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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 보라매던전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얗다.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보라매던전 안의 하늘은 연분홍색을 띄고 있다.
오래보면 절로 미쳐버릴 것만 같은 괴상한 하늘색…….
“여긴 여전하군.”
보라매던전 안으로 들어온 서진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이상하게도 이 돌아버릴 것만 같은 연분홍색 하늘이 오히려 반갑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이곳의 하늘을 오래 쳐다보는 것이 결코 정신건강에 이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연분홍색 하늘과는 달리, 아래쪽은 온통 검은 구름과 흑암이 산과 들을 채우고 있다. 나무는 말라죽은 것 같이 기괴한 모양으로 비틀려져있고 진한 회색의 땅바닥은 영양가를 쪽 빨린 것처럼 푸석하기만 하다. 그래서 절로 죽음이란 단어를 연상케 만들고 있다.
여긴 어디를 봐도 기이하고 괴랄한 풍경뿐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멀쩡해 보이는 것이 하나있었다.
하얀 길!
우윳빛처럼 뽀얗고, 대리석처럼 매끄러운, 넓고 납작한 하얀 돌을 잘 짜 맞춘, 정성스럽게 만든 제법 넓은 길이 하나 있었다.
죽음의 대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하얀 길을 보자 서진은 그나마 숨통이 좀 트이는 것만 같았다.
어둠속을 뚫고……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은 이 하얀 길은 사실 보라매던전의 ‘생명길’로 불린다.
물론 아직은 서진밖에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우우우우우!
어디선가 늑대의 긴 하울링 소리가 들려왔다.
배고플 때 서진의 냄새를 맡기라도 한 듯, 그의 등장을 무척 반가워하는 것만 같다.
‘슬슬 움직여볼까?’
서진은 아공간에서 블루볼을 꺼내려고 앞으로 한 발짝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머릿속에 반가운 알림음이 들려왔다.
[띠링! 띠링!]
[던전 최초진입특전!]
[보라매던전 최초진입특전!]
서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얼른 알림창을 열어 살펴봤다.
[던전 최초진입특전: 차원게이트를 통해 지구최초로 던전에 입장한 자에게 주어지는 행운의 특전이다. 무엇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슬롯머신을 당겨 자신의 운을 시험해보도록 하자.]
지구최초로 던전에 입장한 서진에게 특전을 내린다는 소리였다.
글자 옆을 보니 슬롯머신을 아주 작게 축소시켜놓은 모형이 보였다.
‘이런 것도 있었나?’
그는 이게 웬 횡재인가 하고 놀라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특전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특전을 받았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정보를 오픈하지 않고 함구해버리지 않았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찌됐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행운의 특전을 주겠다니 서진으로썬 춤을 추며 기뻐할 일이었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슬롯머신 모형을 손가락으로 한번 쿡 찔렀다. 그러자 눈앞에 반투명한 커다란 슬롯머신 하나가 툭 튀어 나왔다. 슬롯머신은 3칸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각각 숫자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들을 어떻게 맞추느냐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되는 모양이었다.
‘시작부터 사행성이 다분하네.’
그는 손을 들어 슬롯머신을 만져봤다. 다른 곳은 전혀 만져지지 않고 오직 슬롯머신의 손잡이만 실물처럼 잡혔다.
‘뭐가 나올까? 기왕이면 나한테 도움이 되는 스킬이 하나 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서진은 심호흡을 한번 한 후, 약간의 기대감을 가진 채 슬롯머신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치리릭!
촤르르르르르르르!
슬롯머신의 세 칸의 숫자와 문양이 신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서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며 긴장을 했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르지만 순간몰입도 만큼은 이것을 따라갈 게 없을 듯 했다. 슬롯머신의 숫자와 문양은 한참을 그렇게 돌아가다 왼쪽부터 하나씩 차례대로 서기 시작했다.
‘3…… 3…… 7?’
슬롯머신에 맞춰진 숫자는 ‘337’이었다.
‘뭐야? 337 박수라도 치라는 소리야?’
