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둠레이더-32화 (3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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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 그녀가 나타났다.

‘이제 슬슬 나도 여자를 만나야 할 것 같은데…….’

요즘 호르몬의 영향으로 인해 시도 때도 없이 불끈거렸다. 아예 경험이 없다면 모를까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는 이 시대에 마지막 남은 로맨티스트라는 헛소리를 지껄여대며 나름 로맨스를 즐기신 몸이다. 물론 그 대상이 대부분 날라리나 클럽의 죽순이어서 문제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리 뇌정을 수련하고 몸을 혹사시켜도, 매일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해서 몸을 식혀도, 욕구불만은 점점 커져만 갔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안다고 자꾸만 몸이 뜨거워지자 욕망을 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손으로 해결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 뭔가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폭주해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몰래 클럽이라도 가서 사고를 쳐볼까?’

서진은 아침부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그냥 길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휘저었다.

“서진아!”

“어, 독대야.”

그의 옆으로 장독대가 다가왔다. 서진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장독대는 무슨 수를 쓰는지 여전히 그와 같은 학교 같은 반이다.

장독대의 뒤로 강백호가 나타났다.

“서진아, 여름방학 재밌게 잘 보냈냐?”

“별로. 너는?”

“나도 별로였어. 죽어라고 훈련만 했어.”

“그게 네 인생인데 어떡하겠어?”

“그러게 말이야. 내가 선택한 길이니 참고 견디는 수밖에.”

나름 도통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강백호의 덩치가 어쩐지 몇 달 전보다 더 커져있었다. 이제 겨우 고1인 주제에 선배들을 제치고 고등학교 농구계를 초토화하고 있는 강백호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라면 이보다 더 덩치가 커져도 좋을 것 같았다.

학교 본관으로 들어왔다.

복도를 걷고 있는데 장독대가 우동면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저기 우동면이 있다.”

“야! 우동면!”

“서진아!”

어린아이처럼 쭈쭈바를 빨아먹으면서 걸어가던 우동면은 서진을 보자 반갑게 달려왔다.

“다들 여기 있었네.”

“방학 잘 보냈냐?”

“응, 덕분에.”

우동면의 면상은 여전히 더럽게 험상궂었다. 웃으면 오히려 더 무서워진다.

하지만 서진의 눈에는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이 오히려 귀엽게만 보였다.

물론 그와 같이 돌아다니는 것은 사양이다.

우동면과 길을 걸어 다니면 십중팔구 불량청소년들과 시비가 벌어진다.

이건 부작용이 아니라 거의 저주수준이다.

그래서 그와 같이 어딘가를 돌아다니는 일은 항상 신중을 기해야한다.

“안녕!”

“어서와!”

“반갑다.”

1학년1반 교실로 들어가자 이미 자리가 꽉 차있었다.

서진과 강백호 그리고 우동면은 반 아이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맨 뒤쪽 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장독대는 자신의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진을 비롯한 친구들 옆에 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이 다 무너진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진아!”

“왜?”

“반갑다고.”

“그래.”

서진은 자신의 책상에 두 손을 짚고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애를 쳐다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김민선.

중학교 때는 껌 좀 씹었다는 녀석이다.

물론 여자 일진이라는 말은 아니다.

서상중학교와 서상고등학교에는 일진이 존재하지 않는다. 서진이 서상중학교를 평정하고 일진이라 불린 녀석들을 싹 쓸어버렸다. 서상고등학교도 마찬가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강백호와 우동면을 데리고 2학년과 3학년 선배를 가리지 않고 일진들을 찾아다니며 전부 박살내버려서 서상고등학교를 순식간에 ‘일진 프리 존’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여파가 얼마나 컸는지 강남의 일진들이 모여 서초동을 금지로 설정했다는 괴담까지 나돌고 있었다.

“말이 무척 짧다.”

“존댓말을 써달라는 얘기야?”

“아니 내 말은 대답이 단답형이라고.”

“더우니까 가까이 있지 말고 그만 네 자리로 돌아가.”

