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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장 - 대천사 미카엘
감히 평생에 한번 얼굴을 볼까 말까한 두 마신과 팔마왕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서진의 한마디에 자신의 온몸을 몸소 결박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혼돈으로 빠져가던 페이크의 생각은 팔마왕 중에 섞여있는 판테아를 보자 제자리로 돌아왔다.
페이크는 감정어린 묘한 시선으로 판테아를 쳐다봤다.
“아, 아버지?”
“아버지라니? 인간의 몸으로 오래 살더니 이제는 자신이 마족이라는 것까지 잊은 모양이구나. 넌 내가 만든 666번째의 마족일 뿐이다. 혹시 마족의 긍지까지 잊고 산 것은 아니겠지?”
마왕 판테아의 차가운 말에 페이크는 마치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왕이시여! 제가 실수를 했나이다.”
“괜찮다. 어차피 죽을 놈이니 그 정도는 용서해주마.”
“네에? 제가 죽다니요? 난 마왕께서 주신 임무를 최선을 다해 완수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페이크는 마왕 판테아의 말에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네 말이 맞긴 맞다. 그동안 아주 잘해줬다. 하지만 넌 한 가지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질렀어.”
“실수라니요? 제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입니까?”
“넌 주인님을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거였다.”
“주인님이라뇨? 마왕이신 판테아께 주인이 있다는 말입니까?”
“저기 계시지 않느냐?”
마왕 판테아가 겸손히 고개를 숙인 자세로 서진을 가리켰다.
“서, 설마 서진이 마왕 판테아의 주인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나만의 주인이 아니라 마신 탈론과 지온 그리고 팔마왕 모두의 주인이시다.”
“크헥! 그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페이크는 두 눈알이 튀어 나올 정도로 경악했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분수가 있지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았다.
페이크는 너무나도 엄청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순간 현실도피를 선택해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만 됐다. 이제 이놈과의 악연을 정리할 시간이다.”
“네, 마스터.”
서진은 더 이상 판테아와 페이크의 대화를 허용하지 않았다.
더 지독한 고문을 하고나서 죽일까 생각해봤다.
하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귀찮은 일이었다.
“이건 내가 너한테 받은 빚을 돌려주는 거야. 잘 가!”
“나,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거냐?”
“몰라서 물어?”
푸욱!
서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페이크의 가슴에 팬텀소드를 쑤셔박았다.
“크헉!”
페이크의 입에서 참혹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심장에서 보라색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고통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는 서진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그려졌다.
“아참! 너 아직 모르고 있구나. 넌 단순히 그냥 죽는 게 아니야. 영혼이 소멸되는 거야.”
“아, 안 돼!”
페이크의 입에서 피가 솟구치며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팬텀소드가 페이크의 영혼을 강하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페이크는 죽음의 고통을 참으며 사력을 다해 팬텀소드에 저항했다.
그러나 죽음을 경각에 둔 페이크에게는 애초에 팬텀소드에 저항할 능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하고 비참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스터급의 능력자 서진과 그의 소환수들의 눈에는 마치 3D영화처럼 생생하게 잘만 보였다.
페이크의 영혼이 팬텀소드로 빨려들어가는 모습은 정녕 참혹하고 그로테스크했다.
서진은 그 끔찍한 모습에 잠시 원한을 잊을 정도로 아주 살짝 후회가 되기도 했다.
“캬아아아아아아악!”
온몸에 닭살을 돋게 하는 페이크의 끔찍한 비명과 함께…….
결국 그의 영혼은 팬텀소드로 완전히 빨려들어갔다.
[띠링!]
그의 뇌리 속에 반가운 알림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서진은 굳이 그것을 확인하지 않았다.
아니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알 수 있었다.
아마 또다시 영력이 대폭 늘어났을 것이다.
“사이먼! 이놈의 사체를 치워라!”
“네, 마스터.”
바닥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는 페이크의 사체!
어느새 사이먼의 손길 한 번에 꺼지듯 사라져버렸다.
영혼이 소멸된 페이크의 사체는 유용한 자원이다.
