에 도저히 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진은 꼬맹이들에게 짜증을 낼 수도 없어서 그냥 산책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다.
밥 먹고 나니 힘이 뻗치는지 샛별반 아이들 몇이 그네와 미끄럼틀을 타고 일부는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서진은 커다란 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를 발견하고는 그곳으로 걸어갔다.
두 다리를 쭉 뻗고 자빠져서 눈을 감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귓전을 간지럽혔다.
‘여기가 더 낫네.’
서진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탁!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이마를 내리쳤다.
서진은 놀라서 급히 몸을 일으켰다.
“뭐야?”
“비켜라. 이 벤치 네가 전세 냈냐?”
“헐!”
서진은 황당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까 장독대라고 자신을 소개한 녀석이 어디 영화에서나 훔쳐본 듯한 말투로 눈을 부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그의 옆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유소라가 손목을 단단히 잡혀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다.
“너 어디 아프냐?”
“얘가 내 손목을 잡고 안 놔줘.”
“아니 왜?”
“나도 몰라. 이상한 애야. 흡!”
유소라는 장독대가 쳐다보자 무서워서 자신의 입을 한손으로 틀어막았다.
그 모습을 보자 서진은 아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버렸다.
이게 무슨 아침드라마에도 나오지 않는 3류 막장스토리란 말인가?
그것도 이제 갓 유치원에 들어온 꼬맹이들이…….
“야, 빨리 저리 안 꺼져?”
“내가 왜?”
“너 나한테 한 대 맞아볼래? 왜 자꾸 까불어? 죽을라고.”
장독대는 어째 조폭들이 쓰는 말투를 자꾸 흉내 내면서 서진을 윽박질렀다.
‘허어! 이거 정말 말세란 말이 딱 어울리는 구나. 살다보니 별 거지 발싸개 같은 꼬맹이 새끼가 겁도 없이 달려드네. 그런데 이걸 어쩌지? 그냥 쥐어 패? 말아?”
서진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장독대는 서진이 고민하는 것을 쫄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는 서진의 몸을 힘껏 밀어 벤치에서 떨어뜨리려고 했다.
하지만 한손만으로는 서진을 도저히 밀어낼 수가 없었다.
“너 손 놔줄 테니까 꼼짝 말고 여기 서 있어. 알았지?”
“알았어.”
“도망가면 나한테 혼날 줄 알아.”
“…….”
유소라는 훌쩍거리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태어나서 이런 경우를 처음 당해봐서 그런지 겁을 잔뜩 집어 먹었다.
장독대는 유소라의 손목을 놓아주고는 거침없이 달려들어 서진의 몸을 확 밀었다.
아니 밀려고 했다.
서진은 장독대가 달려들자 슬쩍 몸을 뒤로 눕혔다.
장독대의 두 손이 허공을 향해 밀려갔다.
그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리고는 벤치 모서리에 이마를 세게 부딪치고는 뒤로 발랑 나자빠졌다.
“으아아악!”
장독대는 크게 비명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며 울어댔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뉘 집 귀한 자식인지 모르지만 오냐오냐 키워서 영 싸가지가 바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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