서진이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불량기가 다분히 흐르는 김민선은 의도적으로 서진에게 바짝 들이댄 몸을 조금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가까이 몸을 들이밀면서 요염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덕분에 그녀의 풍만하고 뽀얀 가슴이 서진의 눈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마음만 먹으면 질리도록 실컷 볼 수 있는 위치였다.

서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킬 뻔 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얘가 아침부터 아주 작정을 했네. 누가 보면 나를 잡아먹으려 드는 줄 알겠다.’

서진은 뽀얀 살덩이에 자꾸만 눈이 가는 것을 꾹 참으며 더욱 냉정해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르지만, 김민선은 이렇게 책상에 두 손을 짚고 몸을 숙이면 자신의 풍만한 가슴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슬도 꿰어야 보배지, 저렇게 서진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철벽방어를 해대자 김민선의 굳건한 의지도 그만 맥이 탁 풀려버리고 말았다.

“네가 아무리 부인해도 넌 내거야.”

“지랄!”

서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김민선은 입술을 한번 꼭 깨물고는 팩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사실, 그녀는 좀 예뻤다. 불량기가 흘러서 그렇지, 김민선의 미모는 서상고등학교 삼대여신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났다. 몸도 고1이라고는 보기에는 문제가 있을 정도로 성숙하다. 그녀의 들어갈 때 들어가고 나올 때 확실히 나온 격한 S라인 몸매는 삼대여신 중에도 단연 발군이었다.

‘어휴! 이것 참! 꼬시면 당장 좋다고 넘어올 것 같기는 한데……. 어쩐지 내 인생 조질 것 같아서 안 되겠다. CC커플은 대학교 들어가서 만드는 걸로.’

서진은 김민선의 아름다운 뒤태를 쳐다보며 그냥 입맛만 다셔야했다. 그 모습에 강백호와 우동면이 양쪽에서 머리를 들이밀며 속삭였다.

“야, 민선이 쟤 열폭했나보다. 그냥 한번 만나주지 그러냐?”

“인생 즐기면서 살아라. 그러다 사리 낀다. 주는 것도 못 먹냐?”

“야! 이 새끼들아! 네들 내 인생 조지려고 작정했어? 난 전혀 그런 마음 없으니까 헛소리 작작하고 책이나 봐.”

서진이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대자 강백호는 오히려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터질 것 같은 네 물건이나 좀 가리고 뻥을 쳐!”

“헉!”

강백호의 말에 서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요새 주인의 말을 더럽게도 듣지 않는 녀석이 잔뜩 성이 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진은 슬쩍 책상을 끌어다가 자신의 배에 붙이고는 두 손으로 강백호와 우동면의 면상을 양쪽으로 밀어버렸다.

“담임 선생님 오신다.”

그때, 화장실에 다녀온 누군가가 걸어오시는 담임 선생님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아이들이 일제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면서 내는 소리와 책상과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어우러져 교실이 진동하는 소음이 발생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담임 선생님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모든 소음이 뚝 그쳤다.

“우와! 예쁘다.”

“뭐야 잰? 날개 없는 천사야?”

“졸라 이쁘다.”

“삼대여신을 씹어 먹고도 남겠네.”

그러나 담임 선생님의 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여학생 한명의 모습이 드러나자 교실은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강백호와 우동면이 서진을 향해 입을 딱 벌리고 엄지를 척하고 위로 치켜들었다.

서진도 여학생의 미모를 확인한 순간 그들처럼 엄지가 저절로 위로 올라갔다.

‘누구 말대로 정말 우리 학교 삼대여신은 바로 발리겠구나. 연예인이나 아이돌도 왔다가 울고 가겠어.’

서진도 적이 감탄해마지 않았다.

예쁜 것은 예쁜 거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거다.

서진도 예쁘면 예쁘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비운의 홍길동도 아니고…….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긴 생머리에, 하얗고 뽀얀 얼굴,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맑은 눈, 오뚝하면서도 부드러운 선을 보이는 코, 자몽의 속살처럼 붉은 입술, 사슴처럼 긴 목에 날씬한 몸매까지…….

