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둠레이더-36화 (36/225)

0036 / 0225 ----------------------------------------------

제9장 - 마지막 일탈

그는 모니터가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극구 아니라고 부인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당장 화면 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아니 더 이상 보면 안 될 것 같아.”

-알겠습니다. 정 그렇게 원하신다면 지금 화면은 따로 녹화해두겠습니다.

-언제든지 보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알았죠?

“…….”

서진은 ‘No’라고 말해야할 때 당당히 ‘No’라고 말하지 못한 자신이 오늘은 정말 ‘Oh! No!’라고 생각했다.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서진은 당장 폭발할 것 같이 성을 내고 있는 자신의 분신을 향해 속삭였다.

‘아무래도 연서는 좀 더 기다려야겠다. 아직 발육이, 아니 성장이 다 끝나지 않았어.’

녀석은 그의 결정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대가리를 꺼덕대며 심히 반항했다.

서진은 눈을 감아도 사진처럼 생생한 그녀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즉시 욕실로 달려가서 찬물로 샤워를 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시원한 물이 달궈진 그의 몸을 식히자 그제야 좀 이성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쏴아아아아!

아무래도 이번 미팅 다시 생각해봐야할 것 같다.

* * *

“왔냐?”

“왔다. 다들 마음의 준비해.”

“준비는 무슨,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우동면이 큰소리를 쳤지만 면상 더럽게 생긴 것과는 달리 그의 손가락은 지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 지금 떨고 있냐?”

“지랄! 그게 언제 적 드립인데 아직도 써먹어?”

“하하하!”

“크크크!”

별거 아닌 농담에도 웃으며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니 확실히 아이들은 긴장을 타고 있었다.

그러나 긴장하고 있는 것은 서진도 마찬가지였다. 이 나이에 이런 미팅을 해보는 것은 자신도 양쪽 생애 합쳐서 처음이기 때문이다.

-마스터, 심장박동수가 급격히 올라가고 있습니다.

-마스터, 지금 마스터는 대한민국 20대 여성들이 가장 선호하고 있는 스타일입니다.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이키와 메딕의 말에 서진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두근거리는 가슴이 조금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강백호도 긴장이 되는지 연거푸 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는 자신처럼 캐주얼 옷을 차려입고 나왔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다리를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우동면의 군청색 정장이 눈에 띄었다. 보기만 해도 불안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싸움을 앞둔 조폭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장독대도 우동면처럼 정장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산뜻한 쪽빛의 정장을 입은 장독대의 모습은 우동면과는 전혀 달리, 부잣집 외동아들처럼 귀티와 부티가 좌르륵 흐르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부산한 소리가 들리더니 미닫이문이 살짝 열렸다. 선이 곱고 깨끗한 마스크의 여자 한명이 빼꼼히 얼굴을 안으로 들이밀었다.

별실에 앉아있던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을 향했다.

수지는 장독대의 얼굴을 발견하자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장독대의 어깨를 한번 툭 한번 치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일행에게 귀엽게 인사를 했다.

“독대야! 여기있었구나.”

“수지야! 어서와.”

“어머,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장독대가 반가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머지 일행도 모두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더니 같이 인사를 했다.

인사가 끝나자 수지는 문밖으로 상체를 내밀고는 손짓을 했다.

“들어와!”

그러자 수지의 옆으로 세 명의 여자가 별실 안으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걸어 들어왔다.

‘수지말대로 다들 쓸 만하네.’

‘아! 예쁘다.’

‘진짜 괜찮다.’

‘모두 미인이잖아.’

하나 같이 늘씬하고 볼륨감 있는 몸매에 이제 막 대학교에 들어간 새내기처럼 앳된 얼굴을 한 미녀들이었다.

수지와 세 친구의 미모를 확인한 사내들은 모두 속으로 감탄해마지 않았다.

잠시 그 누구도 말을 하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여덟 명의 남녀의 시선이 마치 스캔을 하듯 서로의 얼굴과 몸을 빠르게 훑어지나갔다.

서로 충분히 살펴볼 시간이 지나자 장독대가 슬쩍 앞으로 나섰다.

“우리 일단 좀 앉죠?”

“어머, 그게 좋겠다. 자자, 다들 앉고 싶은 자리 찾아가.”

수지는 미팅을 하는 게 처음이 아닌지 능숙하게 장독대의 말에 맞장구를 쳐가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는 언중유골(言中有骨), 뼈가 들어있었다.

