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둠레이더-14화 (14/225)

0014 / 0225 ----------------------------------------------

제4장 - 악연을 끊자.

둘이 같이 서 있는 상상을 하자 뭔가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졌다. 어디선가 본 귀여운 남자아이와 예쁜 여자아이가 길에서 뽀뽀를 하던 장면이 머리를 스쳤다.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그려졌다.

싱긋! 자신만 이해할 수 있는 미소를 지은 손예진은 동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에 걸쳐 살펴봤다. 확실히 서진이는 잘못이 없었다. 장독대라는 꼴통아이가 혼자 난리브루스를 치며 생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내일 가서 그냥 화끈하게 한바탕 뒤집어 엎어버리는 일만 남았다. 손예진은 비록 결혼해서 애를 키우고 있지만 처녀 때의 그 왈가닥 성격이 어디로 다 도망간 것은 아니었다. 일단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불렀으니 어디 누가 이기는지 대차게 한번 붙어볼 생각이다.

옆에서 손예진의 안색을 살펴보고 있던 서진은 비장한 표정이 곧이곧대로 얼굴에 다 드러나는 심플한 어머니의 생각을 눈치 채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장독대가 집에 가서 무슨 거짓말을 할지 모르지만 이렇게 버젓이 증거가 있으니 아마 빼도 박도 못하고 진실이 백일하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마스터, 한가한이 이만수님에게 전화를 해서 오늘 집 앞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귓속에 이식된 메디봇을 통해 메딕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서진은 메딕의 말을 듣자 곧바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아무리 자신이 메딕을 믿고 있다고 해도, 정신단련 프로젝트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에 불과하다.

단 며칠 사이에 아버지 이만수가 변했을지, 얇은 귀의 저주는 이길 수 있을지, 그는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이 사태를 잘 막았다는 소리를 듣지?’

서진은 나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때, 어머니 손예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꿩 잡는 게 매라고, 역시 아버지는 어머니가 꽉 잡고 계셔야한다.

어머니의 레이더망 안에, 아니 감시망에 들어가 계셔야 서진, 자신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으리라는 진리의 깨달음이 다가왔다.

믿습니다. 어머니!

서진은 어머니 손예진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을 정리했다.

이윽고 마음이 정해지자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엄마!”

“응.”

“보증이 뭐에요?”

“보증?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어?”

“어디서 들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아요. 아마 아빠가 고향친구한테 보증을 서준다고 하는 말을 얼핏 들은 것 같아요.”

“고향친구? 혹시 한가한이라고 안하디?”

“맞아요. 한가한이라고 한 것 같았어요.”

“뭐라고? 이이가 정말?”

그제야 손예진의 눈이 도끼자루처럼 변해갔다.

보기만 해도 스산해지는 느낌에 서진은 자신의 두 팔을 감싸 안으며 본격적으로 그녀를 충동질하기 시작했다.

“엄마, TV에서 보니까 보증을 해주면 패가망신을 당한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건 쉽게 말해서 쫄딱 망한다는 뜻이야. 집도 망하고 몸도 망하고……. 그러니까 너는 커서 절대 함부로 보증을 서주면 안 된다. 알았지?”

“네, 알겠어요. 그런데 아빠가 이미 보증을 서줬다면 우린 망한 거예요?”

“그, 그렇지.”

“그럼 보증을 서주고 말고도 할 게 없겠네요. 이미 우리 집은 쫄딱 망한 거니까요.”

“으헥! 얘기가 어떻게 그렇게 되는 거지? 음, 어쨌든 집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절대로 가만히 놔두지 않겠어.”

손예진은 서진이 옆에서 살살 부추기자 거의 헐크로 변신하는 것처럼 전투력이 쑥쑥 올라갔다. 한참을 그렇게 전투의욕을 불태우며 칼을 갈고 있자 드디어 이만수가 퇴근해 집으로 돌아왔다.

“여보, 나왔어.”

“어머, 오늘 웬일이세요? 이렇게 초저녁에 다 들어오시고…….”

손예진은 일단 이만수에게 친절모드로 나갔다.

“일이 좀 생겨서 바로 또 나가봐야해.”

“그럼 그렇지. 누구 만나러 가세요?”

“응, 긴히 만나서 의논할 사람이 있어.”

