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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장 - 라인하르트 캐슬
란돌프는 보지 않고도 대충 머릿속으로 남은 양이 저절로 계산이 되는 모양이었다.
“맞습니다. 남은 반 중에서 절반은 드워프 공방에 넘기겠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이미 메탈리온 성주와 약속한 내용입니다.”
“오오오! 그렇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뭐든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만하시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다 해주지.”
“말씀만 들어도 감사합니다.”
“무슨 소린가? 드워프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죽음으로 지키는 명예로운 장인들이네. 우리에게 허언이란 있을 수 없어.”
“그렇군요. 역시 드워프는 정말 위대한 장인들이군요.”
란돌프는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호기롭게 말했다. 서진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에 바로 맞장구를 쳐줬다.
“저어! 혹시 남은 베히모스의 가죽은 저희에게 주시면 안 될까요?”
“네?”
“엘프 공방에서도 베히모스의 가죽이 필요합니다.”
“그렇군요. 그럼 엘프 공방에서는 저희에게 대가로 뭘 주실 생각이십니까?”
“네?”
아리아나는 서진이 돌연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물어오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아무런 대가없이 보물을 그냥 가져가려는 것은 아니시겠죠?”
“아, 아니 그건 아닙니다만…… 드워프 공방에는 그냥 주셨잖아요.”
아리아나는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진이 베히모스 가죽을 쓰고 남은 가죽의 절반을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은 채 드워프들에게 준 것을 언급했다.
그러자 서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크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야 드워프들은 위대한 장인들이라 절대 친구에게 선물을 받고 그냥 입을 딱 씻지 않을 것을 믿고 그랬죠.”
“네? 그럼 저희는 그냥 입을 딱 씻을 것이라고 생각한 건가요?”
아리아나의 미간이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가더니 목소리의 톤마저 날카롭게 변했다. 하지만 서진은 아리아나의 그런 모습에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저는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다만 그만큼 드워프들은 위대한 장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으음.”
서진은 시종일관 드워프들을 치켜세웠다. 란돌프는 서진의 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하! 서진! 이 친구 정말 우리 드워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구먼. 드워프 하면 의리, 의리가 아니겠는가? 당연히 우리는 친구의 선물을 공짜로 탐하거나 받고 입을 씻지 않지. 그리고 우리에겐 친구에게 선물할 물건들이 아주 많거든. 이건 일단 우리가 가져가지.”
아리아나는 눈을 곱게 흘기며 자신의 손에서 블루볼을 탁 채어가는 란돌프를 쳐다봤다. 미인은 뭐를 해도 아름답다고 하더니 정말 엘프인 아리아나가 눈을 흘기는 모습이 어쩜 그렇게 예쁜지 서진은 속으로 거듭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엘프가 드워프에게 백날 눈을 흘겨봤자 그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란돌프는 그녀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소가 닭 보듯 했다.
‘저런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자신들이 호구가 된 줄도 모르고 있어.’
아리아나는 란돌프의 어리석음을 마음속으로 비웃어주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서 서진을 쳐다봤다. 생각보다 자신의 미모에도 흔들리지 않고 절대 만만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서진을 어떻게 구워삶을까 목하 고민 중이었다.
‘베히모스의 가죽을 얻으려면 아무래도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00m x 100m x 100m 정도 되는 아공간은 만들어줘야겠지.’
아리아나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출혈이 크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베히모스의 가죽을 얻는 것이 더 큰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조금 더 양보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서진은 결코 드워프를 벗겨먹으려는 생각이 없었다. 정당하게 드워프와 거래를 하고 신용을 쌓아 오랜 친구 같은 파트너를 삼으려는 장기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란돌프가 한 가지 도와주셔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남은 베히모스의 가죽 사분의 일을 저희를 대신해 팔아주셨으면 합니다.”
“왜 직접 팔지 않고?”
“저희가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사실 정확한 가치를 매기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드워프 장인들은 신용을 생명으로 알고 있으니 절대 저희를 속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공정한 드워프에게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흐음, 듣고 보니 드워프가 아니면 이런 일을 훌륭히 해낼 종족을 찾기 힘들겠구먼! 알겠네. 내가 경매에 붙여 최고가를 받아주겠네.”
“고맙습니다.”
순간 아리아나는 입을 딱 벌리며 놀라워했다.
잠깐 고민을 하는 사이에 갑자기 일이 급진전되어버렸던 것이다.
‘경매? 경매라고?’
아리아나는 과연 경매에서 자신들이 이길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라인하르트 캐슬은 호미니드 행성에서 온 엘프, 드워프, 묘인족, 호인족, 호미트, 페어리 등 유사인류와 수인족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 이성적으로 경매를 하기 보다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지르는 것이 일반화된 종족들이었다.
거기에다 베히모스의 가죽이라면 호미니드의 그 어떤 종족이라도 탐을 내지 않을 수 없는 보물이자 마수의 가죽 중에서 최고로 쳐주는 가죽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드워프들은 인간인 서진에게 줄 게 많았다.
드워프들은 물건을 쓰는 것보다 만드는 것에 목숨을 바치는 종족이다 보니 그들의 창고에는 인간이라면 눈이 홱홱 돌아갈 만한 보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것이다.
과연 엘프가 드워프보다 더 지를 수 있을까 생각해보자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아리아나였다.
아리아나가 남모를 충격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란돌프는 서진의 몸에 남아있는 내복처럼 생긴 내부보호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진, 기왕 벗은 김에 그것도 좀 벗어보게. 아니 그러지 말고 그냥 다 벗는 것은 어떤가?”
