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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 벌써 1년
‘흐음, 이제는 정말 더 이상 할 짓이 없네.’
하지만 당사자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다.
스타유치원 짱 먹기, 선생님 기죽이기, 영어선생 영어로 울리기, 시험만점받기, 각종 대회 나가서 상타오기 등등
유치원에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목표를 다 이루자 또다시 갑갑함과 지루함이 해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는 의자 위에 책상다리를 틀고 앉아 앞으로 뭘 하고 지낼지 눈을 감고 생각해봤다.
“서진아, 같이 놀자.”
“아니야. 서진이는 나하고 놀 거야.”
“무슨 소리야? 서진이는 내 짝꿍이야. 저리가.”
이제는 유소라를 비롯한 될성부를 예쁘고 귀여운 떡잎들이 서진의 진가를 알아보고는 그의 앞에 모여 연신 자신을 봐달라고 시위를 하고 있다.
그런 아이들을 향해 박소정의 따끔한 잔소리 공격이 터져 나왔다.
“너희들, 서진이가 혼자 생각하고 있을 때 시끄럽게 굴면 무지 싫어하는 거 몰라서 그래?”
“아차차, 맞다.”
“쉬쉬! 쉬쉬!”
“우리 모두 조용히 하자.”
서진은 서로서로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는 쉬쉬거리는 꼬맹이들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박소정이 자신의 임무를 잘 완수했군. 집에 갈 때 선물을 줘야지.’
띠리링 띠리리리링 띠띠디리리리잉!
경쾌한 리듬의 맑은 종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다.
스타유치원의 모든 수업이 끝났다는 신호다.
서진은 번쩍 눈을 뜨고는 번개같이 자신의 가방을 챙겨 밖으로 튀어나왔다.
박소정이 귀신 같이 미리알고 그의 뒤를 따라 나왔다.
“소정아, 선물이다.”
“어, 고마워.”
박소정은 교실 문 앞에서 서진이가 선물을 주자 몸을 비비꼬며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서진이 손바닥 위에 있던 왕사탕은 어느새 그녀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 모습에 서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쿨(cool) 하게 몸을 돌려 건물 밖으로 나왔다.
“서진아! 여기야!”
“엄마!”
밖으로 나와 보니 손예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진은 그녀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다.
이제 이런 짓은 좀 그만하고 싶은데……
아직은 손예진이 너무 좋아하니 어쩔 수가 없다.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 뜻에서, 안 해주면 바로 삐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닭살행위를 당분간은 계속 이어나가야한다.
“서진아, 빠이빠이(bye bye)!”
“응, 빠이(bye).”
“월요일 날 보자.”
“그래.”
장독대가 송아리의 한손을 잡고는 아쉬운 표정으로 서진을 향해 마구 손을 흔들었다.
어째 가면 갈수록 서진바라기가 되어 가는 장독대였다.
‘혹시 저놈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 아냐? 왜 저렇게 나를 쫒아 다니지? 가만 그렇다면 난 범죄자가 되는 셈인가?’
서진은 슬쩍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서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버렸다.
자신의 명령으로 메딕이 지속적인 암시와 교육을 시켜놓은 게 이렇게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는 부작용을 낳았다는 것을 서진은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송아리가 손예진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손예진도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한손을 들고 흔들었다.
둘은 이제 같은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엄마로써 서로 친밀감을 가지고 나름 교감을 하는 사이가 됐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변한 것은 단지 서진만이 아니다.
장독대야말로 스타유치원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 장본인이다.
‘참 어지간히도 속을 썩이던 놈이 이제는 나를 징그럽게 쳐다보네.’
서진은 장독대를 향해 억지로 한번 미소를 날려주곤 바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손예진도 서진을 따라 몸을 돌리고 걸었다.
“서진아, 우리 왕만두 먹으러 갈까?”
“좋아요.”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여전히 서진과 손예진은 시장에서 파는 음식을 좋아한다.
둘은 새로 생긴 왕만두 집으로 가서 왕만두와 찐빵을 잔뜩 시켜놓고 신나게 배를 채웠다.
“내일 주말인데 우리 놀러갈까?”
“어디로요?”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좋아요. 그런데 아빠한테는 물어봤어요?”
