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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 리미트리스(Limitless)
하지만 그의 생각에 마이키가 바로 태클을 걸었다.
“마스터, 오 박사님을 만나러 나사에 가시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응? 왜?”
“마스터의 나이를 생각하십시오. 나사에 가서 오 박사님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설사 만난다고 해도 뭐라고 말씀하실 예정이십니까? 미래에서 과거로 회귀했다고 하실 겁니까?”
생각해보니 마이키의 말이 옳았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이 찾아와 지구의 미래를 위해 함께하자고 하면 누가 그 말을 선선히 받아주겠는가? 그렇다고 그에게 마이키나 메딕을 보이는 것은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미래의 오 박사가 과거의 오 박사를 만나면 선물이라고 꼭 전해달라는 물건이 있긴 했지만 그것을 나사에서 전해줬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 오 박사도 빼앗기고 그 선물도 강탈당할 것이다.
“으음,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지?”
“당연히 나사에서 오 박사님을 내치게 만들어야지요. 미리 오 박사님의 입맛에 맞는 스카우트를 제안해놓고 나사에서 오 박사님이 쫓겨나면 우리가 가볍게 거둬들이는 겁니다.”
“우아! 그거 기가 막힌 방법이네. 그런데 오 박사님이 눈치 채지 못하게 공작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어?”
“물론입니다. 그동안 저는 꾸준히 오 박사님을 주시해왔습니다. 그녀의 성격과 취향 그리고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공작을 시작하면 언제쯤 오 박사님을 우리 회사로 모시고 올 수 있지?
“늦어도 4월 안에는 가능할 겁니다.”
“좋아. 그럼 한번 멋지게 작전을 펼쳐봐.”
“네, 알겠습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마이키는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섯 번째 명령이다. 대격변 이후 나라와 민족을 배반하고 대한민국을 망하게 만든 놈들의 살생부를 만들어라.”
“네, 마스터! 그런데 혹시 이들이 아직은 죽을죄를 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당연히 죄를 저지를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야지.”
“물리적으로 말씀이십니까?”
“물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재산, 지위, 인기, 명예, 직책 등 그들이 대한민국에 그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없도록 만들어야지.”
“한마디로 조용히 살게 해주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정답이야. 마이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서진은 마이키의 마지막 말에 주먹을 꼭 쥐고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다.’
* * *
커다란 체육관 안에 두 명의 사내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섰다.
“준비 됐습니까?”
“네, 저야 언제든지…….”
메놀의 물음에 서진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서진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메놀은 오히려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조심하세요. 저는 원하시는 대로 전력을 다해 공격할겁니다.”
“그렇게 해달라고 모신 것 아닙니까? 제 걱정은 마시고 마음 놓고 공격하세요.”
서진은 시종일관 차분한 눈빛으로 메놀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그럼 시작합니다.”
“네, 들어오세요.”
결투가 시작되자 메놀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세계 무에타이 킥복싱 미들급 챔피언 메놀은 시합에 들어가는 순간 광전사로 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그와 상대한 선수들은 모두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끈질긴 공격에 결국 무릎을 꿇어야했다.
팡!
공기를 찢어발길 것 같은 날카로운 메놀의 오른발이 서진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스포츠과학센터에서 공식적으로 기록된 가장 강한 킥 중 하나라는 780파운드의 강력한 미들킥이었다.
서진은 글로브를 낀 왼손으로 옆구리를 살짝 막으며 오른쪽으로 스텝을 밟아 체중을 이동시켰다. 아무리 강력한 미들킥이라고 제대로 타점이 맞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메놀은 서진이 자신의 미들킥을 피하면서 일차로 글로브를 낀 왼손으로 막고 이차로 체중을 이동시켜 타점을 흐리고 동시에 타격의 충격을 분산시키는 모습에 눈을 빛냈다.
‘이놈 고수구나.’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서진은 지난 몇 년간 꾸준히 뇌정을 수련하면서 기초체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다. 마루3호가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살아남기 위해서 배울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살상무술과 살인기술들을 끊임없이 갈고 닦으며 연마했다.
과거로 회귀한 후에도 그는 각종 무술의 대가를 초청해 심신을 단련해왔다.
