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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장 - 연합조약
처벌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고…….
“능력자특별법도 살펴봤어?”
-네, 그렇습니다. 민연서는 지구가 아닌 외계의 행성에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지구바깥에서 일어난 일을 가지고 지구의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유니언과 유엔이 정식으로 연합조약을 맺는다면 가능해질 것입니다.
“연합조약을 맺는다고 해도 그 전에 저지른 일이라 소급적용이 안될 거야.”
-그건 맞습니다.
“흐음, 결국 풀어주는 수밖에 없나?”
-마스터께서 꼭 처벌하고 싶으시다면 그냥 조용히 제거를 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냥 죽여 버리라고?”
-네.
서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때 사랑했던 여자를 아무런 처벌 근거도 없이 그냥 죽여 버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민연서가 유니언 본부에서 했던 행동이 자신의 소신이었다고 말한다면 사실 지금 구금하고 있는 것도 불법이 될 겁니다. 참 애매한 장소에서 못된 짓을 저질렀네요.
메딕도 조금 난감해하는 목소리를 냈다.
“도대체 민연서는 왜 콜로니 프로젝트를 지구에서 실행하려고 했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리 마수들을 물리친다고 해도 엄청난 인명피해를 피할 수는 없었을 텐데요.
“혹시 그걸 노렸나?”
-네? 뭐 말씀이십니까?
“대량살상 말이야.”
-아! 혹시 대량살상을 이용해 악마를 소환하려고 했다는……. 뭐 그런 음모론을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메딕이 조금 황당해하자 서진은 바로 한발 뒤로 물러났다.
“아닌가?”
-민연서가 굳이 그래야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모티브가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동기가 없어.”
서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민연서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마수들에게 크게 한방 먹이고 싶었나?
그는 길게 한숨을 쉬더니 메딕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단 민연서는 철저히 감시를 하도록 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말이야.”
-물론입니다. 헤븐 가디언즈, 헤븐 시큐리티에서 특별감시대상으로 선정하고 근거리, 원거리에서 교차 감시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클론볼도 3대나 붙여놓았습니다.
“잘했어.”
-그런데 민연서의 가족에게는 뭐라고 말하실 생각입니까?
메딕의 말에 서진은 다시 가슴이 무거워졌다.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한때는 미래의 장인, 장모로 생각했던 분들이다.
자신을 친아들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셨던 민정식과 구혜란이 생각나자 서진은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아려왔다.
“지금부터 한번 연구해보자.”
-헤어지신 것은 다들 알고 계십니까?
“아니.”
-그것도 문제군요.
“차차 말씀드려야지.”
그러고 보니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연서와 헤어졌다는 말을…….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아시면 아마 크게 실망하실 것이다.
-좀 쉬시겠습니까?
“아냐. 일해야지. 밀린 일이 산더미인데…….”
메딕의 조심스런 말투에 서진은 심기일전의 자세로 어깨를 쫙 폈다.
-마스터! 기자회견이 끝나고 난 이후, 마스터를 만나고 싶다는 전화가 몇 배로 늘어났습니다. 청와대, 국회의원, 정부 고위관리, 국방부, 전경련, 능력청 등 종류도 아주 다양합니다.
“어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유를 알 것 같네.”
십중팔구, 유니언 대사와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이 아니라면 포션에 대해 얘기일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나 계속 이렇게 신비 전략으로 나가면 안 될까?”
-만나기 싫다는 말씀이시군요.
“응, 일일이 상대하기도 귀찮고, 친하지도 않으면서 굳이 친한 척 하기도 싫고…….”
정치인과 공무원을 만나는 일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재벌과 장군들을 만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좋지 않아도 좋은 척 해야 하고, 싫어도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게 이런 부류와의 만남이다.
마음 같아서는 멋대로 하고 싶지만 그럼 쓸데없이 적을 만들게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당신들이 태어난 이 조국에서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다 가시는 것을 보려면 절대 성질대로 막나가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그럼 헤븐 가디언즈의 대변인 서태희를 보내겠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오늘 보니까 아주 야무지더라.”
-그것보다 서태희 대변인 아주 미인이지 않습니까?
“미인은 미인이지.”
메딕이 뭘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서진은 뚱한 반응을 보였다.
-별 느낌 없으십니까? 건강한 남자는 미녀를 보면 신체의 일부가 저절로 반응을 일으킨다고 하던데요.
