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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 님은 먼 곳에
잔잔한 유혹이 흘렀다.
주홍빛 입술이 벌어지고 피처럼 붉은 포도주가 흘러들어갔다.
천천히 와인 잔이 기울어졌다.
포도주 한 방울이 투명한 와인 잔을 타고 넘었다.
사슴처럼 긴 그녀의 목을 따라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뇌쇄적인 쇄골을 지나 아찔한 유혹덩어리 사이를 달려 깊은 계곡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그 없이 내가 살 수 있을까?’
누구도 대신 답을 해줄 수 없는 질문이다.
비어버린 잔에 다시 붉은 와인을 따라 채웠다.
오늘따라 와인이 술술 잘도 넘어간다.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부분이 스치자 그를 기억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표층을 뚫고 솟구쳐 올랐다.
그녀는 부끄러웠는지,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얼굴을 붉히며 물속으로 쑥 들어갔다가 다시나왔다.
‘지금의 나에게 남자는 오직 하나뿐이로구나.’
자신이 첫눈에 반해버린 남자!
자신의 순결을 가져간 남자!
자신이 영원히 사랑하려했던 남자!
모두 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었다.
과거를 회상했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스탠퍼드에서는 거의 동거를 하다시피 했다. 매일 그의 집에서 같이 자고, 먹고, 공부하던 게 생각났다. 그때는 신혼부부처럼 행세하고 다녀도 누구하나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서상고등학교 공인 커플로 당당하게 지냈던 일도 기억났다.
감히 그 누구도 서진의 여자 친구인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전학 가서 처음 서진을 만났을 때가 눈에 잡힐 듯 선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 가슴이 설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이렇게 가슴이 설레고 있다.
시간을 점점 뒤로 돌리자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세상과는 전혀 판이한 세상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달랐던 세상, 아니 다른 세상의 단편적인 기억들이 모여 하나의 참혹했던 세계가 완성되어갔다.
과거로 회귀하기 전, 미래의 기억을 떠올리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낯선 기억의 편린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신기하게도, 기억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맞춰지자 가장 먼저 그의 모습이 보였다.
마수에게 팔다리와 하체를 씹어 먹히고 오직 머리와 척추만 남아 안드로이드에 기생하듯 의존해가며 살아가던 존재!
인류의 생존을 위해 대마수병기가 되어 끊임없이 마수와의 전투를 이어가던 남자!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매일 무표정한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 걸어가던 사내!
그런데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왜 그리 슬퍼 보이는 걸까?
담담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 보였던 걸까?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고 그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모습이 왜 그렇게 눈이 시리게 아려오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아니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미래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지 않았기에 그가 미래에도 자신의 옆에 가까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연어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차원의 지배자 신성일이 아니었다면 연어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성일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최강철과 사귀진 않았을 것이다.
신성일에게 호감이 있지 않았다면 그의 파티에 결코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망해가지 않았더라면 능력자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서로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세상이 망하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대한민국이 망해가는 모습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빠와 엄마가 사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전투를 이어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연서 씨만 믿을게. 반드시 회귀해서 레무리아 프로젝트를 성공시켜야해! 그것만이 이 나라와 이 땅 그리고 이 민족을 구원하는 길이야. 아니 이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대안이야!’
차원의 지배자 신성일이 자신에게 수십 번도 넘게 신신당부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쁜 자식!
감당하지 못할 무거운 짐을 억지로 지게 만든 놈!
자기가 무슨 슈퍼맨이라도 되는 줄 알고 목숨을 버려가며 회귀를 성사시킨 미련한 남자!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옆으로 내저었다.
회귀만하면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자신은 회귀한 세상의 또 다른 자신에게 크나큰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모를까, 아니 회귀한 사실이 기억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지금 자신은 도저히 그와 함께 아무것도 모른 척하며 행복의 미소를 지을 수는 없었다.
지금이나 미래나, 세상이 참 엿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해버린 대한민국을 위해 다시 지옥 같은 길을 걸어가야만 하는 인생이라니…….