태권도, 택견, 검도, 유도, 합기도, 태극권, 무에타이, 킥복싱, 주짓수, 시스테마, 크라브마가, 필리피노 칼리, 카포에라, 특공무술 등 지금까지 그가 배운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는 족히 될 것이다.
팡 파팡!
메놀은 짧고 빠른 펀치와 킥을 날리며 천천히 접근해왔다. 그의 눈은 매처럼 날카로웠고 그의 근육은 잔뜩 긴장한 상태로 어떤 공격에도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서진은 그의 공격을 피하거나 손으로 비켜내며 오른쪽으로 계속 돌았다.
순간, 메놀의 눈이 서늘하게 빛나며 번개같이 정면으로 짓쳐들어왔다. 몸의 탄력을 이용해 눈 깜짝할 사이에 폭발적인 속도로 파고들어 플라잉니킥을 날리고 있었다. 이건 제대로 맞으면 그대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무서운 공격이다.
이렇게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면 상대는 일단 막던가, 옆으로 피하거나 아니면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서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을 살짝 낮추더니 메놀의 무릎을 손으로 잡아 원을 그리듯 부드럽게 옆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메놀의 몸이 왼쪽으로 기울면서 작은 공간의 틈이 생겼다. 서진은 순식간에 메놀의 몸 일곱 군데를 손으로 툭툭 가볍게 치면서 바람과 같이 그의 몸을 스치고 빠져나갔다.
탁 타타탁 탁탁탁!
메놀은 급히 몸을 돌려 서진의 공격을 대비했다. 그는 분명히 서진이 공격해 들어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서진은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았다.
‘왜 내 몸을 툭툭 치고 지나간 거지?’
거기에다 그는 서진이 자신의 몸을 몇 번 툭툭 치고 지나간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메놀은 일단 머리를 살짝 흔들어 잡념을 털어버렸다.
지금은 시합 중이다. 아니 결투 중이다.
온 정신을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팡!
다시 메놀의 강력한 로우킥이 이어졌다.
서진은 한쪽 다리를 살짝 위로 들었다 놓았다.
이번에는 미들킥을 날려봤다.
서진은 가볍게 뒤로 한발 물러섰다가 다시 앞으로 나왔다.
메놀은 그 모습에 번개같이 앞으로 달려들어 하이킥을 날렸다.
아름다운 곡선이 그려지며 메놀의 발꿈치가 서진의 목덜미를 향했다.
서진은 당황하지 않고 앞으로 한 걸음 더 걸어 나왔다. 그러면서 메놀이 축으로 삼고 있는 왼쪽 발목을 자신의 오른발로 툭 치면서 동시에 손으로 그의 가슴을 휙 밀어버렸다.
툭 투투툭 툭툭툭!
쿵!
놀랍게도 메놀은 너무나도 간단히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메놀은 놀란 눈으로 서진을 쳐다봤다. 그는 자신이 중심을 잃고 쓰러진 것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다.
하이킥을 날리고 쓰러지는 그 짧은 시간동안 서진의 한쪽 손이 자신의 발목과 가슴 그리고 목을 몇 번 툭툭 치는 것을 분명히 보고 느꼈기 때문이다.
메놀의 머릿속에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나의 몸을 툭툭 치고 간 저 손에 만약 단검이라도 하나 들려있었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상상을 해보자 그는 절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발목의 아킬레스건이 잘리고, 심장이 뚫리고, 목의 경동맥이 잘려 피를 분수처럼 쏟아내는 장면이 절로 연상된 것이다.
‘필리피노 칼리다. 세상에 나와 킥봉싱으로 싸우고 있는 와중에 칼리의 동작을 섞어서 썼단 말인가?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
메놀은 천천히 일어났다. 머릿속이 혼란해서 그런지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 모습에 서진이 담담히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들어가죠.”
“네.”
메놀은 서진의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대답이 끝나자 그는 세상에서 태어나 가장 빠르고 많은 횟수의 융단 킥을 만날 수 있었다.
팡 파파파팡 팡팡팡!
엄청난 속도의 로우킥, 미들킥, 하이킥, 니킥이 마구 쏟아졌다.
