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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 피의 살육
서진은 크게 외쳤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과연 이들에게 돌아갈 집이나 제대로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당장 자신이 수십 명이나 되는 소녀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아니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혼자라면 모를까 자신이 이들과 같이 밖으로 나간다면 아마 시날로아 조직원들이 소녀들까지 총으로 난사할 것이 분명했다.
“…….”
소녀들은 그의 말에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서진을 쳐다보기만 했다.
서진은 부지런히 문을 땄다. 마음이 착잡했다. 이렇게 밖에는 도와줄 수 없는 자신이 조금은 한심하게 느껴졌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이 행동이 과연 이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때였다.
철창 안에 갇혀있던 소녀 하나가 밖으로 나와 그의 팔을 노크하듯 톡톡 쳤다.
“도와드릴까요?”
“응?”
서진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맑고 깨끗한 파란 눈을 가진 귀여운 소녀 하나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문 여는 것 도와드릴까요?”
“아! 그래줄래?”
“네.”
서진은 환하게 웃으면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헬멧을 쓰고 있어 그의 웃는 얼굴을 소녀는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는 열쇠꾸러미를 풀어서 소녀에게 적당히 넘겼다.
“이름이 뭐니?”
“마리아에요.”
“아주 예쁜 이름이구나.”
“고마워요. 아저씨는 착한 사람 같으니까 제가 싸게 해드릴게요.”
“응?”
서진은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이 굳어버렸다.
마리아는 지금 자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나 있는 것일까?
과연 저게 어린 소녀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환하게 웃던 서진의 얼굴은 찌그러진 깡통처럼 잔뜩 일그러져 흉측하게 변했다.
그는 도저히 자신의 얼굴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다.
헬멧이 그의 얼굴을 가려주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그는 멀쩡히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도 도와주고 싶어.”
“고마워! 엘리사!”
“나도 도와줄게.”
“크리스티나! 그럼 이쪽은 네가 열어줘!”
서진이 마리아의 말에 충격을 받아 버벅거리고 있을 때, 마리아는 이미 이곳에서 사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한쪽 문을 다 열어놓았다.
“아저씨, 정말 손이 느리네요.”
“그, 그러네.”
“이리 주세요. 제가 할게요.”
“고맙다.”
“천만에요.”
마리아는 다시 한 번 말로 서진을 강타하고는 그의 손에서 열쇠꾸러미를 낚아채갔다.
‘아차, 내가 지금 이렇게 멍 때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서진은 제니 생각이 나자 급히 몸을 돌려 철창 맨 끝에 있는 방을 향해 걸어갔다.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자 갑자기 안에서 젊은 여자의 온갖 욕설과 저주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꺄악! 나가! 꺼져! 이 나쁜 놈들아! 난 절대 포기하지 않아!”
서진은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스위치를 찾았다.
전등을 켜자 밝은 불빛에 눈이 부신지 제니가 오만인상을 다 쓰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음?’
서진은 정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제니가 나체로 벽에 묶여 있어서가 아니다. 연한 금발에 갈색의 눈을 하고 있는 제니의 얼굴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라틴아메리카 특유의 풍만한 가슴과 육감적인 몸매는 실로 압도적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뇌정까지 운용해가며 제니가 혹시 어디 다치지는 않았는지 걱정하는 마음으로 온몸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찰칵 찰칵 찰칵…….
그때 그의 귓속에 카메라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메딕, 너 뭐하냐?”
-마스터를 위해 제니의 몸을 다각도로 촬영하고 있어요.
“아니 왜?”
-마스터의 몸이 그걸 원하고 있으니까요. 아닌가요? 혹시 원하지 않으신다면 마스터를 위한 ‘제니컬렉션’작업은 삭제할게요.
“그, 그런…….”
서진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연서의 화난 얼굴이 잠깐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져갔다.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이 더블로 생기면서 제니에게 살짝 혹했던 정신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너 제니 맞지?”
“그러는 너는 누구야?”
“난 너를 구하러 온 사람이다.”
“진짜? 거짓말 아니지? 장난치는 거 아니지?”
제니는 갑자기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리라고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건만 막상 자신을 구출하러 온 사람을 만나자 그만 다잡은 마음이 유리처럼 부서져버렸다.