앉을 때 그냥 앉지 말고 각자 원하는 파트너 옆에 가서 앉으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일단 한번 자리에 앉으면 보통 오늘 하루는 옆 사람과 파트너로 지내는 것이 이쪽의 불문율이었다.

서진을 비롯한 남자들은 그냥 망부석처럼 서있었다.

수지를 비롯한 여자들은 그 짧은 시간동안 숨 막힐 듯한 치열한 눈치작전과 신경전을 벌이며 각자 자신의 파트너를 골라야했다.

마침내 여자들이 모두 각자 파트너를 골라 옆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남자들도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함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모두 각자 파트너를 골랐으니 이제 자기소개시간을 갖도록 해요. 촌스럽게 성이나 학교얘기 하지 말고 이름과 무슨 과인지만 말하면 됩니다.”

V넥으로 가슴이 살짝 파인 하얀 원피스를 입은 수지의 말에 다들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용감하게 우리 여자들 먼저 자기소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전 수지에요. TV에 나오는 연예인과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들어요. 무용과에요.”

사내들은 모두 자동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몸매가 남다르다고 생각했더니 무용과였다.

장독대의 옆에 앉은 수지가 스타트를 끊자 그 다음은 마치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나연이에요. 무용과에요.”

“가인이라고 해요. 미술과에요.”

“여러분 반가워요. 하나에요. 예쁘게 봐주세요. 조소과입니다.”

나연, 가인, 하나의 소개가 끝나자 곧바로 남자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서진이라고 합니다.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백호입니다. 전공이 농구입니다. 하하하!”

“제 이름은 동면입니다. 유도를 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독대라고 합니다. 경역학과입니다.”

자기소개가 끝남과 동시에 미리 시켜놓은 요리와 시원한 맥주가 들어왔다. 그러자 무채색의 방이 마치 컬러로 돌아온 듯, 긴장된 분위기가 한껏 풀리며 밝아졌다. 그들은 그때부터 각자 옆에 앉은 파트너와 술잔을 주고받으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진의 옆에는 작고 갸름한 얼굴에 청순미가 돋보이는 나연이 앉았다. 늘씬한 각선미가 그대로 드러나는 짧은 핫팬츠에 민소매를 입고 있는 그녀는 무용을 전공하는 사람치고는 상당히 볼륨 있는 바스트를 가지고 있었다.

고운 목소리로 소곤거리는 그녀의 웃는 미소가 참 싱그러웠다.

강백호의 옆에는 굉장히 지적으로 보이는 가인이 앉았다. 하지만 검은색 반바지에 배꼽이 드러난 몸에 딱 붙는 흰색 티셔츠 입은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섹시미가 돋보였다. 강백호는 가인이 마음에 드는지 입 꼬리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동면의 옆은 일본의 유명한 여배우를 연상케 하는 하나가 앉았다. 작고 아담한 신장과는 달리 그녀의 가슴은 폭발적으로 융기되어 있었다. 우동면은 정신을 못 차리고 벌써부터 홀린 듯 그녀의 드높은 자존심에 온통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하나가 남자의 얼굴을 전혀 보지 않는 특이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로인해 미팅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어머, 팔뚝이 장난이 아니네요. 혹시 운동하셨어요?”

“네, 건강을 위해 조금했어요.”

“얼굴은 고등학생처럼 앳돼 보이는데 몸은 프로운동선수 같아요.”

“그거 칭찬이죠?”

“물론이죠.”

서진은 나연의 말에 살짝 뜨끔했다. 하지만 뻔뻔함을 방패삼아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강백호도 부드럽게 가인과 대화를 잘 나누고 있었다.

“나중에 꿈이 프로농구선수가 되는 거예요?”

“네, 물론이죠. 곧 TV에서 제 얼굴을 보게 되실 겁니다.”

“지금도 작진 않지만 프로로 뛰려면 키가 좀 더 커야하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더 커야합니다. 다행히 아직 제 성장판이 닫혀있지 않아서 제 키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가인 씨를 향한 제 마음처럼 꾸준하게 자라나고 있습니다.”

“호호호, 그럼 미리 사인을 받아놓아야겠네요?”

“하하하, 사인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얼마든지 해드릴 테니까…….”

가인은 강백호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사실 그녀는 지적인 얼굴과는 달리 운동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농구는 아주 사족을 못 썼다. 그러니 프로농구선수를 지향하는 강백호가 좋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서진과 강백호가 순항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우동면과 하나의 사이는 살짝 긴장감이 감돌았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

“아닙니다.”