메놀은 정신없이 막고 또 막았다. 하지만 그의 공격을 100% 전부 다 막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생각보다 데미지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이다.
메놀은 신들린 듯이 움직이며 방어에 혼신을 다했다.
공격은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히 폭포수 같은 공격이 쏟아져 들어와 도저히 틈이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 이 속도에서 힘 조절을 해서 충격을 조절하다니…….’
처음에는 ‘왜 이렇게 킥에 파워가 없지?’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계속 그의 폭포수 같은 킥을 맞아보자 서진이 자신을 크게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지금 그는 자신을 엄청 봐주고 있었다.
메놀은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존경심이 들기도 했다.
저렇게 어린 나이에 이 정도로 무에타이와 킥복싱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니 한 분야의 무술을 이렇게 잘 쓰면서 다른 무술을 또 저렇게 자연스럽게 접목해서 사용하는 자를 그는 단연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미 나보다 한참 고수다. 차라리 한 수 배운다는 자세로 싸우자.’
메놀의 생각이 바뀌자 그의 몸에도 변화가 왔다. 움직임이 훨씬 부드러워지고 방어를 하는 동작에 망설임이 없어진 것이다.
서진은 메놀의 마음에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눈치 챘다. 서진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를 상대했다. 덕분에 그의 현란하고 화려한, 농축된 고급기술을 마음껏 구경하며 몸으로 습득해 적용할 수 있었다.
메놀은 점점 서진과의 결투가 신이 났다. 아무리 자신이 강하게 공격해도 서진은 그것을 다 피해내거나 받아냈기 때문이다. 메놀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한계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써보지 못한 온갖 무에타이의 고급살상기술을 마음껏 펼쳐냈다.
물론 서진에게는 대부분 통하지도 않았고 제대로 걸렸다고 생각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보면 교묘하게 타점을 흔들고 충격을 분산시켜 정타를 하나도 맞은 것이 없었다. 메놀은 그런 서진의 움직임에 혀를 내둘렀다.
“허억, 허억, 허억…….”
얼마나 싸웠을까?
온몸에 비가 오듯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놀라운 것은 자신과 그렇게 격렬히 싸웠던 서진은 조금도 땀을 흘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 하나만 봐도 그와 자신이 얼마나 현격한 실력의 차이가 있는 지 알 것 같았다.
“그만 할까요?”
“허억, 허억! 네, 그만하죠. 제가 졌습니다. 정말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계시군요.”
“천만에요. 오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잘 싸웠습니다.”
메놀은 성큼성큼 걸어와 서진에게 악수를 청했다.
서진은 웃으며 그와 악수를 나눴다.
메놀은 잠깐 마음속으로 고민을 했다.
‘이런 고수야말로 종합격투기 대회에 출전시켜야 한다. 하지만 돈이 엄청나게 많아 보이던데 과연 종합격투기 선수가 되려고나 할까?’
메놀은 결국 마음을 접고 돌아섰다. 서진이 마음을 먹었다면 이미 얼마든지 종합격투기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고 챔피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메놀이 체육관 밖으로 나가자 마이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수고하셨습니다.
“고마워. 그런데 다음은 누구지?”
-주짓수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문디알(mundial: 세계 선수권) 블랙벨트 부문에서 두개의 금메달을 땄고 현재 UFO 세계챔피언 타이틀 보유자인, 현존 최강의 주짓수 파이터 파트라슈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유도의 살인기술을 좀 섞어봐야겠군.”
-파트라슈는 완성도가 높은 고급기술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 분명히 마스터의 수련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도 지금처럼 계속 힘 조절은 하셔야합니다. 아까 메놀과의 대련에서 힘 조절을 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뼈가 108번은 부러졌을 겁니다.
“내가 손에 단검을 쥐고 있었다면?”
-최소한 72번은 즉사했을 겁니다.
서진은 마이키의 분석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들자 문이 열리고 탄탄한 체격을 가진 파트라슈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
‘대격변 이후라야 리미트리스(Limitless: 한이 없는, 무한한) 모드로 싸울 수 있겠군.’
서진의 눈이 새로운 대련상대를 만난 기쁨에 마구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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