리치왕 사이먼에 의해 그의 군단을 풍요롭게 살찌우는 양분으로 거듭나 영원히 아름다운 봉사를 하게 될 것이다.
“후우우우우우!”
서진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앓던 이가 쏙 빠진 것처럼 시원했다.
통쾌하게 복수를 하고 나자 온몸이 다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좀 더 살려둘 걸 그랬나? 치는 맛이 아주 일품인 놈이었는데…….’
서진은 약간의 아쉬움으로 인해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좋던 기분도 잠깐이었다.
회의실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벌벌 떨고 있는 민연서!
그녀의 상판대기를 보자 속에서 다시 열불이 솟구쳐 올랐다.
“이런 내가 잠깐 네년을 잊고 있었구나.”
“서진아! 용서해줘! 아니 살려주세요!”
서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연서는 서진을 향해 무릎걸음으로 기어왔다.
그녀는 서진의 다리를 꽉 붙잡고는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마치 서진의 다리를 놓치면 당장 죽기나 하는 것처럼 그녀는 콧물을 질질 흘려대며 간절하게 빌었다.
“저 좀 살려주세요. 절 용서해주세요. 제발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 절 때리지 마세요. 절 죽이면 안돼요.”
가만히 살펴보니 이미 민연서는 공포에 질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긴 바로 눈앞에서 서진의 무시무시한 폭력을 목격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니 그보다도 정신적인 지주였던 페이크가 서진에게 묵사발이 난 게 더 큰 충격이었다.
거기에다 페이크가 팬텀소드에 의해 영혼이 털리고 소멸되는 과정을 지켜봤으니 제 정신인 게 오히려 더 이상할 수도 있었다.
서진은 민연서의 턱을 잡아 거칠게 일으키며 차갑게 속삭였다.
“너라면 날 용서했을까?”
“네? 그럼요. 그러고 말고요. 전 분명히 용서했을 거예요.”
“그래? 그럼 나도 널 용서해야겠네?”
“그게 좋지 않을까요.”
민연서의 눈이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녀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살 방법을 찾느라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대고 있는 모습이었다.
“용서라…….”
서진은 잠시 용서의 의미를 생각해봤다.
“역시 서로 용서를 하는 것이 좋긴 하지.”
“마, 맞아요. 정말 서진은 착한 남자네요.”
“그래도 일단 좀 맞자.”
“네에?”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서진의 말에 민연서의 표정이 썩어났다.
쫘악!
부웅!
쿠당탕 쿵탕!
민연서의 몸이 허공을 날아갔다.
그녀의 입에서 옥수수 알갱이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며 벽에 처박혔다.
민연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용서라! 용서란 말이지.”
서진은 한쪽 벽에 처박혀 축 늘어져 있는 민연서의 몸을 노려보며 용서라는 단어를 계속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가 중얼거리는 단어와는 달리 그의 눈은 더욱 더 진한, 찐득한 살기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 * *
국립중앙박물관.
“생각보다 빨리 왔네?”
“그렇게 됐어.”
서진의 다정한 말에도 민연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자 정장을 잘 차려입은 마신 탈론과 신녀 이리나의 모습이 보였다.
[탈론! 오다가 무슨 일 있었어?]
[민연서가 12번이나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피식!
서진은 탈론의 말에 절로 웃음을 흘렸다.
민연서가 도망칠 것이라는 것은 아마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서진도 민연서에게 클론볼을 시작으로 마신 탈론과 신녀 이리나까지 붙여놓았던 것이다.
힐러에 불과한 민연서가 두 사람의 눈을 피해 도망친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널 용서해준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자꾸 도망치려고 그래?”
“미, 미안해.”
서진의 부드러운 말에 민연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었다.
여자의 직감인가?
그녀는 서진의 목소리와 눈빛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자 불안에 몸을 떨어야했다.
서진은 그녀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정말 섭섭하네.”
“내가 잘못했어.”
그의 말에 놀란 민연서가 얼른 사과했다.
그녀에게는 감히 그의 비위를 건드릴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야. 충분히 그 심정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이해해줘서 고마워.”
“그래. 부모님은 잘 만나고 왔어?”
“응.”