아직 발육이 진행 중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저 정도면 가히 최상급 미모라고 할 수 있었다.

“조용!”

“…….”

담임 선생님이 크게 소리를 쳤다. 그러자 교실이 일순 고요해졌다.

“오늘 우리 반에 새로 전학을 온 친구가 있다.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도록 해라.”

“네.”

남학생들이 한 목소리로 크게 대답을 했다. 그에 반해 여학생들의 목소리는 개미가 기어가는 것처럼 작았다.

“연서야, 올라가서 네 스스로 소개를 해봐라.”

“네, 선생님.”

여학생은 담임 선생님에게 대답을 하고는 얼굴을 살짝 붉힌 채 교탁 앞에 섰다.

“만나서 반갑다. 난 민연서라고 해, 앞으로 친하게 잘 지내자.”

“와아아아아아!”

그녀의 꾀꼬리 같은 맑은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남학생들은 일제히 폭풍 같은 함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담임 선생님은 그 열렬한 호응에 같은 남자로써 그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쿵!

서진은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진짜 민연서?’

그의 눈빛이 전과는 달리 씨암탉을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변했다. 그제야 눈앞의 민연서의 얼굴에서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미래의 민연서 모습이 하나 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진은 가만히 한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가렸다.

“마이키, 메딕, 지금 내 눈 앞에 민연서가 나타났다. 연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그 민연서 맞아.”

-이서진님, 그녀가 어린 민연서는 맞지만 과거로 회귀한 민연서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마스터가 짝사랑했던 그 민연서가 맞습니다.

마이키와 메딕의 대답에 서진의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민연서가 맞구나. 이렇게 같은 고등학교, 같은 반에서 만나게 되다니……. 어떻게 내가 그녀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지? 우리 집이 쫄딱 망한 뒤에 내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기 때문에 그런가? 아니야. 그녀의 이력은 분명히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었어. 혹시 졸업하기 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나?’

어디서 어떻게 틀어졌는지 당장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앞으로 민연서와 자주 보게 될 것이라는 거다.

“비어있는 자리가 어디 있지?”

담임 선생님의 말소리에 서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뒤쪽에 자리 있습니다.”

“어디보자. 강백호와 우동면 그리고 이서진의 옆자리가 비어있군. 연서야! 너 편한 데로 세 자리 중 하나를 골라서 앉도록 해라.”

“네, 선생님.”

아이들은 담임 선생님의 짓궂은 장난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민연서를 쳐다봤다.

민연서는 담임 선생님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는 딱 세 발짝을 떼고 나자 뭔가 교실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남자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여자들의 반 이상은 긴장과 적개심이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기투표를 한다면 서진이 압도적인 표차로 이기겠지만 의외로 강백호를 좋아하는 여학생도 꽤 됐다. 그래서 여학생들은 대부분 민연서가 서진이나 강백호의 옆자리에 앉지 않기를 바랐다. 물론 인상이 더러운 우동면은 아예 처음부터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더러운 면상을 타고난 우리의 불쌍한 우동면은 나름 부푼 기대를 가지고 민연서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도 한손으로 자신의 옆자리를 탁탁 치면서 말이다. 우동면은 자신의 그런 행동이 민연서에게 얼마나 큰 비 호감을 주는지 아마 상상도 못할 것이다.

뚜벅 뚜벅 뚜벅!

민연서는 걸음이 늘어갈수록 보이지 않는 압박감이 가중되는 것을 느꼈다. 아직은 어느 쪽이 서진이고 어느 쪽이 강백호인지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빨리 어디에 앉을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민연서는 강백호를 쳐다봤다.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덩치는 커서 좀 무섭긴 하지만 호남형의 얼굴에 순박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뭔가 의리가 있어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강백호를 떠나 서진을 향했다.

둥!

민연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서진의 눈을 보자 마치 뭔가가 자신의 가슴 깊숙한 곳을 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진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티끌하나 보이지 않는 뽀얀 얼굴에 빠져 들어갈 것 같은 깊은 눈빛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그의 오뚝한 콧날과 고집스런 입술을 쳐다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의 옆자리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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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시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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