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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 악연을 끊자.
“엄마, 어떻게 됐어요?”
“다 잘 됐어.”
“네?”
서진은 손예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히 오늘 무슨 사단이 날 줄 알고 있었는데 아무 일이 없이 지나가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들, 그렇게 눈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볼 것 없어. 정미희 원장선생님이 스타유치원 곳곳에 설치한 CCTV의 녹화화면을 보여주셨고 장독대의 어머니가 그걸 보고 깨끗하게 사과했어.”
“스타유치원 곳곳에 설치한 CCTV요?”
“그래. 너 네가 다니는 스타유치원을 너무 만만하게 본 거 아니니. 그래도 명색이 서초동에 있는 유치원인데…….”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서진은 손예진을 통해 스타유치원 곳곳에 보이지 않는 CCTV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마이키나 메딕이 그런 사실을 일체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일단 어머니 손예진을 마중하고 나서 자신의 교실로 돌아왔다.
“마이키, 메딕, 어떻게 된 거야? 왜 내게 스타유치원 곳곳에 눈에 보이지 않는 CCTV가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어?”
-이서진님은 물어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마스터,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좀 더 능동적으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서진은 마이키의 말에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이 그런 것을 물어본 적이 없다는 말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메딕의 사과와 반성의 말을 듣자 조금은 그 화가 풀려갔다.
“그래 이번 일은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 같아. 하지만 너희 둘 모두 잘한 것도 아니야. 특히 마이키는 충분히 내가 CCTV 화면을 구해서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하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에게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어. 이건 앞으로 내게 큰 위협이 될 수 있어. 모든 사고의 발단은 아주 작은 틈에서 시작되는 거잖아.
-알겠습니다. 앞으로 조금 더 적극적이고 세심하게 정보를 규합하고 위험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마스터. 잘못을 절실히 깨닫고 있어요. 앞으로는 스타유치원에 설치되어 있는 CCTV 까지 활용해서 마스터를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한다.”
이 세상에 완벽이란 없다.
아무리 미래에서 가져온 인공지능나노양자슈퍼컴이라고 해도 분명히 틈이 있고 한계가 있다.
마이키는 서진이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자신의 능력에 제한(lock)을 걸어 버렸고, 메딕은 아무리 업그레이드한다고 해도 결국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을 관리하는 인공지능이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서진은 앞으로 마이키와 메딕에게 의존하는 태도를 버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 주도적으로 나서야겠다고 결심했다.
“씨익, 씨익, 씨익…….”
반대편에서 씩씩대며 걸어오는 장독대의 모습이 보였다.
뭐가 그리도 억울한지 그는 두 주먹을 꼭 쥐고는 혼자 쌍욕을 해대며 열을 내고 있었다. 그러다 서진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아마도 원장실에서 어머니 송아리에게 단단히 야단을 맞은 모양이었다.
문제는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고 그 원망을 온전히 서진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점이다. 확실히 어딘가 단단히 삐뚤어진 아이였다.
‘하아, 이거 참 피곤한 꼬맹이네.’
서진은 장독대가 전혀 반성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장독대의 어머니 송아리가 서진의 어머니 손예진에게 사과를 하고 일을 마무리 한 것은 좀 미진한 감이 있었다.
서진이 원한 것은 송아리가 손예진에게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장독대가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독대는 전혀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내버려두면 조만간 이 악동이 더 큰 사단을 몰고 올 것만 같았다.
‘잡초를 뽑으려면 뿌리째 뽑으라는 말이 있지. 어중간하게 일을 처리하면 꼭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겨. 역시 말을 안 듣는 애새끼한테는 사랑의 매를 들어야해.’
서진은 그렇게 단단히 마음을 먹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장독대도 그의 뒤를 따라 교실로 들어갔다.
“어머, 우리 서진이와 독대가 돌아왔구나. 어디 한번 안아보자.”
김사랑 선생은 서진과 장독대를 보자 한 번씩 꼭 안아주면서 애정을 과시했다.
따뜻하고 물컹거리는 감촉이 얼굴 전체에 전해지자 서진은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헤실 거렸다.
