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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 그녀가 나타났다.
“여기 앉아도 될까?”
“응.”
민연서는 서진의 짧은 대답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한손으로 치마를 앞으로 쓸면서 자리에 앉았다.
담임 선생님이 간단한 공지를 마치고 나가자 아이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재잘대기 시작했다.
“하여간 있는 것들이 더 해요.”
“빈익빈 부익부 모르냐?”
“잘 생긴 놈이랑, 예쁜 년이랑, 참 잘 어울린다.”
“이년아, 넌 벨도 없냐?”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 몰라?”
“그나저나 민선이 열 좀 받겠다.”
“열은 개뿔, 서진이는 쳐다보지도 않는데 괜히 지 혼자 애가 닳아서 저모양이지.”
“하긴 나라도 서진이 옆에 앉겠다.”
“서진이는 넘보지 마라. 넘사벽이야!”
“절대강자의 옆에 극강의 미녀가 앉았으니 이거 게임 끝났네.”
민연서는 다음 수업을 가르칠 선생님이 들어오시기 전까지, 반 아이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앉아있어야 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말이 자신의 옆에 앉은 서진이에 관한 것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살짝 귀로 넘기면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서진의 얼굴을 쳐다봤다.
서진은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득도한 고승이 명상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뭐하는 거지? 단학이라도 배웠나?’
민연서는 서진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전교1등, 학교 짱, 잘생긴 얼굴, 조각 같은 몸매, 부잣집 아들…….
귀를 열고 있자니 그를 지칭하는 단어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녀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조금씩 커져만 가는 그에 대한 관심에 당혹감을 느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될 즈음에는 살짝 자존심도 상했다.
‘한 번도 나를 쳐다보지 않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건가?’
민연서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인상을 썼다.
그러나 실상은 그녀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서진은 두근거리는 심장과 가슴 벅차오르는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수업시간 내내 뇌정을 운행하고 있었다. 차라리 그냥 뇌정을 수련하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이곳은 맘 편하게 수련을 할 수 있는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서진아, 밥 먹으러 가자.”
“그래.”
민연서가 서진의 옆자리에 앉자 실망한 우동면이 민연서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더 쳐다보려고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눈에 보이는 뻔한 수작에, 강백호는 우동면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우리 먼저 간다. 천천히 와라.”
“그래.”
서진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민연서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의 모습에 김민선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민연서를 향해 차가운 조소를 한번 날려주곤 혹시라도 늦을세라 잽싸게 교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도도도도도!
“서진아, 같이 가.”
김민선이 서진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서진은 힐끗 한번 뒤를 돌아보더니 깨끗이 무시하고 그냥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김민선은 서진의 한쪽 팔에 자신의 팔을 끼더니 애교를 부렸다.
“아잉, 어디긴 어디야? 식당가서 같이 밥 먹자는 거지”
“내가 왜?”
서진은 그녀의 애교에 코웃음을 치며 잡혀있는 자신의 팔을 빼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녀의 뭉클거리는 가슴의 감촉으로 인해 속으로 진저리를 쳐야했다.
김민선은 냉정한 서진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결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언제 그의 팔이 자신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냐는 듯, 금세 다시 그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야, 자꾸 왜 이래? 더우니까 들러붙지 마.”
“호호호, 좋으니까 그러지. 몰라서 물어?”
“난 별로거든.”
“혹시 너 취향이 말라깽이는 아니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김민선의 말끝이 묘하게 길어지더니 끝이 살짝 올라가며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그녀는 혀로 입술을 살짝 핥더니 자신의 가슴을 슬쩍 한번 내려다봤다.
서진은 김민선의 말뜻을 찰떡처럼 알아먹었다.
‘네가 지금 민연서가 절벽이라고 자신만만한 모양인데……. 절대 그거 아니거든. 나중에 너보다 훨씬 크고 빵빵해진 명품 가슴을 보고 지릴 준비나 해라.’
서진은 아무 말 없이 눈빛만으로 김민선의 생각을 한껏 비웃어줬다.
민연서는 힐러 임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리타이어가 된 채 마수에게 부상을 입고 연구소로 실려 왔다. 그런 그녀를 살리고 치료한 것은 오 박사였다. 서진은 오 박사의 조수를 자처하며 몇 번이나 그의 수술과 치료를 도왔다.
그래서 민연서가 크고 실한, 모양도 예쁜 자연산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착각은 자유다.(‘망상은 해수욕장이다.’ 까지 말하면 아재개그가 된다.)