“작별인사도 잘 했어?”
“응.”
서진은 묻고 민연서는 답했다.
민연서는 서진이 부모님에게 가서 작별인사를 하고 오라는 말을 듣자 결국 올 것이 오고야말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서진이 부모님까지 해코지를 할까봐 최대한 간단하게 작별인사를 하고 집을 빠져 나왔다.
다른 차원으로 긴 여행을 하게 됐다는 말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부모님의 얼굴이 생각나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이 아파왔다.
그녀의 생각과 의지를 주장하던 주인, 페이크의 소멸로 인해 그녀를 옭아매는 모든 족쇄와 제어가 사라졌다.
그로인해 민연서는 나날이 정신이 맑아지고 정서가 회복되고 감정이 풍부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겪었던 미래의 아픈 기억조차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 이만 들어가자.”
“어디를?”
“어디긴 어디야. 국립중앙박물관이지.”
“여긴 왜?”
“…….”
불안에 떠는 민연서의 질문에 서진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서진은 민연서를 데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정문에서 겨울못을 돌아 본관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뚜벅뚜벅!
또각또각!
무슨 일인지 국립중앙박물관 본관 안에는 관람객이나 방문객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서진이 사전에 국립중앙박물관을 통째로 빌린 것이다.
꿀꺽!
민연서는 그런 모습에 불안감이 더욱 증폭됐다.
“서진아, 여긴 왜 온 거야? 혹시 같이 관람하려고 왔어?”
“특별전시관을 보려고 왔어. 이제 거의 다 왔네.”
서진은 한손을 들어 특별전시관을 가리켰다.
민연서는 고개를 들어 특별전시관 한쪽 벽에 내려진 현수막을 봤다.
‘공룡화석특별전시관? 어휴! 별 것 아니잖아. 괜히 놀랐네.’
현수막을 읽은 민연서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마음이 진정되자 민연서는 서진의 눈치를 보면서 어떻게 해야 서진의 마음을 다시 차지할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숨겨둔 연서의 연정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서진아, 이렇게 둘이 오붓하게 관람을 온 게 얼마만이지?”
“글쎄? 난 기억이 잘 안 나네.”
서진이 별 흥미 없는 표정을 짓자 민연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계속 과거의 일들을 하나씩 열거하면서 그의 감정을 자극했다.
하지만 서진은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꾸준히 걸어서 특별전시관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우와! 이건 백악기시대의 대표적인 육식공룡이라는 폭군, 티라노사우루스 아냐?”
“맞는 것 같군.”
민연서는 서진의 주의를 끌기 위해 일부러 살짝 과장되게 행동했다.
그러나 서진은 화석으로 남은 뼈를 이어 붙여 만들어 놓은 거대한 티라노사우루스의 모습을 보고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뭐 특별히 찾는 것 있어?”
“응, 바로 이거야.”
“이건? 크로마뇽인(Cro-Magnon man) 아냐?”
“맞아. 프랑스 남서부, 레제지(Les Eyzies)의 크로마뇽(Cro-Magnon) 동굴에서 발견된 화석 인류지. 기원전 1만~4만 5천 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에 산 아주 뛰어난 수준의 동굴 벽화를 남기기도 했지.”
“난 네가 인류의 기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어.”
민연서는 꽤나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진과 눈이 마주치자 예쁘게 한번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난 인류의 기원 따윈 관심 없어.”
“그, 그래?”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이게 진짜 화석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만든 모조품이냐는 거야.”
민연서는 서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진은 민연서의 얼굴을 잠시 지그시 쳐다봤다.
그는 품속에서 라이프베슬 목걸이를 꺼내 목에 걸었다.
그리고 전시관의 유리문을 활짝 열고는 안으로 들어가 크로마뇽인의 해골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 모습에 민연서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좌우로 돌려 주변을 살펴봤다.
“너 이렇게 마음대로 해도 돼?”
“안될게 뭐가 있어? 잠시 빌려 쓰는 건데…….”
“빌려 써?”
민연서의 눈이 의문으로 가득해졌다.
“민연서!”
“응?”
“널 용서할게.”
민연서는 서진의 말에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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