“누구요? 혹시 고향친구라도 만나세요?”

“어? 맞아. 당신 그걸 어떻게 알았어?”

“고향친구 만나서 뭐하실 건데요?”

“뭐하긴 뭐해? 그냥 술이나 한잔 하면서 얘기를 나누는 거지.”

“그럼 괜히 돈 써가면서 밖에서 만나지 말고 그냥 집에서 만나세요. 나도 간만에 같이 술 좀 얻어먹게.”

“그, 그래? 알았어. 잠깐만, 금세 전화해서 집으로 오라고 할게.”

손예진은 이만수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이렇게 순순히 집으로 들어올 사람이 아닌데…….’

이만수는 친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다.

주변에서 괜히 그를 호인(好人)이라고 부르면서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한때는 그런 점 때문에 호감을 가졌고 눈이 맞아 결혼까지 했으니 남편의 이런 성격은 누구보다 그녀가 더 잘 알았다.

보통 이렇게 얘기를 하면 남편은 한쪽 귀로 흘려들으면서 도망치듯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예사였다. 그리고는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새벽에나 들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남편은 고향친구보고 집으로 오라고 직접 전화까지 걸고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일어난 셈이다.

손예진은 자신의 눈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전혀 믿겨지지 않았다.

“정말 웬일이에요? 집에서 술을 다 마시겠다고 하고.”

“사실은 술을 마시려고 만나는 것이 아니야. 고향친구가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해서 집으로 오라고 한 거야.”

이만수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모든 사실을 숨김없이 이실직고했다.

손예진은 바뀐 남편의 행동으로 인해 뭔가 믿음직스럽고 든든해진 기분이 들었다.

“보증이요?”

“그래.”

“정말 당신 고향친구 보증서주려고 그래요?”

“아니. 내가 미쳤어. 난 무조건 거절할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내 옆에 딱 붙어서 나를 좀 도와줘! 알았지.”

“네, 알겠어요.”

손예진은 나름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는 이만수의 말에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들어오기만 하면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고 한 것 같았는데 어째 지금은 완전히 남편과 찰떡처럼 하나로 붙어버렸다.

서진은 예상외의 진행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이만수와 손예진이 하나가 되어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이런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오래전부터 그리고 싶었던 그림이었다.

“아버지가 쉽게 보증을 서주지는 않겠군.”

-마스터, 이만수님의 몸의 반응을 살펴보니 진심입니다. 그리고 제가 절대로 사기꾼 한가한에게 보증을 서지 않도록 이만수님을 옆에서 단단히 코치하겠습니다.

“그래. 메딕! 잘 부탁한다.”

-네, 믿고 맡겨주세요.

어떻게 하다 보니 자신의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만 주로 시켰다. 그런데도 메딕은 전혀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고 자신의 말을 충성스럽게 잘 따라주고 있었다. 그런 메딕이 서진은 참 든든하게 느껴졌다.

띵동!

철컹!

초인종이 울리고 문이 열렸다.

여전히 기생오라비같이 뺀질뺀질한 한가한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어서 오게.”

“집으로 초대해줘서 고마워. 제수씨, 오랜 말입니다.”

한가한은 이만수와 악수를 하고는 손예진에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저 한가한씨 제수 아니에요. 앞으로 형수님이라고 부르세요.”

“네?”

“우리 남편보다 나이 어리신 거 다 알아요.”

“네에? 그거 호적이 잘못돼서 그런 겁니다.”

“원래 남자들 나이속이는 거 예사잖아요. 그리고 영미한테는 누님이라고 부르신다면서요.”

“아, 그, 그게…….”

영미는 손예진과 동갑인 이만수의 고향친구로 한가한은 그녀에게 깍듯이 누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가한은 처음으로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친절하고 착하기만 했던 손예진이 오늘은 아예 처음부터 빠져나갈 구멍도 주지 않고 날카롭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이리로 앉아.”

“응, 고마워.”

이만수는 일단 그를 소파에 앉혔다.

한가한이 소파에 앉아 교활한 눈빛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하자 오히려 이만수가 먼저 말문을 텄다.

“가한아, 차 뭐로 마실래?”

“차? 술상 안 봤어?”