“글쎄. 여자가 아쉬웠다면 차라리 제니나 마리 중 하나를 잡았겠지. 그리고 미인을 따지자면 엘프 종족을 능가하기 어렵지 않겠어?”
-마스터의 취향이 엘프셨습니까?
“아니 내 말은 예쁘다고 무조건 다 반응을 한다는 말은 아니라는 거야.”
-흐음, 참고하겠습니다.
메딕은 뭔가 새로운 데이터를 수집했다는 목소리였다.
괜히 오해는 하지 말아야하는데…….
“그나저나 헤븐 그룹은 잘 돌아가지?”
-마스터가 없는 동안 헤븐 그룹은 나폴리 부회장이 잘 이끌었습니다. 신임 기획조정실장 프란시스코도 유능한 인재라는 것이 증명됐습니다. 헤븐 인더스트리는 오산해 사장이, 헤븐 우주항공국은 찰스 볼먼 사장이 맡아 잘 운영하고 있습니다. 헤븐 연구소는 해리스 뉴턴 신임 연구소장이 들어와 제1연구소와 제2연구소로 나뉘었고 헤븐 정밀은 최정학 사장이 맡게 됐습니다. 마스터의 부친이신 이만수 사장님도 헤븐 리사이클링을 잘 운영하고 계십니다. 나머지 계열사의 근황은 보고서를 참고해주십시오.
“훌륭하군. 헤븐 투자는 어때?”
-일단 헤븐 투자는 골드윈 사장 체제로 새롭게 재편했습니다. 지난번에 세계 각국의 증시에 대량의 풋옵션을 걸어놓은 것 기억하십니까?
“응, 기억하지.”
-투자한 자금의 몇 십 배의 이득을 남기는 초대박을 쳤습니다.
“다행이군. 자금이 부족하진 않겠어.”
생각보다 무척 담담한 말투에 메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쁘지 않으십니까?
“별로……. 처음에는 돈 버는 재미가 쏠쏠하더니, 그것도 어느 수준을 넘어가니까 별로 그렇게 크게 가슴에 다가오지 않더라고.”
-마스터의 정서가 점점 메말라가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만 민연서는 잊어버리시고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새로운 인연?”
서진은 새로운 인연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네, 이를테면 제니와 새롭게 시작해보세요. 제니의 신체반응을 보면 마스터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제니 정도면 최상위 0.1% 안에 드는 미녀에다 보기 드문 재원 아닌가요. 결정적으로 S급도 부럽지 않은 A급 힐러에다 버퍼인 듀얼 능력자잖아요.
“그렇지. 오히려 내겐 과분한 여자지.”
서진의 반응을 살펴본 메딕이 이번에는 마리를 언급했다.
-마리는 어떻습니까? 그녀는 이미 자기 입으로 마스터의 말이라면 뭐든지 따를 준비가 되어있다고 했잖아요. 마스터를 좋아하는 마음은 제니보다 마리가 더 클지도 모릅니다.
“마리, 참 예쁘고 충성스럽지.”
-그게 아니라면 아예 둘 다 가져버리세요.
메딕은 마리에 대한 반응도 시원치 않자 강수를 뒀다.
“둘 다? 에이, 그건 좀…….”
메딕은 서진이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또 다른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엘프 아리아나는 어때요?
“아리아나?”
순간 서진의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자신의 심장이 자꾸 두근거리는 걸까?
-엄청난 미녀잖아요. 거기에다 마법사에다 정령사인 듀얼 능력자고요. 아닌가요?
“으음, 잘 모르겠어. 나한테 이렇게 선택지가 많았는지 오늘 처음 알았어.”
-이제 그만 과거는 털어 버리시고 새 출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새 출발이라…….”
서진은 오늘따라 메딕의 조언이 유난히 무겁게 다가왔다.
‘메딕의 말이 맞아. 연서와의 인연은 이제 끝났어. 그녀와 나의 인연은 결국 여기까지 인거야. 이제 그만 나도 연서를 보내줘야겠구나.’
그렇게 마음을 먹자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잊는다고 하던데…….
서진에게 첫사랑이자 짝사랑은 민연서였다.
과거로 회귀하고 나서…… 연서를 만나고 난 뒤,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여자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연서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녀를 보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또르르르!
결국 그의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뜨거운 사내의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장막처럼 내려앉았다.
달빛이 그의 슬픈 얼굴을 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 * *
똑똑똑!
“들어오세요.”