사실 그녀는 굉장히 무서웠다. 매일 자신이 언제 강간당할지 몰라 공포에 떨어야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당당하게 맞서 싸우고 싶었다. 설사 죽는 한이 있어도 이따위 더러운 마약조직원 놈들한테 정신까지 굴복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니를 납치한 시날로아 조직에서 그녀의 미모를 탐해 어떻게 처리할지 내부적으로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해 잠시 내버려두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수십, 아니 수백 명의 조직원들에게 집단으로 강간을 당하고 죽었을지 모른다.
그녀의 아버지는 멕시코 카르텔과 당당히 맞서 싸우는 용감한 검사로 유명한 ‘로베르토’였기 때문이다.
“줄을 풀어줄게.”
서진은 혹시라도 제니가 놀랄까봐 자신이 지금부터 무슨 일을 할지 얘기해줬다. 제니는 서진의 따뜻한 말에 위아래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묶인 줄이 풀리자 제니는 순간 휘청하더니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너무 오래 묶여 있어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서진은 괜히 전신슈트가 원망스러웠다.
뭉클한 여체가 기대어오자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빌어먹을, 요물이네. 엘프의 피라도 섞였나? 더럽게 예쁘다.’
그는 칭찬인지 불평인지 모를 생각을 하며 제니를 부축했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의 몸이 서진에게 그대로 보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지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확실히 중남미의 여자들이 개방적인가보다.
“고마워요. 저쪽 캐비닛에 제 옷이 있어요. 좀 가져다줄래요?”
“응.”
서진은 방구석에 있는 캐비닛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티셔츠와 반바지 그리고 샌들 하나가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옷가지를 집어 제니에게 줬다. 제니는 자신의 옷을 받아 한번 살펴보더니 그의 앞에서 하나씩 옷을 입기 시작했다. 서진은 갑자기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고 싶어졌다.
“이것뿐이에요?”
“응, 패, 팬티는 없었어.”
“그건 저놈들이 가져갔어요.”
“아니 왜?”
“몰라요.”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다.
서진은 속으로 ‘아차’하며 괜히 쓸데없는 질문을 한 것을 후회했다.
제니가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샌들을 신고 나자 서진은 방안에 있는 생수를 가져와 그녀에게 한 병 건넸다.
“이거 마셔.”
“고마워요.”
제니는 생수병을 받으며 고맙다고 미소를 지었다.
‘심쿵하다.’는 신조어의 참뜻을 깊이 깨울 칠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꺄아아아악!”
“아아악!”
“안 돼!”
그때 밖에서 소녀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서진과 제니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제니의 얼굴이 서서히 공포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서진은 얼른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살짝 흔들었다.
“정신 차려! 그리고 이것 가지고 내가 부를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서진은 자신의 권총을 꺼내 제니의 손에 쥐어줬다.
놀랍게도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권총의 탄창을 분리해 총알을 확인하더니 다시 결합했다. 제니는 권총을 손에 쥐자마자 안정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그녀는 전에 권총을 쏴본 경험이 좀 있는 것 같았다.
잘됐다는 생각에 서진은 그녀를 내버려두고 몸을 돌렸다. 오른손에는 KM1 자동권총을 들고 왼손에 군용대검을 쥐더니 쏜살같이 밖으로 튀어 나갔다.
서걱! 촤악! 철썩!
“꺄악!”
“아아악!”
“크아악!”
서진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마치 몸이 얼어버린 듯 그 자리에 딱 멈춰 섰다.
시날로아 조직원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세 놈이 철창 안으로 들어가 정글도를 마구 휘둘러 소녀들을 무참하게 살해하고 있었다.
“이년들이 감히 도망을 쳐?”
“다 죽어버려.”
“도대체 어떤 놈이 들어와서 이렇게 우리를 열어준 거야?”
그들은 투덜대며 기계적으로 정글도를 휘둘렀다. 그들이 휘두르는 정글도에 맞은 소녀들의 몸이 너무도 힘없이 잘려나갔다. 가만히 보니 도망친 소녀들의 분풀이를 도망가지 않은 소녀들에게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툭툭툭툭툭툭툭!
