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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 벌써 1년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와아아아아!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12번째 선수라고 불렸던 국민응원단 ‘붉은악마’들의 주도로 펼쳐지는 열렬한 응원은 벌써부터 인천 축국경기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이제 어디를 가더라도 ‘대한민국’을 외치기만 저놈의 박수소리가 자동으로 나온다.
길거리를 걷는 사람도, 직장에서 일을 하는 사람도, 장난삼아 외쳐대는 소리에 박수로 절로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면 서로 즐거운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1997년 외환위기로 시작된 IMF의 고통이 전 국민을 곡소리 나게 만들고 있을 때 2002 한일 월드컵에 출전한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대표팀의 활약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새로운 희망과 꿈을 심어줬다.
“꿈★은 이루어진다.”
서진은 어린 나이에도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이 응원문구를 보며 감동에 젖었었다. 4강의 신화를 만들어낸 이 땅, 그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저 문구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경기장은 물론이고 시청 앞 광장, 길거리, 공원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새빨간 티셔츠를 입고 나와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던 시민들의 모습과 열정이 새롭기만 하다.
‘알고 보면 한민족(韓民族)만큼 흥이 있고 신명나는 민족도 없을 텐데…….’
엽전이네, 헬조선이네, 하며 스스로 민족과 나라를 비하하는 말들을 서슴없이 쏟아내기도 하지만 사실 한국인만큼 나라를 사랑하는 민족은 세계 어디를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유달리 외세의 부침이 심한 가운데, 위기 때마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는 민족의 저력을 기적처럼 보여주는 나라!
자신들이 얼마나 우수한 민족인지 모르고 스스로 과소평가를 하고 있지만 ‘한강의 기적’을 보고 세계가 깜짝 놀랐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IMF 시절 ‘금 모으기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나라를 살려보겠다고 너도나도 돌 반지를 비롯한 금붙이란 금붙이는 모조리 들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전 세계는 경악하고 말았다.
‘이렇게 나라를 사랑하는 헌신적인 민족이 만든 국가가 절대로 망할 리가 없다.’는 세계인의 생각이 보편타당한 정론으로 굳어지자 한민족은 어느새 IMF를 딛고 화려하게 다시 부활했다.
그리고 시작된 한류(韓流)의 도도한 물결!
중국과 일본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를 평정하고 중앙아시아, 중동, 중남미를 거쳐 유럽과 북미, 아프리카로 무섭게 퍼져나갔다.
생각해보면 한민족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문제는 정치가(국회), 공무원(정부), 재벌 등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해이와 부정부패다.
‘어딜 가나 대가리가 문제야. 대가리가…….’
서진은 무거워지려는 마음에 급히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버렸다. 그리고 경기에 집중했다.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응원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경기가 시작됐다.
와아아아아!
흥분한 수만의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대한민국 월드컵대표팀은 16강 진출을 위한 D조 예선에서, 6월4일 화요일 폴란드 전(戰)을 2-0 승리로 장식하고, 6월10일 월요일 미국과의 치열한 싸움에는 1-1 무승부로 비겼다.
6월14일 금요일 현재!
인천 축구경기장에서 유럽의 강호 포르투갈을 맞은 대한민국은 꼭 승리하겠다는 각오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쫙!
“아야!”
“여보! 술 좀 작작 마시고 서진이처럼 경기에 집중 좀 하세요.”
핫팬츠에 붉은 티셔츠를 과감하게 가위질해서 탱크탑을 만들어 입은 손예진이 연신 오징어땅콩에 맥주를 마셔대고 있는 남편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응, 그래야지.”
이만수는 꼬리를 확 내리고 손을 털었다.
서진은 그 모습에 킥킥대며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이만수가 아내의 통렬한 응징에 정신을 차리고 경기에 집중하자 금세 주변 분위기가 이상한 걸 느꼈다.
사내들의 묘한 시선이 자신의 옆에 있는 아내의 몸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수컷의 위기감이 발동한 그는 어깨를 쫙 펴고 아내의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몰래 아내의 몸을 훔쳐보는 놈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제야 임자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늑대 같은 녀석들이 아쉬운 마음을 접고 고개를 돌렸다.
“여보! 겉옷 좀 입어.”
“왜요? 시원하고 좋기만 한데.”
“다들 당신의 몸을 쳐다보잖아.”