김민선은 서진이 비웃는 것을 보더니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보고 웃는 줄로 혼자 착각해버렸다. 그래서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서진에게 들이댔다.
그러나 서진은 그녀의 용감무쌍한 돌진에, 식당 한쪽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 강백호와 우동면의 사이로 파고들어 앉는 강수를 써서 피해버렸다.
천하의 김민선도 강백호와 우동면의 사이로 끼어든 서진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전에 한번 멋모르고 끼어들었다가 우동면이 좋다고 들러붙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던 것이다.
“서진아, 쟤 너무 노골적이다.”
“그러게 말이야. 갈수록 육탄공세가 심해져.”
강백호는 씩씩대며 멀어져가는 김민선을 보고 서진을 걱정했다.
하지만 우동면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도와줄 테니까 곤란한 일이 생기면 내 옆으로 와서 앉아.”
“이 꼴통새끼가 또 들러붙으려고 그러네?”
강백호가 우동면의 생각을 읽고 호통을 쳤다.
“왜? 어때서? 쟤는 들러붙어도 되고 난 안 되는 거야?”
“이 새끼야, 너 그거 성희롱이야. 잘못하면 은팔찌 찬다고…….”
“개소리 하지 마. 내가 나이가 몇 갠데 은팔찌를 차냐? 그리고 나도 쟤가 서진이에게 들러붙을 때만 들러붙을 거야.”
우동면의 고집스런 말투에 강백호가 뒷목을 잡았다.
“이놈 도대체 아이큐가 몇 개야? 정말 더럽게도 말 안 통하네.”
“내가 좀 도와줄까?”
그때 그들의 앞에 장독대가 나타났다.
“왔냐?”
“응, 서진아! 이거 너 먹어.”
“넌?”
“난 별로 생각 없어. 나중에 배고프면 빵 사먹으면 돼.”
“그래 고맙다.”
서진은 김민선 때문에 급식을 받으러 갈까 말까 망설였는데, 장독대가 자신이 타온 급식을 먹으라고 내밀자 두 번 물어보지 않고 냉큼 받아먹었다.
“네가 뭘 도와준다는 거야?”
“동면아, 너 하고 싶어서 그러지?”
“뭘?”
“그거 말이야.”
“그거?”
“응, 그거.”
장독대의 말에 우동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왜 좋은 건수 있냐?”
“여대생과 미팅을 한번 주선해볼까 하는데…….”
“오잉, 여대생? 미팅?”
우동면은 그 좋아하는 밥을 내버려두고 장독대의 말에 완전히 빠져 들었다.
“얼굴도 반반하고 몸매도 좋아. 단점이 있다면 노는 것을 무지하게 좋아한다는 것 정도랄까?”
“그으래? 난 무조건 콜(call)이다.”
두 사람의 대화에 강백호가 얼굴을 붉히며 끼어들었다.
그에게도 여대생에 대한 환상은 존재했던 것이다.
“진짜 여대생이야?”
“그럼 내가 가짜 여대생과 미팅을 하려고 하겠어?”
장독대가 호언장담을 하자 강백호는 침을 꿀떡 삼키며 작게 속삭였다.
“우린 뭐라고 해야 되는데?”
“당연히 우리도 대학생이라고 해야지.”
“혹시 클럽 갈 거냐?”
“그럼 빵집에서 만나리?”
“아니 난 그런 말이 아니고…….”
“너 혹시 춤 못 춰서 그러는 거 아니지?”
강백호는 펄쩍 뛰면서 극구 부인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 춤 잘 춰! 너 내가 아직 비비는 거 못 봤지?”
“진짜야?”
“응.”
“정말이야?”
“그래.”
“못 믿겠는데…….”
“못 믿으면 말고.”
장독대는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강백호를 쳐다봤다.
하지만 강백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 할 건데?”
“주말로 계획하고 있어. 클럽에서 좀 놀다가 우리 집 별장으로 데리고 가면 좋을 것 같은데……. 네들 생각은 어때?”
“별장? 조……오……치!”
“난 찬성!”
“나도 당근 찬성이다.”
“그럼 이제 서진이만 남았네.”
“나?”
장독대가 서진을 언급하자 어느새 바닥까지 박박 긁고 있는 서진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쳐다봤다.
“그래, 너!”
“난 관심 없어.”
서진은 냉정하게 딱 잘라 말했다.
장독대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그럼 안 되겠네.”
“왜? 왜 안 돼? 우리끼리 가면되지.”