서진이 의문의 눈빛을 띄우자 슬롯머신이 신기루처럼 사라져갔다. 대신 거대한 목록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나타나자마자 마치 마법의 책이라도 되는 것처럼 혼자 알아서 자동으로 펼쳐지고 넘어갔는데 그 틈으로 황금빛 화살표 하나가 목록을 따라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황금빛 화살표가 337번째의 목록에 멈추자, 마치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특수효과가 일어났다.
팡파랑 파라라 팡파랑!
[띠링!]
[스킬!]
그리고 이미 반복학습을 통해 익숙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서진은 상태창을 열어 ‘던전 최초진입특전’으로 무슨 스킬을 받았는지 확인했다.
[마나부스터(F): 사용자의 마나의 양과 마나회복 속도를 20% 증가시켜주는 성장형 패시브스킬이다.]
서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에는 스킬 등급이 F급이라 급 실망하려고 했다.
하지만 스킬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자 절대 실망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나의 양과 마나회복 속도를 20%씩 증가시켜준다면 당장 그가 가지고 있는 총 마나량이 500에서 600으로 증가한다. 스탯을 이용해서 그만큼 올리려면 보너스 스탯을 열 개나 투자해야 가능한 수치다. 거기에다 마나회복 속도 20% 증가는 덤이다.
결정적으로 마나부스터 스킬은 성장형 패시브 스킬이다. 스킬이 성장할수록 증가하는 마나의 양과 마나회복 속도가 퍼센티지 단위로 증가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패시브 스킬이니 가만히 내버려둬도 알아서 적용이 될 것이다.
한마디로 알아서 잘 키워 써먹으라고 준 스킬이다.
‘이건 나에게 꼭 필요한 스킬이야. 혹시 누가 내 상태창을 보고 있나?’
서진은 괜히 주변을 둘러보며 몰래카메라 같은 것을 찾아봤다.
당연히 던전 안에 그딴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알림창을 닫고 나니 또 하나의 알림창이 허공에 둥둥 떠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즐거워해야할 일이 아직 하나 더 남아있었던 것이다.
[보라매던전 최초진입특전!]
이건 말 그대로 보라매던전에 최초로 진입한 자를 위해 주는 특전이었다. 알림창을 확인하자 이번에는 슬롯머신을 축소해놓은 것 같은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특전의 내용만 보였다.
[보라매던전 최초진입특전으로 보너스 스탯 5개를 드립니다.]
나쁘지 않았다.
보너스 스탯 5개면 레벨업을 5번이나 해야 얻을 수 있는 양이다.
세상에 이렇게 쉽게 보너스 스탯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아마 그것만으로 너도나도 차원게이트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 어디서 차원의 균열이 열렸다는 소리가 들리면 제일 먼저 달려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스타트가 참 좋았다.
이런 기분이라면 언데드 던전인 보라매던전을 혼자 다 쓸어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아직은 그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혼자서 ‘던전 최초진입특전’과 ‘보라매던전 최초진입특전’을 독식한 서진은 자신의 아공간에서 블루볼을 꺼냈다. 지구의 푸른 하늘을 닮은 예쁜 블루볼이 그의 손에 잡혔다.
그는 블루볼의 아공간을 활성화시켜 안에서 캡슐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투명한 강화금속으로 만들어진 캡슐의 덮개가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서진은 마이키와 클론볼을 꺼내 허공에 띄웠다.
블루볼의 아공간에서 마이키가 나오자 곧바로 활성화되더니 블루볼을 비롯한 클론볼을 즉각 통제하기 시작했다.
-마스터!
“마이키, 깨어났구나.”
-드디어 던전에 진입하셨네요.
“응, 보라매던전이야.”
-언데드 던전이군요.
“맞아. 앞으로 잘 부탁한다.”
-천만에요. 오히려 제가 더 부탁드립니다.
마이키는 겸손한 목소리로 서진에게 대답을 하고는 기분이 좋은지 그의 눈앞에서 팽그르르 돌았다. 클론볼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스텔스 & 클로킹 모드로 변해 사라져갔다.
“로이, 나와라.”
“네, 마스터.”
로이가 눈을 뜨자 서진이 그의 몸 위에 올려놓았던 전투도끼와 대형 타워실드를 치워주며 캡슐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로이가 즉시 일어나 캡슐 밖으로 빠져나왔다.
