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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 마지막 일탈
서진은 장독대의 말에 한방 먹은 기분이었다.
자신의 눈치만 보기 급급했던 녀석이 이제는 자신과 딜(deal)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 그 모습이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특히 강백호와 우동면을 위해 여대생과 미팅을 주선하려는 생각 자체가 조금은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애들 진짜 괜찮거든. 얼굴도 반반하고 몸매도 빵빵해. 정말 놓치기 아까운 기회야. 화끈하게 놀고 다음날 아침 헤어져도 귀찮게 하는 것 없는, 뒤끝 없이 쿨(cool)한 애들이라고.”
“서진아, 우리를 위해서 한번만 희생해라.”
“넌 그냥 몸만 나가.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서진은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났다.
민연서와 같은 하늘, 같은 학교, 같은 반인 것도 모자라 바로 옆자리에 앉혀주신 하늘의 도우심을 절대 날려먹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두 손을 모으고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는 강백호와 우동면을 그냥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서진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휴! 이 화상들……. 알았다. 같이 가줄게.”
“야호!”
“역시 서진이는 내 베프야!”
“고맙다. 서진아!”
우동면은 환호성을 질렀고 강백호는 뒤로 와서 그의 어깨를 주물렀다. 장독대는 죽었다 살아났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만약 이일이 민연서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하늘에 맹세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내가 죽으면 죽었지 절대 그런 입방정은 안 떤다.”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면 그냥 내 혀 잘라버릴게.”
서진은 맹세를 하는 우동면과 절대 입방정을 떨지 않겠다는 강백호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일을 발설하면 자신의 혀를 잘라버리겠다는 장독대의 섬뜩한 말에는 왠지 모를 진심이 느껴져 무척 당혹스러웠다.
“야! 너 제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들을 때마다 소름 돋아.”
“알았어. 언어순화할게.”
“이제 어떻게 놀 건지 본격적으로 계획 좀 세워보자.”
“작전 짜려면 정보가 더 필요해. 혹시 걔들 사진 없냐?”
서진의 합류가 결정되자 다들 눈빛을 빛내며 흥분한 얼굴로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들은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온갖 작전과 계획을 다 세워보다 끝내는 장독대한테 맡기고 말았다. 장독대는 생애 최고의 미팅을 성사시키고 말겠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렇게 고삐리(고1) 네 녀석의 엉뚱한 일탈이 시작됐다.
* * *
“하하하!”
“호호호!”
맑고 청아한 웃음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민연서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쉬는 시간마다 어김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전학을 온지 겨우 사흘!
그녀는 위축됐던 어깨를 쭉 펴고 평소의 밝고 활기찬 본래의 모습으로 되찾았다.
이 모든 것이 서진이 그녀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면서부터 일어난 일이었다.
“좋아하는 색깔은?”
“파란색!”
“어머, 나도 파란색인데……. 정말 신기하다.”
민연서는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번에는 음식으로 가보자.”
“좋아.”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난 뭐든 다 잘 먹어. 한식, 양식, 중식, 일식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야.”
“그래도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을 것 아니야?”
“스파게티하고 연어샐러드 좋아해.”
“진짜?”
“응.”
“대……박! 어쩜 좋아하는 게 나하고 똑같니.”
“정말?”
“응.”
민연서는 서진의 팔을 툭툭 치면서 놀라워했다. 그만큼 심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서진의 팔을 치고 있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우리 예전에 어디서 만난 적 있나?”
“전생이면 모를까 이번 생은 없는 것 같은데?”
“뭐야? 호호호!”
민연서는 서진의 전생드립에 깔깔대며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서진은 마음속으로 조금 죄책감을 느꼈다.
‘연서야! 미안. 사실은 나 흰색 좋아해. 스파게티도 안 좋아하고……. 연어샐러드는 나도 좋아하니까 나중에 같이 먹도록 하자. 그리고 전생이 아니라 미래에서 우리 만난 거 기억 안나니? 혹시 과거로 회귀한 거 실패한 거야? 그런 거야? 아니면 회귀했는데 기억이 전혀 안 나는 거니?’
서진은 솔직하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민연서와 전처럼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녀는 미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회귀에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진은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지 못하고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했다.
나노로봇을 부착시키고 메디봇 주입하는 것이다.
-이서진님 나노로봇 부착에 성공했습니다. 이제부터 민연서를 24시간 감시할 수 있게 됐습니다.
-마스터, 메디봇을 주입했습니다. 민연서의 몸은 아주 건강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감정은 우정보다는 가깝고 사랑보다는 조금 먼 상태입니다.
서진은 메딕의 쓸데없는 말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가 얼른 풀었다.
‘메딕은 저런 말을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메딕의 감성이 풍성해지고 있었다.
“스파게티 정말 좋아하면 내가 아는 레스토랑 하나 추천해줄까?”
“응, 추천해줘.”
“볼레로라고 강남에 있는 레스토랑인데 스파게티 하나는 정말 잘하는 집이야. 부모님이랑 몇 번 가봤는데 갈 때마다 감탄을 하시더라.”
“너무 비싼 데는 아니지?”
“내가 알기로는 그렇게 비싼 곳 아니야. 연인들이 데이트코스로 많이 찾는 분위기가 아주 근사한 곳이야.”
“데이트코스?”
서진의 말에 민연서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뭔가 망설이는 기색도 역력했다.
“혹시 비쌀까봐 그래?”
“아니 그냥 혼자가기가 좀 뭐해서.”
“그럼 내가 같이 가줄까?”
“정말? 정말 같이 가줄 거야?”
민연서는 서진이 레스토랑에 같이 가준다는 말에 크게 기뻐했다.
