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비록 연습 경기지만 승부욕 만땅의 선수들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29분까지 진행된 결과는 0:0.
양 팀의 공격수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으나 수비진의 집중력에 날이 서 있었다.
“이번 코너킥까지 하고 끝낸다!”
토니 애덤스 코치가 소리쳤다.
키커는 설리 문타리.
문타리야, 아까 내 헤더 봤지?
잘 좀 띄워 줘 봐, 크허헉!
왜 캠벨 형이 나한테 붙어?
아무래도 내 뚝배기를 의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슬쩍슬쩍 유니폼을 잡아채는 캠벨.
훗. 스무 살의 나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이런 몸싸움을 당할 때 위축되곤 했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죽음에서 돌아온 사나이.
교통사고로 죽은 본체(?)는 30대 중반의 닳고 닳은 노장 선수라는 말씀.
캠벨과 마찬가지로 나도 유니폼을 맞잡아 당겨 주었다.
그 순간 멋진 궤적을 그리며 휘어져 들어오는 문타리의 코너킥.
역시 킥력 죽인다!
캠벨과 직접 몸을 맞부딪쳐서 나에게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잡고 있던 유니폼을 놓으면서 순간적으로 낙하지점을 향해 스타트를 끊었다.
질세라 쫓아오는 캠벨.
하지만 나는 이미 하늘을 날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높이에서 나의 방아 찍기 헤딩이 작렬했다.
천하의 솔 캠벨도 그저 바라볼 수밖에.
그라운드에 한 번 튕긴 공이 빠른 속도로 골문을 향해 날아갔다.
왼쪽 상단 구석에 꽂히는 코스.
‘됐다!’
세리머니를 고민하던 찰나.
팅――
맑고 고운 소리를 내며 야속하게 골포스트를 맞춘 공은 골문 앞에서 대기 중이던 데이비드 누젠트의 발 앞에 톡 떨어졌다.
그대로 득점.
내가 0.88골은 만들었는데….
썩을!
그래도 누젠트가 양심은 있는지 내게 다가와서 하이파이브를 건넸다.
짜식… 근데 그거 아니?
너, 이번 시즌에 한 골도 못 넣을 예정이란다.
역사가 바뀌지 않는다면 말이지.
* * *
아무리 데이터가 중요한 현대 사회라지만, 선수 평가에 있어서 임팩트는 여전히 중요한 요소다.
연습 경기 30분 동안 내가 만들어 낸 의미 있는 장면은 클리어링 1회, 태클 성공 2회가 전부였지만 막판 캠벨을 이겨 내고 호쾌하게 터뜨렸던 헤더슛은 코칭 스태프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 증거가 바로….
“오늘 센터백 선발은… 리차드 더피하고 정백강!”
우오예에스!
비록 2군 경기이긴 하지만 주전 출장이라니!
그것도 팀에 합류한 지 1주일이 채 안 된 생짜 신인인데!
이건 대단한 성과다.
상대는 브렌트포드 FC.
리그2, 그러니까 4부 리그에 소속되어 있는 팀이다.
하부 리그 팀과의 친선 경기라 레드냅 감독이 아닌 토니 애덤스 코치가 지휘하긴 하지만, 수석 코치이기도 하고 무지막지한 선수 커리어를 자랑하는 애덤스의 팀 내 발언권은 굉장히 강한 편.
오늘 눈도장을 확실히 찍어야겠다.
우리는 4―2―3―1 전형.
브렌트포드는 과감하게 4―4―2로 나섰다.
아니, 아무리 2군이라도 프리미어리그 팀에게 투톱을 쓰다니?
후회하게 될 거다, 이놈들아.
우리 팀 원톱 역할을 맡게 된 선수는 나와 악연이 있는 인물이다.
울산 현대에서 뛰었던 다니옐 수보티치.
내가 K리그에서 뛸 때 수보티치한테 알까기로 제쳐진 다음에 실점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욕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알아?
오늘 너무 잘하진 마라, 짜증 나니까.
킥오프.
브렌트포드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4부 리그 팀, 포메이션은 4―4―2.
이건 대놓고 킥 앤 러시(라고 쓰고 롱볼 축구라고 읽는) 전략을 사용하겠다는 의지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시작하자마자 공을 앞으로 뻥 내질렀다.
