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둠레이더-43화 (4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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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 리미트리스(Limitless)

고층빌딩으로 뒤덮인 강남의 밤거리는 화려한 불빛과 네온사인으로 인해 불야성을 이뤘다. 30도를 넘는 폭염은 이미 해가 떨어졌는데도 그 기세가 조금도 줄지 않고 맹위를 떨치고 있다.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해대는 인파의 물결은 강남역사거리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부우우우웅 끼익!

횡단보도 바로 앞 도로변에 검은색 광택이 반짝거리는 마이바흐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조수석에서 이민영이 급히 문을 열고나와 뒷문을 열어줬다.

갈색반바지에 흰색티셔츠를 입은 서진이 차 밖으로 나오면서 이민영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민영도 답례로 밝은 미소를 지었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고마워요.”

서진이 몸을 돌려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분홍색 핫팬츠에 얇은 민소매를 입은 연서가 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순간, 거리를 걷는 사람들과 횡당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연서를 향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지며 감탄사를 터트리기에 바빴다.

이민영도 나름 한 미모 한다는 얼굴인데 연서의 옆에 서자 그냥 달빛에 흔들리는 반딧불이었다.

“우와아아! 쟤 누구냐? 겁나게 예쁘다.”

“모델인가?”

“연예인 아냐?”

“미모가 장난 아니네.”

“역시 연예인은 민간인과 차원이 다르구나.”

“몸매가 정말 끝내준다. 몸매종결자란 쟤를 두고 한 말인가?”

“저건 분명히 가슴성형을 한 거야. 한국인이라면 저런 가슴이 나올 수가 없어.”

“에이, 그놈의 음모론! 그럼 저 다리는 수술해서 늘린 거냐?”

“난 저런 여자 좀 안 걸리나?”

“천사가 따로 없네.”

“네가 천사 봤냐?”

“아니. 그냥 천상에서 살지, 왜 인간계에 내려왔냐?”

사람들은 서진과 연서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곤거렸지만 이미 오감이 극도로 발달한 서진의 귀에는 바로 앞에서 하는 얘기나 다름없이 잘만 들렸다.

‘사람 눈은 다 똑같구나. 역시 연서의 미모는 어딜 가도 주목을 받네.’

서진은 내심 가슴이 뿌듯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느긋하게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자 연서가 뒤에서 총총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서진아! 같이 가야지.”

연서는 서진에게 살짝 눈을 흘겼다.

미인은 뭐를 해도 예쁘다더니…….

저렇게 눈을 흘겨도 서진은 그녀가 마냥 예쁘기만 했다.

그녀는 탄탄한 근육으로 뭉친 그의 팔을 자신의 가슴에 대고 꼭 껴안았다. 그 모습은 마치 절대로 서진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처럼 보였다.

뭉클한 감촉이 느껴졌다. 작년과는 비교도할 수 없을 만한 존재감이다.

확실히 상급포션이 좋긴 좋은가보다. 그녀의 발육이 이처럼 빠르게 진행된 것을 보면 말이다.

‘이젠 꽤 실해졌네. 거의 원형에 가까워졌어.’

서진은 미래의 기억 한 조각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연서는 서진의 얼굴을 쳐다보다 그의 입가에 생겨나는 미소를 발견하곤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의 입가에 절로 행복한 미소가 아름답게 그려졌다.

그때, 그녀를 스쳐지나가는 무수한 수컷들의 심장이 쿵 소리와 함께 일제히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뒤를 돌아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녀의 곁에 건장한 청년이 딱 붙어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들은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멀어져갔다.

“어서 오십시요. 예약 하셨습니까?”

“네, 예약했어요. 민연서에요.”

“아! 특실을 예약하셨군요. 이쪽입니다.”

단장한 외모의 리셉셔니스트가 서진과 연서를 뷔페레스토랑 안의 오붓한 특실로 안내했다.

“분위기 좋지?”

“정말 그러네. 이런 곳은 어떻게 알고 예약했어?”

“위대한 소셜네트워크의 승리라고나 할까?”

“흐음, 인터넷을 통해 찾았구나.”

“호호호, 다 그렇지 뭐.”

연서는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일단 자리를 확인하자 곧바로 밖으로 나가 한바퀴 돌아봤다.

“역시 회부터 먹어야겠지?”

“그럼 난 대게를 가져올게.”

서진과 연서는 서로 눈을 한번 마주치고는 각자 임무를 완수하러 출발했다.

커다란 접시 두 개에 온갖 종류의 회를 가득 담아 자리로 돌아오자 연서가 어느새 커다란 대게 다리를 접시에 수북하게 담아왔다.