우동면이 장독대의 팔을 꽉 잡고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명이거든.”
“뭐가?”
“같이 놀 여대생들이 네 명이란 말이야. 그래서 셋은 안 돼.”
“뭐라고?”
우동면의 머리가 순식간에 서진에게 돌아갔다.
“서진아, 같이 가야겠다.”
“난 안가. 관심 없어.”
“왜 안 가는데?”
“관심 없다니까.”
“왜 관심이 없는데. 너 혹시 취향이……. 여자 싫어하냐?”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나 정상이야. 나 여자 좋아해.”
“그런데 왜 안가?”
우동면은 막무가내로 서진을 몰아붙였다.
힘으로 해결하자면 우동면이야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겠지만 지금은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 진짜 가고 싶은 마음 없어. 그러니까 제발 너희들끼리 가라. 응?”
“아무래도 수상한데……. 서진이 너 혹시 민연서한테 꽂힌 거 아니야?”
“응?”
서진은 강백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절대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민연서의 얘기가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당황한 것이다.
“민연서가 옆에 앉은 다음부터 저놈 하루 종일 눈을 감고 있더라. 내가 이놈 잘 아는데 자기가 관심이 있는 게 있으면 처음에는 오히려 전혀 관심 없는 척 하더라고.”
“야, 아니야. 그런 거.”
“정말?”
“그래.”
“그럼 나 오늘부터 민연서 작업들어가도 돼?”
“자, 작업? 안 돼.”
“왜 안되는데?”
“그냥 안 돼. 온지 하루도 안 된 애를 왜 작업하려고 그러는 거야?”
“그건 네가 알바 아니잖아.”
“…….”
평상시에는 침착하던 서진이 민연서의 얘기가 나오자 좀 당황하는 게 눈에 딱 걸렸나보다. 강백호의 말을 들은 장독대와 우동면이 동시에 서로의 눈을 쳐다보더니 서진에게 압박을 가했다.
“백호 말이 맞네. 서진이 네가 무슨 상관이야? 백호가 민연서 작업하든 말든?”
“그래. 맞아. 내가 볼 땐 백호와 민연서 아주 잘 어울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우리가 모두 힘을 합쳐서 백호를 도와주자.”
“안 된다니까.”
“크흐흐흐! 딱 걸렸네. 너 민연서 좋아하는 구나? 그렇지?”
“아, 아니라니까.”
“에이. 아니긴 뭐가 아니야? 좋아하는 것 맞구먼. 가만 이제 보니까 그냥 단순히 좋아하는 게 아니네. 혹시……. 찍었구나? 그렇지? 너 민연서 찍었지?”
마침내 장독대가 일을 내고 말았다.
서진은 살짝 얼굴이 붉어져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따라와.”
“응?”
“엥?”
“헉, 이게 무슨 황당 시추에이션?”
서진의 차가운 말에 강백호, 우동면, 장독대는 놀라서 눈이 찢어져라 부릅떴다.
“쟤, 왜 저러냐?”
“우리가 혹시 그의 아킬레스건을 건든 것은 아닐까?”
“화 많이 났나? 아니야. 서진은 화가 났다고 괜히 폭력을 휘두를 녀석이 아니야. 다 같이 가보자.”
장독대가 용기를 내서 소리쳤다.
강백호와 우동면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서진의 뒤를 따라갔다.
운동장 한쪽 벤치에 앉은 서진은 그들이 오기만 기다렸다.
‘제기랄, 딱 걸려버렸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냥 힘으로 해결해?’
제일 좋은 것은 힘으로 윽박지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치사한 짓이다. 그래도 친구사이인데, 마음에 좀 안 든다고 실력행사를 하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백호와 우동면이 그의 눈치를 살살 보더니 옆에 앉았다.
오히려 장독대가 서진의 앞에 서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맞을 땐 맞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
“그래. 해봐!”
서진은 궁금했다. 장독대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지 말이다.
“앞으로 민연서는 네 거다. 우린 절대로 민연서 안 건드린다. 다른 놈들이 민연서 귀찮게 굴면 우리가 나서서 막아줄게. 그리고 둘이 잘 되도록 적극 협력할게. 어때?”
“좋아.”
서진은 장독대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바라던 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독대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대신!”
“대신?”
“이번 미팅 너도 같이 가자. 너를 위해 우리가 민연서를 깨끗이 포기할 테니까 너도 이번 한번만 우리를 위해서 숫자나 좀 채워줘.”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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