마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헤븐 가디언즈 비서실 당직비서 사연정은 마리를 보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연정은 미소를 지으며 마리를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세요.”
“저……. 마스터를 좀 만나러 왔는데요.”
“어떡하죠? 방금 나가셨는데…….”
“아! 그래요? 혹시 어디 가셨는지 아세요?”
“그냥 던전에 들어가신다고 하시면서 나가셨어요.”
마리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어떡하지. 그냥 얘기하지 말까? 민연서한테 함부로 환상능력을 썼다고 혼날 텐데……. 그래도 직접보고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니야. 차라리 이렇게 안 계실 때 보고서를 써서 올려야겠다.’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보고서를 제출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마스터에게 보고서를 제출하고 싶은데요.”
“그럼 보고서 양식을 가져다 드릴게요.”
“고마워요.”
마리는 사연정 비서가 가져다준 빈 보고서 양식을 내려놓고 열심히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렇게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리면 7월7일 대격변을 시작으로 정확히 77일이 되는 9월21일, 이날은 절대로 민연서를 만나지 않겠지.’
앞으로도 마스터와 계속 같이 다니려면 강해져야한다.
레벨업을 열심히 하면 강해질 수 있다.
마리는 굳게 마음먹었다.
자신도 열심히 던전에 들어가기로 말이다.
그렇다고 중간에 서진을 만나는 것은 좀 곤란하다.
허락도 받지 않고 민연서에게 환상능력을 쓴 일!
분명히 야단을 맞을 것이다.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마스터에게 야단을 맞는 것은…….
“여기 마스터에게 올리는 보고서에요. 잊지 말고 꼭 전해주세요.”
“물론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바로 마스터에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연정 비서는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흔들었다.
마리가 곱게 접어 봉투에 넣은 보고서는 결재서류를 모아서 올리는 미결제 칸 맨 위에 살포시 올려졌다.
마리는 비서실을 나가면서 몇 번이나 자신이 올린 보고서를 쳐다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 모습에 사연정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뭐가 저렇게 걱정이 많으신지…….’
그녀는 시계를 쳐다봤다.
내일 새벽까지 아직 한참이나 시간이 남아있었다.
똑똑똑!
그때 밖에서 누군가 노크를 했다.
“네, 들어오세요.”
“청소하러 왔습니다.”
“오늘은 좀 일찍 오셨네요.”
사연정은 미소를 지으며 청소부 아주머니를 반겼다.
참 성격이 밝은 여자다.
사연정은 소파로 가서 보던 서류를 마저 확인했다.
자기 자리를 쉽게 청소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청소부 아주머니는 사연정의 마음씀씀이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청소부 아주머니는 일단 창문부터 활짝 열었다.
그녀가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쌩하고 바람이 들어왔다.
‘미결제 칸’ 맨 위에 올려놓았던 마리의 보고서가 바람에 날려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청소부 아주머니는 얼른 집어서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마리의 보고서는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닌 바로 옆, ‘결제 칸’ 에 들어갔다.
청소부 아주머니는 이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사연정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청소부 아주머니는 열심히 청소를 했다.
속으로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비서실이 광이 나도록 깨끗이 닦았다.
2차 마수웨이브가 일어나는 9월9일!
그 사흘 전에 일어난 일이다.
* * *
뉴욕에 있는 유엔본부가 통째로 여의도로 옮겨진 것만 같았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이 입법 활동을 하는 장소다.
그런데 지금!
어째 자국의 국회의원들보다 세계 각국의 정상들의 모습이 더 많이 보인다.
유엔의 각국 대사들도 바글바글하고…….
미국과 EU, 러시아와 중국!
지구의 패권을 쥐고 있는 강대국들이다.
이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 시도했다.
유니언의 특명전권대사 레이나를 뉴욕본부로 데려가려고 말이다.
실패했다.
유엔 사무국이 있는 케냐 나이로비, 오스트리아 빈, 스위스 제네바로도 초청했다.
이번엔 그녀에게 아예 싹 무시를 당했다.
미국, 유럽, 러시아, 중국 등 어디로든 모시려고 노력해봤다.
오히려 레이나의 반감만 샀다.
============================ 작품 후기 ============================
* 미리 스토리 다 짜여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아직도 다른 소리를 하시는 분들이 있네요.
** 작가는 글로 얘기해야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연참으로 제 심정을 토로합니다. ㅠㅠ
추천 한방씩 꽝꽝 찍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쿠폰, 후원 고맙습니다!
유쾌한 저녁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