“너 그거 다 먹으려고?”

“속살만 발라먹으면 얼마 안 돼. 그리고 해산물은 살도 별로 안 쪄.”

여자들은 뭐든지 자신의 살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듯 했다.

서진의 말은 뷔페에 왔으니 다양하게 먹으라는 뜻이었는데 연서는 다이어트에 문제되지 않느냐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회와 대게를 싹 해치우고 나자 이차원정은 생굴과 초밥을 비롯한 일식을 선택했다. 삼차원정은 LA갈비와 스테이크 같은 고기류를 먹었고, 사차원정은 스파게티와 피자를 포함한 이탈리안 푸드로 해결했다. 마지막 오차원정은 탕수육과 팔보채, 월남국수와 메밀국수로 입가심을 했다. 디저트로 과일과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자 둘은 더 이상 움직일 수조차 없을 만큼 배가 불렀다.

“난 이제 죽어도 못 먹어.”

“나도, 배가 터질 것 같아.”

“확실히 우리 오늘 좀 무리한 것 같아.”

“나야 덩치가 있으니까 그렇다 쳐도 너는 그 몸매로 어떻게 그렇게 잘 먹는지 모르겠다. 많은 음식이 지금 다 어디로 간 거야?”

“헤헤, 내가 좀 많이 먹지?”

“난 밥 잘 먹는 여자 좋아해.”

“그래? 그럼 나중에 나 살쪄도 미워하면 안 돼.”

“그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서진은 연서의 걱정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연서가 미래에 A급 힐러가 되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서진으로썬 그녀의 말은 기우에 불과했던 것이다.

“서진아, 내가 케이크 준비했는데 먹을래?”

“케이크?”

“응.”

“당연하지. 근데 케이크가 어디 있어?”

“여기 있지.”

연서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하고는 종이봉투로 가려놓은 손바닥만 한 미니케이크를 꺼내 서진의 앞에 내려놓았다.

생과일케이크 같았는데 색깔이 무척 곱고 예뻤다.

그녀는 준비한 초를 꺼내 케이크 가운데에 꼽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촛불 불기 전에 우리 같이 사진 찍을까?”

“그래. 인증 샷부터 찍자.”

서진은 연서의 말대로 사진부터 찍기로 했다.

그는 연서의 옆자리로 옮겨와 바짝 붙어 앉았다.

스마트폰을 잡은 팔을 쭉 뻗은 서진은 숫자를 세면서 사진을 찍었다.

“하나, 둘, 셋!”

찰칵!

“혹시 모르니까 몇 방 더 찍어.”

“알았어.”

연서의 말에 서진은 각가지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연서는 서진의 생일에 맞춰 귀여운 표정을 취하기도 하고 섹시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맨 마지막에는 그의 뺨에 키스를 하는 장면도 찍혔다.

아무래도 생일이라서 그런지 나름 서비스를 하려고 작정을 했던 모양이다.

“후욱!”

서진이 촛불을 불어 단번에 꺼버렸다.

짝짝짝짝!

“이건 내가 준비한 생일선물이야.”

“생일선물도 준비했네.”

“당연하지. 내 남자친구인데…….”

서진은 ‘내 남자친구’란 그녀의 말에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선물을 펼치자 안에서 작은 상자가 나왔다.

상자의 뚜껑을 열자 백금으로 만든 반지가 한 쌍이 보였다.

“이거 혹시?”

“맞아. 커플링이야.”

“내 생일날 커플링을 사주는 게 어디 있어? 커플링은 내가 살 테니까 생일선물 사줘!”

서진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따지고 들자 연서가 손으로 입가를 살짝 가리면서 웃었다.

“호호호, 자 여기 있어. 진짜 생일선물이야.”

이미 서진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연서는 백에서 작은 선물상자 하나를 다시 꺼냈다.

“그럼 그렇지. 커플링이 생일선물이 될 수는 없지.”

서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신나는 표정으로 선물상자를 풀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제법 두꺼운 체인으로 세련되게 만들어진 금팔찌가 하나 나왔다. 의외였다.

“어? 이거 금팔찌 아냐? 돈 많이 들었겠는데?”

“응, 그동안 모은 용돈 이번에 거기에다 다 털어 넣었어. 이제 나 완전거지야. 앞으로 자기가 나 먹여 살려야 돼. 알았지?”

“하하하, 알겠어. 연서야, 선물 고마워!”

“서진아, 다시 한 번 생일 축하해.”

