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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 벌써 1년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을 지금부터 가동하면 얼마나 쓸 수 있지.”
-마수와 전투만 벌이지 않는다면 앞으로 20년은 쓸 수 있습니다.
마수와 전투를 시키면 당장 일주일도 못쓰고 폐기처분할 수도 있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반대로 마수와 전투를 하지 않는다면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의 수명은 20년이 된다는 말이다.
서진은 메딕의 말을 그렇게 이해했다.
“아무래도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을 내 호위 겸 비서로 써야겠어. 메딕! 지금부터 준비해서 가동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은 지금 당장이라도 가동할 수 있습니다. 다만 현대에 맞는 언어를 구사하고 자연스런 행동을 하려면 최소한 1주일은 주셔야 합니다.
“그럼 일단 가동하는 것으로 하고 필요한 게 뭔지 알아봐.”
-네,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런데 캡슐은 어디에다 놓을까요? 그리고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은 어디서 지내게 하죠?
“음, 그러고 보니 걸리는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군.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을 위해 새로운 신분증도 만들어야 하고 집 근처에 머물 곳도 구해야 하잖아.”
-마이키가 돌아오면 같이 의논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보다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의 이름과 국적을 먼저 정해주십시오.
“이름은 로이(Roy)가 좋겠어. 성은 마루3호의 업그레이드 형이니까 마루(하늘이라는 뜻의 순우리말)를 영어로 해서 헤븐(Heaven)으로 하자.”
-로이(Roy) 헤븐(Heaven). 멋지네요. 그럼 국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로이의 피부가 하얗고 생김새가 백인을 닮았으니 미국이나 영국, 또는 캐나다 정도면 좋을 것 같아.”
-그럼 그렇게 작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메딕, 우리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지?
-6억5천만 원입니다. 블루볼에 들어있던 100만 달러 중 50만 달러를 지난 1년 동안 이만수님을 통해 원()으로 바꿔놓은 것입니다.
“아참, 우리 아버지는 현금을 얼마나 가지고 계시지?”
-3억 원입니다. 원래 이만수님이 가지고 계시던 3000만원을 주식투자를 통해 불려드린 것입니다.
“호오, 우리 아버지 이제 부자네. 현금을 3억 원이나 가지고 계시고.”
-10억 원으로 불려드릴 수도 있었지만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돈을 벌게 되면 타락하게 될까봐 제가 적당히 조절했습니다.
서진은 메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메딕의 말이 백번 옳다.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보통 인간은 그 돈을 주체하지 못한다.
거액의 로또를 맞은 사람들이 대부분 불행해졌다는 통계가 나온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쨌든 최근에 보이는 아버지의 자신만만한 모습은 이렇게 든든한 현금이 뒷받침해줘서 그런 게 아닌가싶다.
“메딕! 혹시 올해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알아?”
-2002 FIFA 대한민국·일본 월드컵을 말씀하시려는 것 아니에요?
“맞아. 바로 그거야. 올해는 월드컵이 열리는 해야. 2002년 월드컵 축구경기의 결과를 훤히 알고 있으니 로이를 해외로 내보내기만 하면 스포츠도박을 통해 거액을 벌어들일 수 있을 거야.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군요.
메딕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이키가 저렇게 수동적으로 나오니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라도 해서 돈을 벌어 놓아야해.”
-마스터, 제가 큰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잔뜩 주눅 든 메딕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지금도 차고 넘치도록 힘이 되어주고 있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런 소리 하지 마.”
-마스터,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메딕, 난 능력이 부족해서 대격변 시대를 주도해나갈 수 없어. 하지만 미리 돈을 많이 벌어놓는다면 아마 능력자들에게 조금은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거야.”
-마스터가 왜 능력이 없습니까? 아공간을 열 수 있는 능력은 그렇게 흔한 능력이 아닙니다.
“그래봤자 당구공 사이즈야. 그것가지고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안드로이드 전투로봇, 로이가 있고 미래의 최신형 내부장갑과 외부장갑이 있지 않습니까? 그 정도면 이미 최하급 능력자는 상회하는 능력입니다.