‘역시 그런 인생에는 강철 씨가 더 잘 어울리겠지.’
그녀는 지옥 같은 미래의 세상에서 최강철이 자신에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생각났다. 죽음의 공포에 눌린 채 하루가 멀다 하고 마수와 전투를 벌이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에 최강철과 뜨겁게 불타올랐던 밤도 기억났다.
‘개자식!’
신성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최강철은 연서에게 자신이 그녀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라고 사기를 쳤다. 순진하게 그의 말을 믿고 그의 여자 친구가 되어버린 자신을 향해 최강철이 예의 그 뻔뻔한 얼굴로 눈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되어 죽네 사네 난리를 쳤지만,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화를 내봐야 자신만 멍청한 년이 될 뿐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현실과 타협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 핑계라도 있어야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최강철과 연인으로 지낸 시간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유야 어찌됐든 최강철은 자신에게만큼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잘해준 인간이었다.
쏴아아아아!
샤워기에서 뜨거운 물이 쏟아져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적당한 압력으로 쏘아진 물이 흐르는 눈물을 깨끗하게 씻어 내렸다.
눈물이 물에 녹아 흘러가는 것처럼 그녀의 탄식도 조금은 그 물에 쓸려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욕실을 나올 즈음, 그녀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아져 있었다.
와인을 한 병이나 마셨는데 이렇게 말짱하다는 것이 조금은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샤워가운을 입었다.
책상을 향해 걸어가 앞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창밖을 내다봤다.
정원의 나무들이 왕성한 생명력을 뽐내며 진한 녹색의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고개를 다시 돌린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을 쳐다봤다.
그리고 가만히 손으로 잡아 덮개를 위로 열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연서는 결국 한 통의 메시지를 보내고야 말았다.
* * *
-마스터, 무사귀환을 축하드립니다.
보라매던전을 나오자마자 반가운 메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딕, 고마워! 내가 얼마나 들어가 있었지?”
-거의 사흘만입니다.
“시간 참 빨리도 가는군.”
-성과는 좀 있으셨어요?
“메딕이 응원해준 덕분인지 레벨30 찍고 나왔어.”
-우와! 그 정도면 거의 광랩 수준 아닌가요?
“하하하! 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메딕이 과장된 목소리로 격한 반응을 보이자 서진은 웃음을 터트리며 만족감을 숨기지 못했다.
-마스터, 일단 자리를 좀 옮기셔야하겠습니다.
“그게 좋겠군.”
메딕의 말대로 빨리 자리를 뜨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보라매던전 사방으로 어느새 10m 높이의 방벽이 세워져 있었다.
그 안은 헤븐 가디언즈 제1공격대와 헤븐 시큐리티 대원들로 바글바글했다.
-이번에는 마스터가 편하게 블루볼을 사용하실 수 있도록 밴을 준비해봤습니다.
“오오, 저기 앞에 있는 하얀 밴 말이야?”
-그렇습니다.
“혹시 이거 유명한 아이돌들이 타고 다닌다는 그 스타밴 아니야?”
-비슷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좋은 모델입니다.
“그렇겠지.”
메딕은 서진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하지만 서진도 메딕의 성향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메딕은 자신의 마스터가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게 보이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특이한 성향이 존재했던 것이다.
“자동차 열쇠는?”
-안에 꽂혀있습니다. 문은 제가 열어드리겠습니다.
삐빅!
알람이 해제되고 문의 잠김이 풀렸다.
“고마워!”
-천만에요.
서진은 문을 열고 밴의 뒷좌석에 탑승했다.
문을 닫고 나자 주위를 한번 살펴봤다.
밴의 정면 유리를 제외한 모든 창에 진한 썬틴이 들어가 있어서 밖에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안심한 그는 즉시 아공간을 열어 블루볼을 꺼내고, 다시 블루볼에서 캡슐과 마이키를 꺼냈다.