“못할 것도 없지. 강남이 멀리 있는 곳도 아니고 그냥 차타고 쌩하고 다녀오면 되는 곳 아니야?”
“맞아. 그럼 그렇게 하자. 대신 스파게티는 내가 살게.”
“좋아. 우리 스파게티 먹으러 언제 갈까?”
“주말이 좋을 것 같기는 한데……. 일단 엄마한테 물어보고 허락받은 다음에 말해줄게.”
“알았어. 너 편할 대로 해.”
민연서는 결국 서진이 치밀하게 짜놓은 그물에 걸려들었다.
스파게티를 같이 먹으러 레스토랑에 가는 일이 사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남녀사이라는 것이 학교 밖에서 만나면 더욱 친밀하고 특별한 감정이 들게 되어있다. 둘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자주 보다보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불꽃이 튀고 로맨스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서진이 비록 제대로 된 연애는 많이 못해봤지만 그래도 서른 살까지 살았던 기억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보고 들은 것만으로도 로맨스 소설 몇 권은 쓸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 어린 소녀의 방심을 차근차근 흔드는 작업이 아주 힘든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는 이미 민연서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빠삭하게 알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지금의 서진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잘 생긴 얼굴에다 전교1등, 학교 짱, 부잣집 아들이라는 막강한 버프들을 한꺼번에 받고 있었다.
민연서도 백마 탄 왕자를 바라는 꿈 많은 소녀라 학교에서 모든 여학생들의 우상처럼 선망의 대상이 되는 서진과 친해지는 것이 절대 싫지 않았다.
서진은 민연서에게 항상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언제나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모르는 문제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잘 설명해줬다. 그러면서도 절대 잘난 척은 하지 않았다. 이렇게 매일 서진이 민연서에게 알게 모르게 정성을 쏟자 그녀도 조금씩 서진에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관심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민연서의 눈빛도 서진의 눈빛처럼 조금씩 애틋함이 묻어나왔다.
“말도 안 돼!”
하지만 서진과 민연서의 사이를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는 부류도 있었다.
그 대표주자가 바로 김민선이다.
그녀는 서진과 민연서가 애틋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웃고 떠드는 모습이 전혀 현실감이 없어보였다. 그가 아는 서진과 지금의 서진은 너무나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마치 저 자리에 내가 앉아 있어야 하는데 왜 민연서가 앉아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김민선은 도저히 지금의 상황을 묵과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진과 민연서가 앉아있는 뒤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멈춰!”
“응?”
그때, 김민선의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여헐’이라는 불리는 강부자였다.
그녀는 커다란 덩치를 들이밀며 눈에 힘을 주고 부라렸다.
주변의 공기가 싸늘히 가라앉고 교실의 분위기가 절로 삭막해졌다.
“조용히 네 자리로 돌아가.”
“강부자,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김민선,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라. 괜히 머리털 다 쥐어뜯기기 전에…….”
“나 서진이한테 할 말 있어. 좀 비켜줘.”
“앞으로 넌 서진이와 연서에게 말 걸지 마. 이건 경고가 아니라 명령이야.”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명령질이야?”
“나? 강부자야.”
쫘악!
강부자는 김민선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김민선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눈에 별이 번쩍거리고 골이 띵해진 그녀는 순간 두 다리에 힘을 잃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교실이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머리를 옆으로 흔들며 간신히 정신을 차린 김민선이 자신의 뺨을 한손으로 만지더니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강부자를 싸늘하게 노려봤다.
그러나 이미 기세에서 강부자에게 크게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슬그머니 뒤쪽의 서진을 향했다. 그녀의 눈빛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서진은 김민선의 얼굴을 한번 슬쩍 쳐다보더니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민연서와 다시 뭐라고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김민선은 서진의 행동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이를 악물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우동면의 얼굴이 보였다.
능글맞고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는 우동면의 눈빛은 마치 뱀이나 도마뱀 같은 파충류의 눈처럼 차갑고 소름이 끼쳤다.
김민선은 직감적으로 강부자의 뒤에 우동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개자식이…….’
김민선은 우동면을 표독스런 눈빛으로 쳐다봤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자신의 뺨을 때린 강부자보다 뒤에서 사주한 우동면이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돌아가! 다음에는 네 얼굴을 박살내줄 거야.”
“강부자, 너 너무 막나가는 거 아냐?”
“내가 막나가는 걸 네가 막을 수 있으면 막아보시던가?”
“이익!”
김민선은 강부자를 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 정말 미친 척 하고 한판 뜰까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망설이는 모습에 강부자는 오히려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음이 변했어. 이번에는 재수 없는 네 얼굴을 그냥 확 그어버려야겠어.”
“칫!”
강부자의 마지막말에 김민선은 마침내 몸을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여자인 주제에 헐크처럼 힘만 세다고 ‘여헐’이라는 별명을 가진 강부자다.
김민선은 도저히 강부자를 상대해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아니 설사 이긴다고 해도 소중한 자신의 얼굴에 상처라도 나게 되면 결국 자신만 손해였다.
“개 날라리 같은 년!”
강부자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질투가 가득한 눈빛으로 김민선의 뒤통수를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은 강부자는 뒤를 돌아봤다. 대각선 방향으로 우동면의 사내다운 얼굴이 보였다.
우동면은 강부자에게 아주 잘했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돌연 엄지를 위로 척하고 들어 올렸다.
순간, 강부자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고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가다 못해 귀에 걸렸다. 누가 봐도 그 모습은 강부자가 우동면을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우웩!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었네. 저놈이 강부자의 마음을 훔쳐갔어.’
뒤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강백호가 우동면의 얼굴을 쳐다보며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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