“그래봤자. 마수와 전투를 하다 로이가 부상을 당하면 끝이야. 우리에겐 대체할 수 있는 자원이 없단 말이야. 그렇다고 내가 마루3호처럼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안드로이드부터 개발해야겠군요.
“그럴지도 모르지.”
말이 쉽지,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을 개발하는 것은 절대 만만치 않다. 오죽하면 2025년에 들어서도 마루3호를 제외하고는 중대형마수와 맞설 수 있는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이 극소수에 불과했겠는가?
-마스터, 대격변이 시작되면 마스터에게 무작위로 새로운 능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급 이상의 능력만 되도 얼마든지 대세에 영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만약 또다시 허접한 능력이 떨어진다면 그땐 어떻게 하지? 아니면 아예 아무런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서진도 사실 이것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었다.
물론 성패는 쉽게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미래에서 가져오신 각종 초능력시드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마루3호가 된 후, 온갖 초능력시드를 다 먹어봤어. 하지만 단 한 개도 개화시킬 수 없었어.”
-그건 마스터가 머리와 척추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온전한 몸을 가지고 계시니 분명히 그때와는 다를 겁니다.
“그건 그저 가능성일 뿐이야.”
서진은 그렇게 말은 했지만 대격변이 시작되면 단 한 개라도 좋으니 초능력시드를 개화시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은 그렇게 쉽게 포기할 단계가 아닙니다. 끝까지 희망을 가지십시오.
“하하하, 메딕, 그래도 너만은 내게 용기를 내라고 조언을 하는구나. 알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다 안다고. 하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 미리 만약의 사태를 준비해 놔야하지 않겠어? 그래야 최악의 사태에 직면해도 당황하지 않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
서진은 메딕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메딕은 끝까지 서진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서진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새로운 능력을 얻거나 초능력시드를 개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욕심일지도 모른다.
다 잘 될 수도 있지만 잘 안될 수도 있다.
그래서 미리 어느 정도 위험부담을 줄여놓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격변이 시작된 후 뭔가를 준비하려면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리기 때문이다.
휘익!
마이키가 열린 창문을 통해 서진의 방안으로 들어왔다.
-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마이키, 양정도에게 나노로봇은 잘 주입했어?”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양정도는 24시간 밀착감시가 가능합니다. 그가 획책하는 음모를 발견하면 즉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그런데 마이키!”
-네, 이서진님.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을 내 호위 겸 비서로 사용하기로 했어. 이름은 로이 헤븐으로 정했다.”
-잘하셨습니다.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을 캡슐에서 썩히고 있는 것보다 이서진님의 안전을 위해 활용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래서 그러는데 로이에게 합법적인 신분을 만들어줄 수 없을까? 기왕이면 국적을 미국이나 영국으로 해줬으면 좋겠는데……. 아니면 캐나다도 좋고.”
-미래에 제 마스터가 될지 모를 이서진님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그 정도는 해드려야지요. 문제없습니다. 바로 미국국가정보국(DNI)과 국가안전보장국(NSA)의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서 새로운 미국인 신분을 만들어놓겠습니다.
“아!”
마이키는 서진의 요청을 시원하게 승낙했다.
그리고 10초도 되지 않아 자신만만한 마이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됐습니다. 일주일 이내로 미국여권과 뉴욕 운전면허증 그리고 사회보장 카드(social security card)를 받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빨리?”
-2025년 당시, 세계 최첨단기술을 집약해서 만든 인공지능나노양자슈퍼컴이 바로 저, 마이키입니다. 2002년 현재, 저에게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대격변이 오기 전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과학기술문명의 혜택은 그 누구보다도 제가 제일 많이 받게 됩니다.
“우와! 그거 뭔가 멋지고 자신감이 넘치는 말이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공지능의 성능이 뛰어나서 그런지 마이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다.