“눈이 있으니까 쳐다보겠죠. 그리고 쳐다보는 게 뭐 어때서 그래요? 좀 본다고 닳지 않으니까 걱정 말고 경기나 보세요.”
손예진은 이만수의 말을 묵살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아들 서진의 제안에 말도 안 된다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막상 붉은 티로 탱크탑에 핫팬츠를 입고 물감으로 얼굴과 가슴 위에 태극기를 형상화한 그림을 그려 넣자 주변사람들의 반응이 한마디로 폭발적으로 변했다.
몰래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도 있었고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도 생겼다.
걸 그룹을 올 킬할 미모라며 엄지를 위로 척 올리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가뜩이나 광채가 나는 피부에 늘씬하면서도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드러나자 자연히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자신감이 충만해진 손예진은 이제 이런 시선을 은근히 즐길 줄 아는 미시녀가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서진이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거리응원에서 섹시한 외모로 ‘월드컵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던 미녀가 생각나서 손예진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한 덕분이었다.
와아아아아!
아쉬운 함성이 울려 퍼졌다.
부상 탓에 뒤늦게 월드컵을 출전한 이영표 선수가 시작하자마자 송종국의 패스를 받아 중거리 슛을 쐈는데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영표 선수는 이후에도 전매특허인 헛다리짚기로 측면을 돌파한 뒤 크로스를 올려주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오오! 안정환 선수도 선발 출전했군. 좋아! 아주 좋아.”
서진은 앞으로 대활약을 펼치게 될 안정환 선수를 보자 누구도 알지 못할 미래의 비밀을 혼자 음미하며 희희낙락했다.
와아아아아아!
이유를 알 수 없는 환호성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전광판을 보니 미국 대 폴란드 경기에서 시작한 지 3분 만에 폴란드의 올리사데베(Emmanuel OLISADEBE)가 선취점을 올리고, 이어 경기 5분 만에 크리샤워비치(Pawel KRYSZALOWICZ)가 두 번째 골을 집어넣었다.
승점이 같은 우리로선 골득실 부분에서 부담을 크게 줄이는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와아아아아아!
경기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우리나라가 포르투갈을 완전히 압도하는 경기를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피파 랭킹 한 자릿수의, 황금세대가 꽃을 피우는 시기에 있는 포르투갈을 만나는 것은 우리나라 대표팀의 입장에서 볼 때 무척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히딩크 감독과 코치진들은 사실 경기결과에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웬걸,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믿기지 않는 이변이 일어났다. 우리나라 월드컵대표팀이 포르투갈을 강하게 압박하며 경기를 쉽게 풀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울부짖는 사자와 같이 종횡무진 하는 설기현의 모습이 보이고 포르투갈의 간판스타 루이스 피구를 꽁꽁 틀어막은 송종국의 활약이 돋보였다.
‘이제 슬슬 주앙 핀투가 사고를 칠 때가 됐는데…….’
전반 27분, 드디어 서진이 기다리고 있던 대형사고가 터졌다.
주앙 핀투가 박지성에게 씨름기술을 연상시키는 무리한 태클을 건 것이다.
주심 산체스 앙헬(SANCHEZ Angel, ARG)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레드카드를 뽑아들었다.
와아아아아아!
경기장을 진동시키는 커다란 함성이 일어났다.
가뜩이나 압도당한 상태의 포르투갈 선수들은 주앙 핀투의 퇴장으로 10명이 뛰게 되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나름 뛰어난 위기관리능력을 보여주며 힘겨운 시간을 이어갔다.
주심의 휘슬과 함께 전반전이 끝났다.
하프타임(half time) 15분이 찾아오자 손예진은 준비해온 가방을 개방했다.
보온을 잘해놓아서 그런지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제 프라이드치킨이 그 요염한 속살을 드러냈다.
이만수는 침을 삼키며 다시 맥주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서진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치맥이다.”
“서진아, 네가 왜 나보다 더 좋아하냐? 마시지도 못할 놈이.”
“그러게요.”
“닭다리나 뜯어라.”
“네.”
서진은 입맛을 다시며 손예진이 건네주는 닭다리 하나를 손에 잡고 거칠게 물어뜯었다.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셨으면 참 좋겠구먼.’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다.
이만수나 손예진이 머리에 총을 맞지 않는 이상 절대 서진이 맥주를 마시는 것을 허락해줄리 없었다.
서진은 닭다리를 뜯으며 작게 소곤거렸다.
“베팅은 어떻게 되고 가고 있어?