쪽!

둘은 누가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자석처럼 착 달라붙더니 입맞춤을 했다.

사귄지 1년이 지났지만 연서는 서진과 입맞춤을 하는 게 아직도 가슴이 설렜다.

“가만 생일축하노래 안불렀잖아?”

“참, 그걸 깜빡했네. 지금이라도 불러줄까?”

“으음, 그건 너무 뒷북치는 것 같고……. 그냥 나를 위해서 노래 한 곡 불러봐.”

“여기서?”

“응, 뭐 어때? 특실에 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둘만 있는 공간이잖아.”

“알았어. 그럼 한번 불러볼게.”

연서는 나름 용기를 내어 노래를 부르기로 결정했다.

확실히 생일 프리미엄이 붙은 날인지 그녀는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노래까지 불러주려 하고 있었다.

연서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짙은 소녀의 감성이 묻어나는 고운 목소리로 이하이의 ‘한숨’을 부르기 시작했다.

숨을 크게 쉬어 봐요 당신의 가슴 양쪽이 저리게 ♬

조금은 아파올 때까지 ♫

숨을 더 뱉어 봐요 당신의 안에 남은 게 없다고 ♩

느껴질 때까지 ♬

서진은 그녀가 노래를 시작하자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녀의 감정이 잘 묻어난 노랫가락이 그의 가슴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리고 저 깊은 곳에 감춰져있던 진한 슬픔과 고통의 편린들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대격변이 일어난 날, 부모님이 마수들에 의해 돌아가시고 자신은 그동안 무슨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날 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외식하러 나가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무참하게 돌아가시진 않았을 텐데…….

부모님이 변을 당한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항상 죄책감에 시달려왔다.

답답하고 괴로워도 누구한테 한마디도 하소연도 할 수 없는 참담한 일이었다.

가슴이 저리도록 아프고 숨이 탁탁 막혀 와도 그저 죄 값을 받는 거라 생각했다.

중대형마수에게 잘못 걸려 사지가 잘려나가고 하반신을 생으로 씹어 먹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 죽어갈 때도 그는 숨 한번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오 박사를 만나 간신히 목숨을 구하고, 안드로이드 전투로봇의 몸체에 의지해 기생하는 대 마수병기 마루3호가 된 후의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간신히 두려움을 극복하고 수많은 사선을 넘기며 인류를 위협하는 중대형마수를 쳐 죽였지만 돌아오는 것은 오물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혐오스런 시선들뿐이었다.

더 이상 아무도 자신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그의 마음은 차가운 돌처럼 굳어져갔다. 감성은 사라지고 인간성은 메마르고 멘탈은 점점 유리처럼 얇아져 언제 박살나도 하등에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이 내쉬는 한숨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이가 갈리도록 뼈가 시리고 머리통이 깨져버릴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과 품이 아니라 오직 마약성진통제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연서의 노래가 그의 영혼 깊숙하게 숨어있던 상처받은 여린 감성을 자극하고 있었다. 아니 힐링시키고 있었다.

누군가의 한숨 그 무거운 숨을 ♪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을까요 ♬

당신의 한숨 그 깊일 이해할 순 없겠지만♩

괜찮아요. 내가 안아줄게요. ♫

정말 수고했어요. ♬

연서의 노래가 끝이 났다.

서진은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신의 눈물을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였다.

“흐윽!”

“서진아…….”

그녀가 놀라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대답 없이 그저 뜨거운 눈물만 흘려댔다.

연서는 자신도 모르게 다가가 흐느끼고 있는 서진의 몸을 꼭 감싸 안아줬다.

“으흐흐흐흑!”

순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해일처럼 쏟아져 나왔다.

서진은 아픔, 고통, 두려움, 외로움, 소외감, 죄의식, 자책감 등으로 버무려진 온갖 감정의 조각들에 폭격당해 손을 바르르 떨며 심하게 오열했다.

연서는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비통한 그의 울음소리에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슈퍼맨 같은 자신의 남자친구가 이렇게 눈물을 보이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연서는 숨겨져 있던 그의 여린 감성을 느끼자 너무나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꼭 그의 몸을 안아줬다.

그리고 그의 귀에 끝도 없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서진아!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그녀의 목소리가 잔잔한 파문이 되어 그의 가슴을 울렸다.

파문은 조금씩 커지며 그의 영혼을 적셨고 깊고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고통과 상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36년간 묵혀뒀던 오랜 비탄의 잔재가 이 순간 비처럼 음악처럼 산산이 스러져가고 있었다.

* * *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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