그런데 어쩌나.
상대 팀에는 세계에서 헤더를 제일 잘 따내는 수비수가 버티고 있는데 말이야.
내가 머리에 맞힌 공이 중앙 미드필더 마크 윌슨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윌슨은 다시 오른쪽 윙인 프랭크 송고에게.
송고가 스피드를 살려 측면 돌파를 시도했다.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브렌트포드 수비진.
크게 개인기를 부리지도 않았는데 치달에 속수무책이었다.
붙어 있는 수비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편안하게 올린 송고의 낮은 크로스가 수보티치의 오른발에 제대로 걸렸다.
경기 시작하자마자 터진 선취 득점.
하필이면 수보티치냐.
음… 그래도 지금은 같은 팀인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내가 참 옹졸한 놈인가 보다.
* * *
음후홧홧.
오늘은 최고의 날이다.
수보티치가 골을 넣는 바람에 기분 나쁘게 출발한 경기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베스트였다.
경기 결과는 4―0.
주전 센터백으로서 무실점 경기를 이끌었다는 것도 물론 만족스럽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다.
4골 중 2골이 내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
천하의 솔 캠벨도 감당하지 못한 나의 헤더를 4부 리그 수비수들이 막아 낸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코너킥 하나, 프리킥 하나를 이마로 직격해서 멀티골을 기록했다.
고등학생 때 수비수로 전향한 이후에 한 경기에서 2골을 넣은 건 처음이다.
“헤더 죽여주는데?”
수보티치 녀석, 내 속도 모르고 쫄래쫄래 따라와서 나를 칭찬하고 안아 주는데 기분이 복잡미묘하다.
내가 이미 아는 사람이 나를 전혀 모른다는 것.
경험해 보지 못한 이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상황.
경기 끝나고 들어가는데 애덤스 코치가 나를 보며 오른손 엄지를 추켜올려 주었다.
알아요, 알아.
내가 좀 쩔었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수비수가 2골을 넣는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이던가.
그것도 딱히 공격 가담을 한 게 아니라 세트피스에서만.
오늘 경기 보고서가 분명히 레드냅 감독에게 전달될 텐데, 나의 활약상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으려나.
회귀 후 치른 첫 번째 경기부터 느낌이 좋다.
역시 죽길 잘했어.
* * *
흐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동시에 생겼다.
먼저 좋은 소식은 브렌트포드전 이후 치러진 2번의 1군 친선 경기에서 내가 주전으로 출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쁜 소식은?
최대 라이벌인 실뱅 디스탱 역시 2경기를 선발로 뛰었다는 것.
아무래도 레드냅 감독이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 같다.
와중에 캠벨 형님은 역시 부동의 주전.
이제 개막전까지 남은 친선 경기는 딱 한 게임.
“안녕….”
“어, 그래. 안녕….”
디스탱 녀석도 의식하고 있는지 영 사이가 어색했다.
자꾸 녀석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사실 디스탱은 1977년생.
나보다 9살이나 많은 형이다.
하지만 이 비정한 축구판에 형 동생이 어디 있겠는가.
나보다 잘하면 형이고 못하면 동생인 거지.
현재 시점에서 냉정하게 나와 디스탱을 비교하면?
수비력은 솔직히 디스탱이 좀 낫다.
높이야 내가 확실히 우위에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밀리는 게 사실이다.
발도 디스탱이 좀 더 빠르고, 몸싸움 능력도 그렇고, 경험에서 나오는 안정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아저씨, EPL에서만 6시즌 동안 200경기 넘게 뛴 베테랑이다.
다른 리그 경력도 합치면 프로에서 300경기 이상 소화했단 말이다.
사실 나도 죽기 전까지 포함하면 적잖게 뛰긴 했지만 거의 다 벤치 출전이라….
에이, 옛날 얘긴 그만하자.
가슴 아프니까.
어쨌든 수비수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수비력에서 밀린다면 끝인 거 아니냐.
꼭 그렇진 않다.
공격력은 내가 확실하게 앞서니까.
현재 포츠머스의 득점 리더가 누군지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나야 나, 나야 나.