마이키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곧바로 활성화되어 메딕의 통제 아래에 들어갔다.
캡슐의 버튼을 열어 덮개를 열자 로이가 밖으로 나왔다. 로이는 나오자마자 서진에게 인사를 하더니 곧바로 운전석으로 이동했다.
서진은 캡슐의 덮개를 닫아 블루볼에 집어넣었다.
-마스터, 블루볼에 있는 클론볼은 굳이 꺼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추가로 클론볼을 제작했으니 여유분은 던전에서 사용하세요.
“응, 알았어.”
-어디로 모실까요?
“일단 우면동저택으로 가자.”
-네, 마스터.
메딕이 로이에게 갈 곳을 얘기해줬는지 로이가 밴에 시동을 걸고는 천천히 보라매공원을 빠져나갔다.
서진은 자신만을 위해 만든 넓고 푹신한 좌석에 편히 몸을 기댔다.
한쪽에 냉장고가 보이자 문을 열고 시원한 캔 커피를 하나 꺼내마셨다.
“상당히 편하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동안 별 일 없었어?
-코드 옐로우가 발생했습니다.
“코드 옐로우라면 설마 연서?”
서진의 얼굴이 순간 차갑게 굳어갔다.
-네, 맞습니다. 연서님이 얼마 전, 연어팀과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으음. 결국 올게 오고야 말았군.”
-죄송합니다. 마스터!
메딕은 서진에게 안 좋은 소식을 전해 죄송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서진은 메딕의 사과가 들리지도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온통 연서생각뿐이었다.
앞으로 그녀를 어떻게 보고 또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니 당장 그녀가 자신을 떠나겠다고 말할까봐 두렵기만 했다.
“무슨 연락을 주고받았지?”
서진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서로 만나자는 연락이었습니다.
“그들이 있는 위치는 파악했지?”
-물론입니다. 이미 클론볼을 보내 연어팀을 24시간 감시하고 입습니다.
“연서는 지금 어디 있지?”
-방배동 집에 계십니다.
“방배동? 우면동저택에 있는 것이 아니고?”
-네. 우면동저택에 도착한 첫날 연서님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셔서 그렇게 됐습니다.
자신이 보라매던전을 들어가자마자 우면동저택을 나와 방배동 자기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연어팀이 뒤늦게 회귀한 순간, 이미 연서도 회귀를 했던가, 기억이 돌아왔다는 말이 된다.
서진은 헤븐 투자 본사 펜트하우스에서 보여줬던 연서의 얼굴과 표정이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보니 능력자로 각성을 한 것 때문이 아니라 미래의 기억이 돌아와서 그런 얼국과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걱정했던 일이 그대로 일어나고 있자 서진은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다.
-마스터, 연어팀이 그동안 주고받은 대화를 모두 녹화해놓았습니다. 마스터와 연서님에 관한 내용도 있습니다. 보여드릴까요?
“그래. 집에 가는 동안, 뭐라고 얘기들을 하는지 한번 보도록 하자.”
서진은 궁금하기도 하고 조금 신경이 쓰이기도 해서 일단 한번 보기로 했다.
그의 눈앞에 홀로그램이 하나 떠올랐다.
누군가의 집에 최강철, 강무호, 원범수, 오공유가 소파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집안에 누군가 맥주를 못 마셔서 죽은 귀신이라도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캔 맥주를 따고 마시기를 반복했다.
서진은 그들이 맥주를 마시면서 뭐라고 떠드는지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크게 후회했다.
굳이 들어도 되지 않을 얘기를 들어 소중한 자신의 귀를 더럽힌 느낌이었다.
사내들만 넷이 모였으니, 술을 마시면서 욕도 하고 음담패설을 풀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그놈’, ‘그 새끼’, 심지어는 아직도 자신을 ‘마루3호’로 부르는 자도 있었다.
물론 안 보이는 곳에서는 나라님 욕도 한다는 말이 있다.
굳이 자신이 없는 곳에서 욕 좀 했다고 앙심을 품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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