한가한은 이만수가 술상은 안보고 차를 준다고 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내가 요즘 위가 안 좋아서 약을 먹고 있거든. 당분간 술을 못 마시게 됐어.”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커피로 마실게.”

“여보! 여기 커피 세잔 부탁해.”

“네, 금방 나가요.”

커피 세잔이란 말에 한가한은 또다시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손예진이 같이 와서 앉겠다는 공식적인 선언이라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증을 서주는 것에 대해 남자보다는 여자가 훨씬 부정적이다. 아니 단순히 부정적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손예진은 커피 세잔을 타왔고 이만수의 옆에 떡 하니 앉아 같이 커피를 마셨다.

호르륵 호르륵 호르륵!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집안의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어갔다.

한가한은 오늘 뭔가 일이 요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고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자 한가한은 슬슬 운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이만수의 질문이 먼저 나왔다.

“그동안 코배기도 안보이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날 다 찾아왔어?”

“아까 내가 전화로 말했잖아. 급한 일이 있어서 보증 좀 서달라고.”

“내가 왜?”

“응? 아니 왜라니? 친구가 어려움에 처했는데 그럼 그냥 두고 볼 거야?”

한가한은 일단 이만수의 가장 큰 약점인 친구 타령을 시작했다.

“무슨 어려움? 너 지난번에 만났을 때 나한테 잘나간다고 엄청 자랑했잖아?”

“자랑은 무슨, 사실 오늘도 그것 때문에 왔어.”

“잘나간다고 자랑하러 왔다고?”

“아니. 오늘 너 왜 이렇게 삐딱하냐?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그럼 무슨 말을 했는데?”

한가한은 이만수가 뭔가를 잘못 처먹었는지 자꾸 삐딱선을 타자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옆에 손예진도 떡하니 앉아있으니 말이다.

한가한은 입술에 혀로 침을 한번 바른 후에 빠른 어투로 말했다.

“실은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근대건설로부터 50억짜리 공사를 하나 땄는데 신형 중장비가 필요하다고 해서 수입을 했어.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용도에서 딱 2억이 모자라는 거야. 내가 지금 너한테 돈을 빌려달라는 것이 아니야. 그냥 모자란 신용도만큼만 보증을 서달라는 거야. 이번 건만 잘 끝나면 순이익이 한 10억 정도 떨어지거든. 그럼 내가 보증 서준 대가로 너한테 5천 줄게. 어때 괜찮지?”

서진은 방문을 살짝 열고 한가한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역시 사기꾼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한가한이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정말 모든 것이 그가 얘기한데로 다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사실 보증 한번 서주고 5천만 원을 준다는 말에 혹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2억 원을 날릴 가능성이 있다는 위험성을 간과하도록 수작을 잘 부려야하지만 말이다.

“으음.”

이만수는 속으로 갈등했다.

이미 뻔히 사기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귀가 얇아서 남의 말을 잘 듣는다고 어르신에게 엄청 구박을 받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의 귀는 그냥 일반 귀가 아니었다.

초대형 대자 팔랑 귀였다.

-이놈아, 내말 맞지. 아직도 넌 속으로 갈등을 때리고 있지. 에라! 이 속없는 놈아. 저놈이 하는 말은 다 거짓이다. 한가한이 사장으로 있는 ‘가인건설’은 이미 1차 부도가 난 상태다. 아마 내일 중으로 2차 부도가 나서 최종부도처리 될 게다. 근대건설 같은 대기업이 미쳤다고 1차 부도를 낸 가인건설에 공사를 발주해주겠냐? 저놈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거짓말이다. 정 내말을 못 믿겠거든 보증을 서달라는 서류 좀 보여 달라고 해봐라.

이만수는 어르신의 말씀에 이를 꽉 깨물었다.

“일단 보증서류 좀 보자.”

“여보!”

“여기 있다.”

손예진이 놀라서 소리를 쳤다.

갑자기 남편의 태도가 돌변해서 마치 당장 보증을 서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한가한은 이만수의 요구에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누런 봉투를 하나 꺼내서 앞으로 내밀었다.

“당신도 이리 와서 같이 살펴보자.”

“네.”

손예진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이만수의 옆에 딱 달라붙었다.

============================ 작품 후기 ============================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고맙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