“네? 여기서 발가벗기라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란돌프가 이제는 내복처럼 생긴 내부보호복과 속옷까지 벗어보라고 했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자 란돌프와 같이 온 열 명의 드워프 장인들이 서로 뭔가 열심히 상의를 하더니 급히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맞는 속옷과 겉옷을 가져왔다. 다행히 이들 덕분에 아리아나 앞에서 생으로 스트립쇼를 할 뻔한 위기는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서진의 무기에서 장비까지, 전신슈트에서 속옷까지 탈탈 털어간 란돌프는 그때부터 더는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만능박사처럼 척척 대답을 해주는 클론볼에게 정신을 빼앗겨 공방 한쪽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지구의 기술탐방에 들어갔다.
“이거 보자마자 옷부터 벗겨가니 뭐라고 할 말이 없네.”
-마스터, 아직 데이터가 부족하긴 하지만 그동안 드워프들의 신체반응을 살펴볼 때 이들에게는 그 어떤 불손한 의도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순수한 창작열의가 가득한 종족 같습니다.
“그건 참 다행이군. 덕분에 무기와 전신슈트 그리고 장비 등을 업그레이드 할 수 있게 됐군.”
-지구의 과학기술이 뛰어난 점이 있지만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과 마법도 절대 무시할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어떻게 저런 투박하고 굵은 손으로 이처럼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는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마이키는 드워프란 종족에 대해 나름 감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서진이 보건대 지금 지구의 과학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비단 드워프 종족만은 아니었다. 엘프, 묘인족, 호인족, 호미트 등 라인하르트 캐슬에 있는 모든 종족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끊임없이 드워프 공방으로 밀려들고 있는 각 종족의 명장과 장인들의 숫자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이들 유사인류와 수인족 장인들이 가지고 있는 수용성이었다. 클론볼이 뭐라고 지구의 과학기술에 대해 설명을 해주던 일단 그들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비단 그것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상식과 법칙에 위배되더라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긴 마법이 있는 세상이니 뭐든 불가능하겠어.’
서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들의 놀라운 수용성에 대해 이해하고 넘어갔다.
덕분에 큰 이득을 본 것은 유사인류와 수인족 장인들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이 제공하는 각종 정보와 기술, 마법진 등으로 인해 마이키는 빠르게 새로운 영역인 마도공학에 눈을 뜨고 말았다.
“아리아나!”
“네?”
서진이 멍한 표정을 짓고 생각에 잠겨있는 아리아나를 부르자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죠?”
“아, 미안해요. 내가 생각을 좀 할 게 있어서 그랬어요.”
아리아나는 일단 정중히 사과부터 했다. 서진은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덩달아 같이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뭐라고 물었죠?”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습니다.”
“잠시 만요.”
아리아나는 서진의 말에 바로 답을 하지 않고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눈치를 보니 모종의 방식을 이용해 누군가와 통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됐다. 잠시 후, 그녀는 서진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단 서진일행이 지구에서 온 것에 대한 것은 확인했답니다. 하지만 아직 유니언에서 서진일행과 지구에 대한 방침이 정해지지 않아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하네요. 최소한 사흘 동안은 라인하르트 캐슬에서 머물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처럼 계속 탑에 갇혀 있어야 하나요?”
“이런, 갇혀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로군요? 사실은 여러분을 마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탑의 방을 내드린 겁니다.”
아리아나는 커다란 눈을 크게 뜨면서 안타까워했다.
서진은 이미 한번 당할 뻔한 전력이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미소 그리고 그럴듯한 표정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자신들을 속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왠지 그녀의 표정과 행동은 일단 무조건 경계부터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저희가 라인하르트 캐슬에 온 것은 무조건 보호만 받겠다고 온 것이 아닙니다. 같이 마수와 싸우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저희들도 지내는 동안 마수들과 싸울 수 있게 해주세요.”
“진심이십니까?”
“네, 진심입니다.”
아리아나는 얼핏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는 지구도 아니고 마수들도 지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 왜 라인하르트 캐슬의 전투에 참여하려는 것인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서진의 생각이 나쁘지 않아보였다.
아니 마수를 향한 투지가 오히려 그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라인하르트의 손님으로 오셨는데 전투에 내보낸다면 아마 제가 크게 욕을 먹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의 직권으로 라인하르트 캐슬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전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리아나의 말에 서진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서진의 미소를 보자 왠지 참 남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프 남성은 키가 크고 훤칠하니 잘생기긴 했지만 서진 같은 박력은 없었다. 아리아나는 자신이 분명히 인간을 좋아하는 특이취향을 타고 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서진에게 살짝 끌린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옆에서 드워프 장인 수백 명이 서로 침을 튀어가며 새롭게 얻게 된 지구의 과학기술을 습득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 * *
콰하아아아아아!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살기 찬 포효가 북쪽에서 평원을 쩌렁쩌렁 울리며 넓게 퍼져나갔다. 그러자 동, 서, 남, 북 각기 네 방향에서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 커다란 포효가 차례로 들려왔다.
콰히이이이이!
쿠워어어어어!
푸화아아아아!
꾸어어어어어!
그것이 마치 신호라도 되는 양, 들판을 가득채운 수십, 수백만 마리의 마수들이 일제히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수들의 살기 찬 눈빛이 향한 곳!
그들이 목표로 하는 평원 중앙에는 도도한 자세로 우뚝 서있는 거대한 하얀 성이 햇빛에 비쳐 밝게 빛나고 있었다.
우두두두두두두!
우두두두두두두!
지축이 울리는 굉음이 일어났다. 사방에서 흙먼지가 일어나 점차 하늘 높이 솟구쳤다. 하얀 성의 남문을 노리고 선두에서 힘차게 달려가던, 머리에 왕관 모양으로 세 개의 뿔이 난 커다란 드레이크 한 마리가 고개를 위로 바짝 세웠다.
그러더니 힘차게 포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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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시원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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