“아니 아직 안 물어봤어.”
“그럼 먼저 물어보고 결정하세요. 요새 아빠가 운동에 꽂혀서 한강공원으로 운동가자고 할지 몰라요.”
손예진은 왕만두를 열심히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내가 그걸 깜빡했네. 아니 그런데 자기가 언제부터 운동했다고 저렇게 열심이야?”
“왜요? 싫으세요? 난 아빠가 운동하니까 좋던데…… 힘도 세지고 배에 왕(王)자도 보이고요.”
“하긴 네 아빠 복근이 예술이긴 하지.”
“그걸 바로 초콜릿 복근이라고 부른데요.”
“그래? 그거 나쁘지 않네.”
손예진은 서진의 말에 은근히 미소를 지었다.
실은 남편의 내적인 변화와 외적인 변화가 모두 마음에 들었다.
한 1년 전쯤이었던가?
사기꾼 한가한이 찾아와 보증을 서달라는 것을 내쫓아낸 뒤, 남편의 극적인 변화는 시작됐다.
뭔가 큰 결심이라도 했는지 매일 미친 듯이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몸에 근육이 붙고 건강해졌다.
물론 그에 비례해 정력도 크게 증가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남편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자신이 퍼져버리기 일쑤였다.
덕분에 이제 자신도 일주일에 삼일은 꼭 남편과 같이 운동을 하러 다녀서 처녀 때의 몸과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자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변하고 매사에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십장생건축회사에서 배관공으로 일하던 남편은 매일 저녁 두 시간씩 꾸준히 공부를 하는 것 같더니 어느 날 건축배관공이 됐다고 기뻐했다.
처음에는 회사 나가는 것을 무진장 싫어하더니 이제는 회사에서도 나름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됐다고 자랑을 해댄다.
요새는 또 미리 독립을 준비한다며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데, 매일 밤 뭔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자료조사에도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엄마, 무슨 생각해?”
“그냥 아빠한테 뭐라고 말할까 생각해봤어.”
손예진은 서진을 보며 행복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서진은 미소짓는 엄마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니 엄마가 참 예뻐졌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었다.
인간개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아버지 이만수를 따라 덩달아 운동을 시작한 손예진은, 서진이 미래에서 가져온 포션과 눈에 보이지 않는 메딕의 도움을 받아 주름살 하나 없는 뽀얀 얼굴에 탄탄한 S라인 몸매로 거듭나있었다.
‘어머니, 이게 다 잘난 아들을 둔 덕분입니다.’
서진은 마음속으로 손예진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손예진은 서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 채 가만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고 똑똑하고 건강한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금쪽같은 사랑스런 아들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서진의 행복을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다.
서진은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에 마치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사랑을 만끽했다.
그때였다.
왕만두집 유리창 사이로 어디서 많이 본 남자가 휙 지나갔다.
‘어? 저게 누구지? 양정도 아냐? 흐음,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양정도가 나타나서 우리 집과 자투리땅을 팔라고 부추길 때가 됐군.’
사기꾼 한가한을 쫓아낸 이후, 벌써 1년이 지나갔다.
그동안 아버지 이만수에게 돈 좀 빌려달라고 오거나 보증을 서달라는 잔챙이 사기꾼들이 여럿 찾아왔다.
그중에는 쉽게 거절하기 힘든 친척들도 있어서 이만수는 몇 번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마이키와 메딕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실상을 파악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돈이 필요하면 자기 집이나 전답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달라거나 빚보증을 서달라고 하는 것은 정말 도둑놈 심보가 아닐 수 없다.
이제는 뚜쟁이 양정도 차례였다.
‘이놈을 어떻게 작살내야 잘했다는 소리를 듣지?’
서진은 일단 양정도와 집주변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손예진이 왕만두 집에서 나오며 계산을 마치고 서진의 손을 잡았다.
모자는 오순도순 정다운 얘기를 나누며 길을 걸어갔다.
집으로 돌아온 서진은 양치질을 하고 샤워를 했다.
그리고 엄마의 따뜻한 품속에서 한숨 푹 잘 잤다.
저녁을 준비하는 손예진의 모습을 확인하고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서진은 마이키와 메딕을 불러냈다.
