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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장 -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1시간을 더 달리자 이번에는 제니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제니, 괜찮아?”
“네, 괜찮아요. 허억 허억!”
아무리 봐도 괜찮지 않았다.
서진은 즉시 제니를 자신의 등에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제니의 풍요로운 가슴이 그의 등을 부드럽고 압박하자 기분 좋은 물컹한 감촉에 절로 신경이 등으로 쏠렸다. 더불어 제니의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서진은 누구보다도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모른척했다.
들판에는 온갖 마수들이 무리를 짓고 있었다.
임프, 오르그, 블러드울프, 헬독, 켈베로스 등이 서로 전투를 벌이며 세력을 넓히고 있었고 나이트롤, 카카오커, 티클롭스, 미노타우로스, 바실리스크, 드레이크 같은 중대형마수들이 그 사이에 끼어 한 끼 식사를 가볍게 해결하는 모습도 간간히 보였다.
하지만 그 어떤 마수들도 감히 베히모스의 냄새를 맡고 얌전히 있지는 못했다.
공포에 질려 오줌을 지리거나 놀라서 급히 몸을 피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서진은 만약 자신들이 베히모스의 가죽을 얻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해보다 절로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3시간을 넘게 달리자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서진은 더 이상은 무리라고 보고 잠시 쉬었다가기로 했다.
“마이키, 쉴 곳을 찾아줘!”
-2km만 더 가면 지하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그곳에서 쉬었다 가시면 될 겁니다.
“거긴 안전한 곳이야?”
-즉시 클론볼을 보내 확인해보겠습니다.
마이키는 말이 끝나자마자 가장 가까이에 있는 클론볼 하나를 지하 동굴로 보내 안전한지 확인을 시켰다. 그들이 지하 동굴이 있는 근처에 다다르자 마이키는 서진에게 확인 결과를 알려줬다.
-마스터, 지하 동굴 500m 안까지는 아무런 위험이 없습니다. 더 이상은 시간이 없어서 확인해보지 못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우리가 야영을 할 것도 아니고 잠시 쉬었다 갈 거니까.”
-네, 마스터.
서진은 곧 연합파티를 이끌고 마이키가 허드에 표시해둔 지하 동굴로 들어왔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간다.”
“네, 마스터.”
다들 서진의 말에 힘없이 대답을 했다. 꽤나 지친 모양이었다.
강무호와 원범수가 그대로 바닥에 대자로 자빠진 채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얘기를 나눴다.
“후와! 정말 오랜만에 빡세게 달렸네.”
“난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옆에서 보니까 연서가 간간히 힐 넣어주던데…….”
“그걸로 체력이 회복 되냐? 뻔히 안 되는 줄 알면서 그러네.”
“시끄러우니까 그냥 물이나 마셔.”
연합파티원들은 다들 시원한 동굴 벽에 각자 알아서 자리를 잡고는 앉아서 물을 마셨다. 덩치가 큰 탱커들은 체력소모를 생각하는지 육포를 꺼내 씹어 먹기도 했다.
제니와 마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눈치를 보던 민연서가 뒤따라갔다.
서진은 여자들이 볼일을 보러가나 보다 생각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는 생수 한 병을 꺼내 꿀꺽거리며 다 마신 뒤 육포를 몇 개를 씹어 먹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강백호와 우동면도 육포를 씹고 있었는데 아직도 쌩쌩해보였다.
확실히 체력은 탱커들이 좋은 것 같았다.
30분이 지나자 다들 충분히 체력을 회복했는지 얼굴들이 멀쩡해졌다.
“그럼 다시 달려볼까?”
“네, 마스터.”
서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들 뒤따라 일어나며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었다.
그때 최강철이 누군가를 찾는지 고개를 좌우로 마구 돌리다가 결국 서진을 쳐다보며 보고했다.
“마스터, 연서가 안보입니다.”
“민연서가?”
서진은 최강철의 말에 고개를 돌려 민연서를 찾아봤다.
제니와 마리까지 다 있는데 정말 민연서만 보이지 않았다.
“제니, 민연서 못 봤어?”
“못 봤는데요?”
“마리는?”
“저도요.”
“아까 같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어?”
“같이 안 갔는데요.”
“그래?”