어쨌든 마이키의 협조덕택에 이제 로이는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됐다. 합법적인 신분이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어느 나라를 여행해도 문제가 없었고 성년의 나이라 서진이 원하는 여러 가지 일들도 로이를 통해서 이룰 수 있게 됐다.
서진이라는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다.
“마이키, 로이가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는 집을 구해야겠다.”
-이집과 가까운 곳에 아지트를 구하겠습니다.
“아지트?”
-네, 캡슐도 놓고 로이도 머물 수 있고 기왕이면 이서진님도 편하게 쉴 수 있는 장소를 구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언제까지 블루볼 안에 있는 물건들을 그냥 방치해 놓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아! 블루볼이 있었지.”
서진은 마이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키의 말이 옳다.
이쯤해서 아지트 하나 정도는 구해놓아야 하는 것이 맞다.
특히 아공간을 가지고 있는 블루볼은 지금 시대의 그 어떤 보물보다도 가치가 있는 완소 아이템이다.
“마이키, 혹시 주변에 아지트로 쓸 만한 장소가 있어?”
-네, 있습니다. 서초코레빌라라고 집과 가까운 곳에 아지트 후보지를 물색해놓았습니다.
“서초코레빌라?”
-3층짜리 빌라입니다. 이집 주변이 대부분 2층 이하라 그곳을 얻어 놓으면 주변을 감시하기 좋고 비상시에는 대응하거나 탈출하기도 용의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비상시 탈출까지 논하는 것은 조금 오버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대비를 안 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면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봐야겠군. 헌데 빌라라면 꽤 비쌀 텐데…….”
-현재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자금으로는 구입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전세나 월세라면 한 동 전체를 빌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빌라는 지금 모두 비어있는 거야?”
-신축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비어있습니다.
서진은 잠시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 동 전체를 빌리는 것은 무리였다. 아니 낭비였다.
“이집을 팔고 근처 아파트로 이사를 가는 것은 어떨까? 대격변 전까지는 여기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좋은 생각입니다. 대격변 전까지는 이지역의 부동산가격이 꾸준히 상승합니다. 이후 미래에 가장 안전한 지역으로 각광받게 될 서초구 내곡동과 우면동으로 이사 하시면 됩니다.
서진이 살고 있는 작고 허름한 집은 서초고교사거리를 기준으로 남동쪽에 있다. 남서쪽에 상문 고등학교가 있고 북동쪽에 서울 고등학교가 있는데 두 고등학교의 중간쯤이라고 보면 된다.
“차라리 서초코레빌라로 이사를 갈까?”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군요. 이서진님의 가족이 2층으로 이사를 가시고 3층을 따로 사서 아지트로 꾸며 놓으면 되겠네요.
“좋아. 그럼 그렇게 진행을 해보자고.”
-네.
마이키의 대답이 오늘따라 유난히 맘에 드는 서진이었다.
그렇게 이만수와 손예진은 서진의 결정에 의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사를 가게 됐다.
* * *
“여보! 너무 좋아요.”
“이사 오기를 정말 잘했네.”
손예진과 이만수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빠, 나 여기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러니? 어휴! 미안하다. 내가 정말 너를 생각해서라도 진작 이사를 왔어야 했는데…….”
이만수는 서진을 보자 괜히 미안해졌다.
그동안 작고 허름하지만 우리 땅에 지은, 우리 집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버텨왔다.
지금 생각해보니 코딱지만 한 방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서진이의 공부방도 제대로 꾸며주지 못할 허접하고 불편한 집에 불과했다.
그간 아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빠, 방이 세 개나 있어요. 화장실도 두 개나 되요.”
“정말이네. 우리 이제 아침에 전쟁 안 해도 되겠다.”
서진이 아버지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조금 오버하면서 얘기를 하자 손예진이 눈치 빠르게 금세 맞장구를 쳐줬다.
이만수는 손예진과 서진을 한꺼번에 번쩍 들고는 그렇게 소리쳤다.
“우리 앞으로 여기서 천년만년 행복하게 잘살자.”
“네, 아빠!”
“네, 여보!”
손예진과 서진은 그의 말에 어린아이처럼 큰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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