그래, 바로 나다.
무려 3골이나 넣었다.
물론 머리로만.
브렌트포드전까지 포함하면 5골이다.
경기당 1골을 넣는 수비수가 있다?
디스탱이 아무리 수비를 잘한들, 나보다 실점률을 1골이나 낮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학적으로 봤을 때 나를 기용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은가!
라고 레드냅 감독에게 강변하고 싶다….
쫄보라서 그렇게는 못 하지만.
* * *
“오늘 경기 전반은 디스탱이, 후반은 백강이 뛸 거야.”
이렇게 노골적일 수가.
레드냅 감독의 미소가 어쩐지 음흉하게 느껴졌다.
시즌 개막 전 마지막 친선 경기인 핀 하프스와의 일전.
여기에서의 활약을 통해 캠벨의 파트너를 결정하겠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아일랜드 1부 리그 소속인 핀 하프스는 객관적 전력에서 포츠머스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팀.
나에게는 호재다.
어차피 실점할 확률은 낮으니까, 내가 임팩트 있는 헤더 득점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레드냅 감독의 눈에 확 띄리라.
핀 하프스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전형적인 창과 방패의 대결 양상.
우리 팀은 초반부터 파상 공세를 퍼부었고, 핀 하프스는 텐백을 구사하며 버텼다.
의도된 텐백이라기보단, 공격이 워낙 거세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려앉은 모양새였다.
문타리가 날린 회심의 중거리슛은 종이 한 장 차로 크로스바를 스쳤고, 페널티 박스 안쪽에서 절묘하게 감아 찬 은완코 카누의 슈팅은 몸을 날린 골키퍼의 미친 선방에 막혔다.
벤자니는 니코 크란차르의 절묘한 스루 패스를 논스톱 로빙슛으로 연결했지만 공은 왼쪽 골포스트를 맞추고 아웃되었다.
지독히도 따르지 않는 골운.
공격진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슬금슬금 올라가던 우리의 수비 라인은 전반 40분이 지날 무렵엔 거의 중앙선에 맞붙을 정도였다.
가만… 이런 흐름은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순간 핀 하프스의 골키퍼 에디 번이 있는 힘을 다해 내지른 골킥이 한 번에 최전방으로 연결되었다.
헤더로 커트하기 위해 나서는 디스탱.
그런데… 낙하지점을 잘못 잡고 말았다.
한껏 점프한 디스탱의 머리 위를 무심히 지나치는 공.
전반전 볼 터치 횟수가 0에 수렴하던 스트라이커 스튜어트 그레이가 눈을 빛내며 수비진의 뒷공간을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맞은 1:1 찬스.
입술을 깨물며 쫓아가는 디스탱.
한참 늦게 출발했는데도 긴 다리를 성큼성큼 내딛는 디스탱의 스피드는 장난이 아니었다.
결국 그레이가 슈팅하기 직전 태클로 공을 빼내는 데 성공했는데….
과장된 동작으로 크게 넘어지는 그레이.
삑――
휘슬이 길게 울렸다.
아무리 봐도 시뮬레이션 액션 같았지만, 주심은 파울이라고 판단했고 손가락은 페널티 라인을 가리켰다.
“아니! 말도 안 돼요! 파울도 아닐뿐더러, 설령 파울이라고 해도 라인 바깥이었다구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판정.
당사자인 디스탱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소리쳤고, 캠벨을 비롯한 고참급 선수들도 주심을 둘러싼 채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주심.
“와! 진짜 너무하네! 어떻게 저런 판정을 해?”
입을 닫고 있자니 자꾸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기가 어려워서, 나는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불평을 해 댔다.
할리우드급 메소드 연기를 과시한 그레이가 자신이 얻어 낸 페널티킥을 호쾌하게 성공시켰다.
우리 골리인 데이비드 제임스가 방향은 정확하게 잡았지만 공이 너무 빨랐다.
핀 하프스의 선제골과 함께 전반전 종료.
중요한 경기에서 오심의 피해자가 된 디스탱이 물통을 집어 던지며 화풀이를 했다.
오, 신이시여.
저를 얼마나 도와주시려는 겁니까.
이 은혜에 꼭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