서진은 굳이 멈추라고 소리치지 않았다. 대신 빠르게 달려가 그들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줬다. KM1 자동권총의 탄창이 빠르게 비워졌다. 동시에 두 놈의 머리통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는 탄창이 빈 권총을 그대로 권총집에 꽂고, 남은 한 놈을 향해 군용대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서진이 정면으로 다가오자 젊은 조직원은 정글도를 대각선으로 크게 휘둘렀다. 단번에 서진의 목을 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공격에 목을 내줄 그가 아니었다.
푹 푹 푹! 슥 슥 슥!
왼쪽으로 한발을 움직인 것만으로 정글도를 쉽게 피해버린 서진은 군용대검으로 정글도를 잡고 있는 오른손에서부터 어깨까지 세 번을 찌르고, 손목의 동맥을 긋고, 목옆의 경동맥을 자른 후, 머리카락을 잡아 돌리면서 순식간에 뒷목까지 깨끗하게 긋고 지나갔다. 이 모든 동작이 단 한호흡으로 끝났다.
젊은 조직원은 정글도를 떨어뜨리며 눈을 찢어져라 크게 뜬 채 자신의 목을 부여잡으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쿵!
서진은 화가 났다.
소녀들은 왜 도망가지 않고 남아서 이런 화를 당했지?
왜 그녀들은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까?
도대체 누가 이 소녀들을 이렇게 만든 거야?
아직도 철창 안에서 벌벌 떨고 있는, 공포에 먹혀버린 소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크게 소리쳤다.
“제니, 가자.”
제니가 문을 살짝 열고 얼굴을 빼꼼히 내밀더니 곧 그를 향해 달려왔다.
서진은 가슴에 분노와 불쾌감이 가득 쌓인 채 초호화목욕탕을 나섰다.
“메딕, 이놈들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내실에서 마약에 취해 잠을 자고 있었나봅니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아냐, 네 잘못이 아냐.”
서진은 마이키와 메딕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전능에 가까운 힘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결코 전능은 아닌 것이다.
그런 것은 아마 신만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좀 더 조심하지 못한 자신의 실수일수도 있다.
아니 이것은 명백한 마약조직 시날로아의 잘못이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넘어가려해도 결코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마스터, 탈출경로로 출발하시죠?
“응.”
-지금 여기서 분을 푸시려고 하시면 제니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알고 있어.”
서진은 메딕의 우려 섞인 말투에 괜히 짜증이 났다.
-제가 대신 분풀이를 해드릴까요?
“어떻게?”
-원하신다면 일대에 있는 시날로아 조직원들을 모조리 제거해버릴게요.
서진은 메딕의 말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무서운 말이다. 메딕은 지금 최소 수백에서 최대 수천 명을 한꺼번에 죽여버리자고 제안하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사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서진은 잠시 고민했다.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냥 그러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한번 막나갔다간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웠다. 마침내 그는 마음을 다 붙잡았다.
“이렇게 하자. 일단 과달라하라의 시날로아 조직을 제타스 조직에서 철저히 말살하도록 도와줘. 그리고 나면 제타스 조직의 뒤통수를 할리스코 누에바 헤네라시온 조직에서 치도록 조종해봐. 그 뒤에 남은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자.”
-그럼 죽여도 되죠?
“아니, 죽이지는 말고 그냥 다시는 못쓸 짓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손을 봐! 무슨 뜻인지 이해했지?”
-네, 알겠어요. 적당히 손발을 끊어놓으라는 말씀이시네요.
메딕은 서진의 말을 그렇게 이해했다. 메딕은 즉시 멀티태스킹을 실시해 ‘과달라하라 카르텔 청소작전’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이봐요? 지금 어딜 가는 거예요?”
제니가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하는 서진에게 물었다. 서진은 메딕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헬멧으로 인해 그녀에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제니는 그가 그저 묵묵히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보면 몰라? 탈출하고 있잖아.”
“그럼 밖으로 나가야지, 왜 이렇게 음침한 동굴 같은 곳을 계속 가는 거예요?”
서진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제니를 보자 실은 그녀가 겁을 집어먹었다는 것을 눈치 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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