-로이가 영국의 베팅 숍을 돌면서 베팅을 잘 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푼돈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오늘 대한민국과 포르투갈의 경기가 배당률이 높아 짭짤한 재미를 볼 것 같습니다.
마이키의 말에 서진도 동감했다.
누가 대한민국이 포르투갈을 이길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특히 유럽 쪽은 대부분 포르투갈이 대한민국에 압승을 거둘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덕분에 대한민국의 승리에 돈을 건 사람들이 이번에 대박을 맞게 될 것이다.
삐익!
후반전이 시작됐다.
대한민국 월드컵대표팀의 기세는 여전했다.
자신감은 차올랐고 중원은 탄탄했으며 측면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제 포르투갈이 자폭할 때가 됐는데…….’
서진은 경기를 관전하면 때가 무르익었음을 깨달았다.
후반 21분, 전반전에 이미 경고를 한 차례 먹은 베투(Beto)가 이영표를 막는 과정에서 두 번째 경고를 받았다.
베투는 퇴장당했고 포르투갈은 이제 9명이 뛰어야했다.
포르투갈의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래도 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지 힘겨운 몸짓으로 아슬아슬하게 버텨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드디어 역사에 길이 남을 멋진 골 장면이 각본 없이 드라마처럼 연출됐다.
왼쪽에서 올린 이영표의 코너킥이 수비수에 헤딩에 막혀 튀어나오자 이영표가 달려가 골을 잡더니 다시 골문을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박지성이 오른쪽 가슴으로 받아 볼의 속도를 죽이고 포르투갈 수비수가 달라붙자 오른발 발등으로 살짝 공을 띄워 방향을 돌려놓았다. 순간적으로 골키퍼 사이에 길이 훤히 열리자 박지성은 떨어지는 공을 왼발로 강하게 차 넣었다.
공은 바이아(VITOR BAIA) 골키퍼의 가랑이를 통과했고 천하의 포르투갈은 이 한방으로 드디어 녹다운(knock down)되고 말았다.
“골인!”
“골이다!”
“박지성이 골을 넣었어.”
“야호!”
와아아아아아!
정말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관중들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고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어쩔 줄 모르고 좋아했다.
박지성이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포옹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서진은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이미 과거에 한번 봤는데도 불구하고 진한 감동이 느껴졌다.
주심이 선수들을 불러 경기를 속개했다.
포르투갈이 이를 악물고 총반격에 나섰다.
파울레타의 헤딩이 이운재 골키퍼의 선방에 막혔다.
피구가 날린 슈팅이 골대를 맞고 튀어나왔다.
정신없이 주고받는 공방전 속에서도 더 이상 골은 나오지 않았다.
물론 포르투갈 선수 개개인의 기량은 뛰어났다. 과연 클래스가 다르긴 했다.
하지만 승리의 달콤한 열매는 결국 대한민국이 가져갔다.
삐익 삑!
휘슬이 울렸다.
마침내 대한민국 월드컵대표팀의 16강행이 결정됐다.
1986년부터 5회 연속 월드컵 무대를 밟으면서도 단 한 번을 이기지 못했던 팀이 드디어 16강 무대에 올라서고 만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우아아아아아!
경기장을 가득매운 관중들이 크게 흥분했다. 아니 광분했다.
모두 목청이 터져라 환호성을 지르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서진도 그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미친 듯이 함성을 소리쳤다.
이 순간만큼은 너와 내가 아닌 오직 우리만이 존재하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모든 이의 마음이 하나로 뭉치고 모든 이의 염원이 하나의 불씨를 만들어갔다.
사람들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축하를 했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에 젖어 들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렇게 한마음으로 싸운다면 대격변이 와도 우리는 마수들과의 전쟁에서 능히 승리할 수가 있어.’
서진은 피처럼 붉게 타오르는, 거대하고 장엄한 붉은 물결이 미칠 듯이 흔들리는 장관을 바라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작은 웅심(雄心)의 싹이 터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날, 남모르게 싹이 튼 묘목이 자라서 나중에 오천만 한민족의 미래와 명운을 쥐고 흔들게 되리라는 것을 지금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포르투갈을 무너뜨린 후 15일 날 가진 인터뷰에서 명장 히딩크 감독이 “나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는 말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보다 높은 목표를 제시한 것처럼, 이날의 경기는 서진에게 자신이 바라보는 것보다 더 높은 목표를 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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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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