“다음은 영어시간이에요. 우리 친구들 미국에서 온 원어민 선생님과 함께 즐거운 영어공부를 해보기로 해요.”
“네.”
김사랑의 말에 아이들은 병아리새끼처럼 빽빽대며 대답을 했다.
그녀가 잠시 밖으로 나가자 보조교사 이소망과 박믿음이 아이들을 돌보며 영어공부를 할 준비를 시켰다.
서진은 그 틈에 자신의 입을 살짝 가리고 마이키와 메딕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장독대, 저 녀석을 가만히 둬서는 안 되겠어.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겠다.”
-이서진님,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마스터, 무슨 좋은 계획이라도 있으세요?
“일단 포션 몇 방울을 떨어뜨린 생수 한 병을 준비해줘! 그리고 스타유치원에 CCTV의 사각지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 외부에서 절대로 찍을 수 없는 곳으로 말이야.
-그러죠.
-네, 알겠습니다.
서진은 장독대를 향해 특유의 썩소를 날려줬다.
장독대는 그 모습을 보자 더욱 화가 나는지 눈을 부라리더니 주먹감자를 들어올렸다.
‘꼬맹이가 진짜 버릇이 없네.’
서진은 일단 장독대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를 손봐주는 것은 식사를 하고 난 이후, 낮잠을 자는 시간을 이용하면 충분했다.
서진은 그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유치원생활을 알차게 보낼 수 있는지 고민했다.
그냥 무턱대고 이렇게 허송세월을 하는 것보다 뭔가 하나라도 배워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고 싶었다.
‘그림을 그려볼까? 아니면 노래를 불러볼까? 악기를 배우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몸이 어려져서 그런지 뭐든지 해보고 싶은 의욕이 충만했다. 아니 정말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그림이던 노래건 악기건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타유치원의 선생님들은 이런 것을 잘 가르쳐줄 재능과 실력도 충분히 있었다.
“Hello!(헬로우!)”
“Hello!(헬로우!)”
갑자기 누군가 혀에 버터를 바른 것처럼 매끈한 소리를 내자 아이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을 했다. 이 모습 하나만 봐도 얼마나 강남의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조기영어교육을 받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서진만 유일하게 그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몇 개를 원어민 수준으로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I’m Mike. How are you doing?(나는 마이크야. 너희는 잘 지내고 있니?)”
“I’m OK. Thank you.(전 좋아요. 고마워요.)”
샛별반에 영어를 가르치러 온 마이크는 백인 특유의 하얀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을 향해 영어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마이크가 영어로 질문을 하는 것을 알아듣고는 더듬거리며 꼬박꼬박 대답했다.
그중에서도 발군은 유소라와 박소정이었다. 두 녀석은 어디 미국에서라도 살다온 것처럼 잘 꼬부라진 발음으로 유창한 영어실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헐! 꼬맹이들의 영어실력이 보통이 아니네.’
서진은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이들이 영어를 알아듣고 영어로 대답을 하면 보통 우리나라 부모들은 손뼉을 치며 크게 놀라워한다. 자신의 아이가 뭔가 특별하거나 대단하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 당연히 영어를 배운다. 이건 절대 놀라운 능력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이 적게는 수년, 많게는 십 수 년 동안 영어 때문에 골머리를 알아서 그런지 그 한(恨)을 자식들을 통해 풀고,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은 욕망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서진은 이제 겨우 다섯 살이 된 아이들이 아직 자기나라의 언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면서 그저 영어로만 쏼라쏼라 떠들어대는 모습이 영 마뜩치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좀 역겹기까지 했다.
과거에는 중국에 사대를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에 복종하고, 6.25 전후에는 미국을 동경하는, 이 나라 이 민족의 태도가 참 자주(自主)와는 거리가 멀고 줏대가 없어보였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냐마는, 이렇게 핏덩이 때부터 영어를 가르쳐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심어주니까 대격변 이후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사회지도층이라는 것들이 제일 먼저 비행기를 타고 미국과 유럽으로 도망친 것이 아닌가 말이다.