“제가 마음에 안 들어요?”

“절대 아닙니다.”

“아니라는 말 밖에는 못해요?”

“아닙니다. 다른 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다른 말 해봐요.”

“…….”

우동면은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힌 채 뜨거운 숨만 내쉬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징그러울 정도로 능글맞은 녀석이 지금은 취향저격을 당했는지 하나의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진은 살짝 걱정이 됐지만 입 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가 있는 하나의 얼굴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참 취향도 가지가지다. 우동면을 좋아하는 여자도 있네.’

착하고 순하고 어려보이는 하나는 그런 자신의 외모와는 전혀 달리 취향이 참 독특했다. 그녀는 남자답게 생기고 육덕 진 남자를 좋아했다.

거 왜 있지 않은가?

옛날 애로 영화에서 ‘마님!’하고 달려드는 머슴 이X근이나 사극으로 인기몰이를 한 유X근 같이,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덩치가 크고 투실한 근육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보면 우동면은 그녀에게만큼은 역으로 취향저격일 수도 있었다.

딱 생긴 게 조폭처럼 불량스럽게(남자답게) 생겼고 몸도 머슴 형(육덕)이라서 말이다.

“술 다 떨어졌네. 더 마실까요?”

“아니에요. 요리로 배도 채웠고 술도 마실 만큼 마셨으니 이제 신나게 흔들러가요. 얘들아! 어떠니?”

장독대의 말에 그의 옆에 딱 달라붙어 앉아있던 수지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통통 튀기는 매력을 발산했다.

“좋아.”

“오케이!”

“나도 찬성!”

나연, 가인, 하나가 동시에 찬성을 하자 레스토랑 별실의 미팅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바로 근처에 있는 클럽으로 2차가 이어졌다.

장독대가 계산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그들은 20m도 안 되는 곳에 위치한 클럽으로 걸어갔다.

“형님, 어서 오십시오.”

“원빈! 준비 다 해놨지?”

“네, 형님. 바로 VIP룸으로 모시겠습니다.”

액면가가 최소한 서른은 되어 보이는 웨이터 원빈은 장독대를 향해 90도 각도로 고개를 팍팍 숙이며 ‘형님’ 소리를 난발했다.

그 모습에 장독대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하얀 수표를 꺼내 그의 주머니에 쏙 집어넣고는 성큼성큼 클럽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장독대가 하는 짓을 보아하니 절대 한두 번 와본 솜씨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들과 같이 클럽에 온 지금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의심을 받지 않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쿵짝쿵짝 쿵쿵 쿵짝쿵짝 쿵쿵 지잉징징 지잉징징…….

계단을 내려가자 벌써부터 귀청을 긁는 강한 비트의 물결이 몰려왔다.

네 쌍의 남녀는 흥분된 표정으로 고개를 박자에 맞춰 끄덕이며 몸을 살살 흔들었다.

클럽 안으로 들어가자 심장을 자극하는 강력한 사운드와 몸 전체를 후려치는 묵직한 베이스음파가 밀려들었다.

천장에서 온갖 색색 깔의 조명들이 바닥을 아름답게 수놓았고 사이키조명들이 정신없이 깜빡거렸다. 녹색의 레이저가 클럽의 벽에 온갖 기하학적인 문양을 만들어가자 플로어를 가득채운 젊은 청춘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댔다.

가히 광란의 도가니라 할만 했다.

“우와, 벌써부터 꽉 찼네?”

“오늘이 주말 저녁 아니냐?”

강백호가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자 서진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그들의 앞에서 나연과 가인이 비트에 몸을 맞기며 살랑살랑 어깨를 흔들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1층은 입추의 여지도 없이 가득 찼지만 2층은 아직 빈자리가 몇 개 보였다.

하지만 장독대는 홀에 앉지 않고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전면이 유리로 만들어진 VIP룸이 나타났다.

“오늘 우리 여기 들어가서 노는 거야?”

“그런가봐. 독대가 부자라고 하더니 오늘 제대로 지갑을 여네.”

“누가 그래? 독대가 부자라고?”

“누구긴 누구야? 수지가 그러지.”

여자들은 VIP룸 입구에서 서로 소곤거리며 빠르게 얘기를 나눴다.

============================ 작품 후기 ============================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선호작, 추천, 코멘트, 쿠폰, 후원 고맙습니다.

평안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