서진은 그에게 전투도끼와 타워실드를 넘겨주고 버튼을 눌러 캡슐의 덮개를 닫았다. 블루볼 안에 캡슐을 집어넣은 서진은 자신의 무장을 확인했다.
전신슈트, 레드볼, KM1 자동권총, 보위나이프!
일단 서진은 KM1 자동권총을 배제하기로 했다. 언데드에게 권총은 살상효과도 미미할 뿐만 아니라 총알도 아까웠다. 그는 KM1 자동권총을 블루볼 안에 던져 넣었다.
사실 언데드에게는 철퇴 같은 둔기가 효과가 좋았다. 아쉽게도 블루볼에는 둔기를 넣어놓지 않았다.
결국 그의 오른손엔 자신의 전용무기인 레드볼이 쥐어졌다.
왼손에는 보위나이프를 들었다.
“로이, 가자.”
“네, 마스터!”
로이가 힘차게 대답을 하고는 앞장을 섰다.
서진은 그의 뒤를 따라 우윳빛 하얀 돌이 깔린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이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이키는 어느새 스텔스 & 클로킹 모드로 들어가 자신의 모습과 존재감을 완전히 지운 채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있었다.
-마스터, 죽음의 대지와 영혼의 성 중 어디부터 가실 예정이십니까?
“일단 죽음의 대지부터 가보자.”
-좀비를 잡으실 계획이십니까?
“아니. 좀비는 패스할 거야. 스켈레톤부터 시작하자.”
-네, 마스터.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하겠습니다.
“응.”
좀비(F-)는 최하급 언데드 중에서도 가장 약한 축에 들어간다.
물론 좀비 중에는 등급이 F 나 F+ 인 놈도 간혹 존재한다.
하지만 서진은 자신의 등급이 F 라서 등급이 F+ 이상인 언데드를 잡는 것이 레벨업에 유리했다.
스켈레톤(F+)은 최하급 언데드 중에서도 가장 강한 축에 들어가니 사냥하기 딱 좋았다. 거기에다 스켈레톤 상위개체들은 하급 언데드가 많았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서진과 로이의 발걸음 소리가 주변으로 울려 퍼지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사방에서 기괴한 울음소리와 참혹한 비명이 들려왔다.
어으으으으으!
휘어이 휘어이!
캬아아오오오!
크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정신력이 약한 사람이라면 당장 겁을 먹고 부들부들 떨면서 오줌을 지릴만한 끔찍한 소리들이었다.
그러나 서진과 로이는 전혀 저따위 소리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아예 처음부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싹 무시하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1km 쯤 안으로 들어가자 두 개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왔다.
서진은 망설이지 않고 왼쪽 길을 택해 걸어갔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죽음의 대지가 그들의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공동묘지!
낮은 구름을 중심으로 넓은 대지에 끝도 없이 묘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서진의 머릿속에 한 개의 단어가 떠올랐다.
‘좀비 밭!’
죽이고 또 죽여도 끊임없이 좀비가 나타난다고 해서 예전에 그렇게 불렀던 기억이 났다. 서진은 길 한쪽에 서서 그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좀비들을 보고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가던 길은 계속 걸어갔다.
신기하게도 좀비는 절대 하얀 돌로 만들어진 길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보라매던전 안의 그 어떤 언데드도 절대 하얀 길을 침범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길을 생명길이라고 불렀다.
언데드를 잡다가 다치거나 위험해지면 이 하얀 길까지만 도망 오면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캬오오오오!
크르르륵 크르르륵!
으거어어어!
수십 마리의 좀비 떼가 길옆에서 서진과 로이를 향해 아우성을 쳐댔다.
흉포한 눈빛에는 살아있는 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의와 피에 대한 갈증만 가득했다.
적의가 가득담긴 좀비의 눈빛들…… 그래봤자 서진에게는 실상이 없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그는 죽여 봤자 별 영양가도 없는 놈들을 굳이 상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조금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30분쯤 걸었을까?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고약한 냄새가 점차 사라지고 대신 등골이 오싹해지는 섬뜩하고 차가운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다.
서진의 머릿속에 또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스켈레톤 밭!’
‘좀비 밭’을 능가하는 해골바가지들의 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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