제니와 마리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오히려 민연서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 했다.
서진은 미간을 좁히며 살짝 인상을 썼다.
이런 곳에서 민연서 때문에 발목이 잡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지금 뭐하자는 거지? 나와 숨바꼭질이라도 하자는 건가? 아니면 진짜 무슨 사고라도 생겼나?’
처음에는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의심하던 서진은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고가 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마이키, 즉시 지하 동굴 안을 수색해서 민연서를 찾아!”
-네, 마스터.
마이키가 클론볼을 움직여 지하 동굴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마이키, 민연서에게 붙여놓은 클론볼은 어디 있어?”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습니다만 10분 전부터 신호가 끊어졌습니다.
“그걸 왜 지금 말해?”
-지하 동굴에 도착한 다음부터 클론볼들과의 통신이 자주 끊어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어서 저도 원인을 파악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유는?”
-아직도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천하의 마이키가 모르겠다는 데야 서진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마스터, 저희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수색해볼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모두 꼼짝하지 말고 여기서 쉬고 있어.”
서진은 최강철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대신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지키는 로이만 그의 뒤를 조용히 따라왔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서진과 로이의 발소리가 지하 동굴을 은은하게 울렸다.
-마스터, 지하 동굴 안에는 소형마수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습니다. 너무 깊이 들어가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래도 민연서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야할 것 아니야?”
-그래서 직접 추적을 하시려는 겁니까?
“맞아. 내가 직접 찾을 거야.”
마이키는 서진의 목소리가 은근히 고집스럽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대신 클론볼들이 찾아온 민연서의 흔적을 보여줬다.
-마스터, 민연서의 발자국을 발견했습니다.
“잘했다.”
서진은 마이키가 보여주는 민연서의 발자국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손바닥보다 작은 민연서의 발자국이 동굴의 먼지 위에 미세하게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녀의 발자국을 마킹하고 레이더 위에 띄웠다. 그러자 그의 고유능력 이지스가 발동하며 그녀의 흔적을 자동으로 탐지하고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붉은 화살표가 지하 동굴 안으로 점점이 이어져갔다.
‘볼일을 보려고 했으면 여기서도 충분했을 텐데 왜 동굴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거지?’
서진은 붉은 화살표를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마이키가 클론볼들이 가져온 정보를 이용해 빠르게 지하 동굴의 지도를 만들고 있어 수시로 허드에 업데이트를 해줬다.
지하 동굴은 200m만 안으로 들어와도 여러 개의 통로로 나눠졌고, 500m를 넘자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켰다.
만약 민연서가 지하 동굴에 사는 마수들에게 잡혀 끌려가기라도 했다면 그녀를 찾느라고 고생께나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서진은 아직 그런 걱정까지는 하지 않았다. 붉은 화살표를 통해 그녀의 흔적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녀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끌려간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으음?’
그때였다.
붉은 화살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려던 서진은 전면의 동굴 안을 보자 뭔가 섬뜩한 느낌이 들어 절로 걸음을 멈췄다.
빛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이 그의 눈앞에 존재했다.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뭔가 소름끼치도록 불길하고 거부감이 드는 부정한 어둠이었다.
‘매직미사일!’
서진은 일단 매직미사일을 소환했다. 그의 머리위에 매직미사일 7개가 쑥 떠올랐다.
‘이상하다. 레이더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데……. 색적!’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색적스킬을 발동했다.
그러자 탐지거리 내에 있는, 동굴 안에 숨어있는 모든 마수들이 적대적인 수위에 따라 농도가 다른 붉은 점으로 표시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바로 앞에 있는 동굴 안에는 아무런 표시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단 매직미사일로 쓸어버릴까?’
서진의 눈에서 서서히 시퍼런 살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불길한 눈앞의 동굴 안을 일단 초토화시킨 후 들어가서 확인해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맥을 탁 풀게 만드는 마이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민연서가 돌아왔습니다.
“그래? 어디야?”
-연합파티의 파티원들과 같이 있습니다.
“다행이군.”
서진은 마이키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전면의 동굴 안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해보다 굳이 자신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기로 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서진과 로이가 멀어져가자 완벽한 어둠으로 싸여있던 동굴 안에서 두 개의 새까만 눈동자가 잠깐 나타났다 사라져갔다.