“마이키, 메딕!”
-네. 이서진님.
-예, 마스터.
마이키와 메딕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왕만두 집에서 양정도를 봤다.”
-네, 알고 있습니다.
-드디어 양정도가 나타났군요.
마이키는 서진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 양정도에 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메딕은 그의 말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메딕, 그의 근황은 어때?”
-양정도는 나노로봇이나 메디봇을 주입하지 않아 24시간 밀착감시가 불가능합니다. 대신 그가 살고 있는 집과 활동반경에 있는 CCTV를 이용해 감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태림산업의 한 과장과 만나 술을 마신 것 외에는 특이사항이 없습니다.
“태림산업? 그거 대기업 아냐? 시가총액이 2조가 넘는 건설회사인데……. 양정도 같은 백수가 태림산업의 과장과 술을 마셨다면 그건 확실히 특이사항이지.”
-그렇군요.
메딕은 얌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진은 곰곰이 생각을 해보다 마이키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마이키, 뭣 좀 물어보자.”
-네, 말씀하십시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자투리땅을 누가 인수하게 되지?”
-태성건설, 태림산업 그리고 사성물산입니다.
“혹시 세 회사 간에 무슨 연관관계가 있어?”
-없습니다. 세 회사는 전혀 별개의 회사들입니다.
세 회사가 서로 연관이 없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자투리땅을 어떻게 처리해야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을까?”
-태성건설, 태림산업, 사성물산 모두 2005년도에 각각 아파트를 준공하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2002년 3월 8일 금요일 현재, 건설사에 제값을 받고 파는 것이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건설사들이 아버지의 자투리땅을 싼 값에 가지려고 수작을 부리진 않을까?”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만수님이 소유하고 계신 땅을 웃돈을 좀 주더라도 빨리 사서 아파트를 짓는 것이 건설사에게는 더 큰 이익이 됩니다. 아파트를 짓는 건설사의 입장에서 보면 그 정도 돈은 푼돈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루라도 공기를 단축시키는 것이 훨씬 그런 돈보다 훨씬 이득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마이키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왜 과거에는 아버지가 건설사에 땅을 팔지 않고 양정도에게 팔았을까?
서진은 이 부분이 이상했다.
아무래도 양정도와 태림산업의 과장, 둘이 뭔가 못된 짓을 벌인 것이 아닐까싶었다.
“태림산업의 과장 이름이 뭐지?”
-박수일입니다.
“그럼 지금 이 순간부터 태림산업 박수일 과장과 양정도를 24시간 감시하도록 해.”
-나노로봇을 심을까요?
“나노로봇을 심던, 메디봇을 심던 알아서해.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알아내는 거야.”
-네, 이서진님.
-네, 마스터.
마스터와 메딕이 동시에 대답을 했다.
이미 양정도의 소재는 파악된 상태라 마이키가 직접 움직여 나노로봇을 심기로 했다.
창문을 살짝 열어주자 마이키가 휙하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메딕, 그런데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의 머리 부분에 들어가 있는 것은 뭐야? 그냥 인형이야?”
-아닙니다. 안드로이드 머리(head)입니다.
“혹시 그것도 마이키나 메딕처럼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나?”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나 마이키 정도의 인공지능나노양자슈퍼컴은 아니고 시키는 일을 어느 정도 능동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비서나 호위 임무를 맡길 순 없는 거야?”
-호위는 문제가 없고 비서는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기느냐에 따라서 가부가 결정됩니다. 운전을 하고, 물건을 전해주고, 전화를 받는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으음.”
서진은 팔짱을 끼고 잠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오 박사는 서진이 과거로 회귀하지 못하고 엉뚱한 데로 떨어지게 될 때를 대비해 안드로이드 전투로봇 하나를 캡슐에 담아줬다.
머리와 척추를 분리할 수 있게 만든 이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은 오로지 서진만을 위해 만든 오 박사의 선물이자 회심의 역작이었다.
그동안은 쓸데가 없어서 블루볼 안에 넣어뒀지만 서진이 점차 성장하자 이제는 슬슬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위해 일을 해줄 사람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그래서 지금 서진은 이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을 자신의 비서 겸 호위로 써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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