‘왜 우리나라의 교육부(문교부)는 협력과 이해, 상생과 화합을 가르치지 않고 경쟁과 출세를 가르쳐 황금만능주의와 이기주의를 부추길까? 왜 자국의 언어와 역사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서양의 시각으로 오염된 거짓말투성이의 세계관을 심어주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교육부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청와대, 정부, 국회, 법원, 재벌, 대기업, 언론, 국방부…….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층과 국민 전반에 걸친 산적한 문제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은 더 이상 영어만 죽어라 파서는 안 된다.
나라 전체가 영어를 잘해서 뭐에 쓴단 말인가? 우리가 영연방에 들어갈 것도 아닌데…….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만 있어도 충분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기초과학을 포함한 과학, 수학, 기술, 문화, 예술 등에 집중해야한다.
쓸데없이 전 국민이 영어만 들이파대니까 정작 미래에는 먹거리가 없어서 국가경쟁력이 떨어지고 개발도상국으로 퇴보를 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서진은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미래를 생각하면 분명 자신도 뭔가 하긴 해야 하는데 그에겐 대한민국을 변화시킬 힘도 대격변시대에 나라를 구할 능력도 없었다.
‘당장 내가 뭘 할 수 있는 것이 없네. 돈이나 왕창 벌어야하나?’
살짝 의기소침해지려는 찰나 서진 앞으로 마이크가 다가왔다.
“Hey! what’s your name?(얘! 이름이 뭐니?)”
서진은 마이크의 뺀질거리는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퉁명스런 말투로 대답했다.
“I’m SeoJin.(난 서진이에요.)”
“Please pay attention!(집중해줘!)”
“Please leave me alone.(나 그냥 내버려둬요.)”
서진은 안 그래도 짜증이 난 상태인데 자꾸 마이크가 말을 시키자 짜증이 났다.
그렇지만 마이크도 일단은 선생님이라 막나가지는 않으려고 노력했다.
“Don’t you wanna study English?(영어 배우고 싶지 않니?)”
“No, I don’t. especially with your Portuguese accent.(배우고 싶지 않아요. 특히 당신의 그 포르투갈 악센트는요.)”
“Oh, my God!(맙소사!)”
하지만 마이크는 서진의 까칠한 말투에 놀라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미국, 어머니가 포르투갈 출신이라서 알게 모르게 영어로 대화할 때 살짝 포르투갈 악센트가 있었는데 서진이 그걸 귀신같이 알아듣고는 지적한 것이다.
마이크는 침을 한번 꿀떡 삼키고는 그대로 칠판 앞으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다시 열심히 영어를 가르쳤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서진을 향해 시선을 두지 않았다. 괜히 서진과 말을 섞었다간 자신의 멘탈이 부서지고 뭔가 영혼까지 탈탈 털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덕분에 서진은 영어시간만 되면 조용히 혼자 사색에 빠질 수 있게 돼서 참 좋았다.
터벅 터벅 터벅!
점심시간이 지나고 낮잠을 자는 시간이 오자 서진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스타유치원의 본관 건물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마이키와 메딕을 통해 확인한, 스타유치원 안에서 그 어떤 CCTV에도 찍히지 않는 유일한 카메라안전지대였다.
“따라오고 있어?”
-네, 마스터. 장독대가 미끼를 물었습니다. 10m 뒤에서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손에 짱돌이 하나 쥐어져 있습니다.
“허어, 날 짱돌로 찍어버리겠다는 생각이군.”
-안타깝지만 그럴 가능성이 90% 이상입니다.
메딕의 말에 서진은 더 이상 장독대를 응징하는 일에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기로 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유치원생 주제에 학우가 마음에 안 든다고 짱돌로 뒤통수를 찍어버릴 생각을 하는 놈이 절대 정상일리 없었다.
서진은 그런 놈에게 베풀 자비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도도도도도도!
서진이 뻔히 알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장독대가 서진을 향해 달려왔다. 그는 짱돌을 쥔 오른손을 위로 치켜들더니 서진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하는 행동이 거침없고 능숙한 게 벌써 동네 애들 뒤통수 여럿 깨뜨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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