* * *
“연서 씨, 어떻게 된 거예요?”
“미안해요. 도중에 길을 일어서 좀 헤맸어요.”
“그런데 어떻게 동굴 밖에서 들어와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다 보니 동굴 밖에 나와 있더라고요.”
민연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최강철에게 말했다.
최강철은 그래도 천만다행이라는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일행이 쉬고 있는 곳으로 데리고 왔다.
연합파티원들은 민연서가 길을 잃었다는 말에 동정어린 눈빛을 보이며 놀라지 않았냐고 위로를 했다.
하지만 민연서를 바라보고 있던 서진만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마이키, 민연서의 몸을 스캔해봐!”
-네, 마스터. 양손에 피가 흘렀다가 닦인 흔적이 있습니다. 신발에 묻은 먼지의 흔적을 보건대 동굴 밖을 돌아다닌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외에는 특별히 다치거나 위협을 당한 흔적, 혹은 수상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녀의 말대로 동굴 안에서 정말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어쩌다보니 동굴 밖으로 나와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는 말이네.”
-민연서가 말을 할 때 신체반응을 확인했습니다. 일단은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그녀의 말이 100% 진실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애매하군.”
서진은 민연서의 행동을 의심하기도 그렇고 그냥 잊고 지나가기고 찜찜해서 영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그럼 민연서에게 붙여놓은 클론볼은?”
-행방이 묘연합니다. 분명히 동굴 안에서 마지막으로 신호가 끊어졌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통제에서 벗어난 클론볼에는 자폭기능이 있습니다. 이쪽에서 통제를 완전히 푸는 순간 마법에 의해 자폭하게 됩니다.
“으음, 할 수 없지. 우리가 동굴을 떠난 뒤에 통제를 풀어!”
-네, 마스터.
마이키의 대답을 듣고 난 후, 서진은 헬멧의 안면가리개를 위로 올리고 민연서에게 다가갔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앞으로 개인행동은 일체 불허한다. 모두 그 점 유의하도록!”
“네, 마스터.”
민연서는 서진이 하는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서진은 민연서의 멀쩡한 손을 한번 쳐다보고는 곧 몸을 돌렸다.
“충분히 쉬었으니 이제 다시 출발하자.”
“네, 마스터.”
연합파티원들이 한목소리로 동시에 대답하며 차례로 지하 동굴 밖으로 빠져나갔다.
제일 마지막으로 나온 서진이 잠시 몸을 세우고 고개를 돌려 동굴 안을 노려봤다.
그러더니 동굴을 향해 씨익 썩소를 한번 날려주고는 곧바로 출발명령을 내렸다.
“출발!”
서진의 명령에 따라 연합파티원들이 북동쪽을 향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선두는 베히모스의 가죽을 메고 있는 강백호였고 맨 마지막은 서진과 로이였다.
클론볼을 통해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하나의 줄, 아니 뱀 한 마리가 물 위를 빠르게 나아가는 것만 같았다.
뭐든지 자꾸 하면 느는 법이다.
파티원들은 처음과는 달리 벌써 달리는 일에 아주 익숙해진 모습들이었다.
궁!
멀리서 낮은 폭음이 들려왔다.
달리고 있던 서진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마스터, 행방불명됐던 클론볼이 자폭했습니다.
“위치는?”
-아까 그 동굴입니다. 지형이 대폭 주저앉은 것으로 봐선 동굴의 반 이상이 무너져 내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서진은 마이키의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지하 동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민연서가 지하 동굴 안에서 잠깐 사라졌다 나타난 것이 찜찜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뭘 의심해볼만한 구석도 없었던 것이다.
우두두두두두!
우두두두두두!
서진을 포함한 연합파티는 쉬지 않고 꾸준히 달렸다.
그들이 들판을 질주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갔다.
주변에 있던 마수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이 달리는 모습을 한 번씩 쳐다봤지만 놀라서 도망가거나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는 한 개의 태양과 두 개의 달이 떠있었다.
새하얀 구름은 그들과 밀당이라도 하듯 살짝 가렸다가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지평선 아래로 푸르른 평원이 넓게 펼쳐져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 거대한 규모의 하얀 성이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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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하고 유쾌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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