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뚝배기로 발롱도르-3화 (4/176)

3화

하프타임.

해리 레드냅 감독의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시즌 개막 전 마지막 평가전 격인 경기.

그런데 체급 차가 많이 나는 상대에게 끌려가고 있다?

충분히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다.

“슈팅 개수 18 대 2, 그런데 득점은 0 대 1. 이거 문제 있지 않아? 이게 리그 경기였다고 생각해 봐. 용서가 되겠어? 용서가 되겠냐고?”

안 되고말고요, 감독님.

대체 누가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겁니까?

혹시 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실뱅 디스탱은 아니겠죠?

에이 설마요.

“내가 항상 말하지만, 포메이션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어. 축구는 선수가 하는 거거든. 난 우리 팀 선수들이 저쪽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나 봐?”

말을 하면서 더 화가 치미는지 레드냅 감독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그래서 이름이 ‘레드’냅인가?

껄껄, 역시 나의 유머 감각은 일품이야.

나중에 유명해지면 예능 출연도 문제없겠어.

그나저나 우리 감독님 많이 흥분하셨네.

후반전에는 전혀 달라진 수비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걱정 꽉 붙들어 매세요.

“자자, 전반전 내용은 잊어버리고 후반전에는 아주 박살을 내 버리자고!”

감독의 등쌀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건 역시 주장인 솔 캠벨.

사실 실점 장면은 수비진 입장에서는 좀, 아니 많이 억울했다.

완벽하게 상대를 틀어막다가 오심 한 방에 무너져 버린 거니까 말이다.

분위기 반전을 위해서는 앞서 무수히 많은 찬스를 날렸던 공격진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아니면 뭐, 이 정백강 님이 한 건 해 주거나.

후반전 시작.

레드냅 감독의 ‘헤어드라이어’ 전법이 효과가 있었는지 우리 선수들이 한층 의욕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아직 팀 내 입지가 확실하지 않은 선수들은 발에 모터라도 달린 것 같았다.

볼 점유율은 체감상 95:5 수준까지 올라갔다.

문제는 오늘 축구의 신이 노골적으로 핀 하프스의 편을 들어 주고 있다는 사실.

팅――― 팅――― 팅――― 팅―――

골대만 몇 번을 맞추는 거냐 도대체.

결정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한가할 때 고개를 힐끗 돌려 벤치 쪽을 바라보니 레드냅 감독은 폭발 직전.

바야흐로 영웅이 출현할 때가 됐다.

영웅이 누구냐고? 당연히 나지!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소속팀이지만 포츠머스는 빈말로라도 ‘창의적인 축구’를 하는 팀이라고 할 순 없었다.

지금처럼 상대방이 잔뜩 웅크리고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여유 있는 측면으로 공을 보내서 크로스를 무한으로 즐기는 것.

팬들이 이 경기를 보고 있다면 복장 터지는 전개였겠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기회였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전진, 점점 더 앞쪽으로 포지셔닝을 했다.

페널티 라인을 철옹성처럼 에워싼 핀 하프스 수비진은 나에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우리의 플레이 메이커인 니코 크란차르가 어떻게든 골문 근처로 공을 투입하려다가 여의치 않자 고개를 저으며 왼쪽 측면으로 낮고 빠른 패스를 보냈다.

사실상 이번 시즌 주전 레프트 윙어로 낙점받은 설리 문타리가 트래핑을 일부러 길게 가져가며 순간적으로 돌파 시도.

상대 수비가 재빨리 따라붙었지만 크로스를 제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타이밍 이즈 나우!

내가 올라가면 뒷공간이 비긴 하지만 캠벨 형님이 막아 주실 거야.

주장을 안 믿으면 누굴 믿겠어?

문타리가 나의 위치를 확인했는지 칼날 같은 크로스가 정확하게 내 머리 쪽으로 날아왔다.

짜식, 너도 이 형님한테 기대를 걸고 있었구나?

아, 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데 문타리가 2살 형이다.

현재 나의 위치는 페널티 라인 바로 위.

이렇게 멀리서 헤더슛을 시도할 거라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퍼어어어엉!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충돌음과 함께 빠른 속도로 골문을 향해 진격하는 공.

여러 차례 신들린 선방으로 우리 팀의 예봉을 꺾었던 에디 번이었지만, 전혀 예상 못 한 강슛, 그것도 구석으로 꽂히는 공을 반사 신경만으로 막기엔 클래스가 좀 모자랐다.

그물이 출렁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바로 문타리에게 달려갔다.

“크로스 미쳤다? 너무 날카로워서 베는 줄 알았어.”

“네 헤더가 더 미쳤어. 어떻게 그 거리에서 그런 파워로 꽂아 버리냐?”

주고받는 칭찬 속에 쌓여 가는 팀 케미.

뒤따라온 동료들이 나를 얼싸안았다.

“뒤도 안 돌아보고 올라가길래 나중에 혼내 주려 했는데. 잘했다, 붹강.”

“주장이 막아 줄 거라 믿었어.”

캠벨에 대한 정치까지 완벽했다.

나중에 감독님한테 한 말씀 해 주세요.

내 파트너로는 디스탱보다 백강이 낫다고 말이죠.

두 배는 좀 아쉽고, 세 배 정도?

약팀이 강팀을 상대할 때는 잘 버티다가도 특정 순간부터 우르르 무너지는 경우가 흔하다.

오늘 경기에서 핀 하프스가 딱 그랬다.

시발점이 된 건 물론 나의 동점골.

이후에는 골 축제가 벌어졌다.

벤자니 해트트릭, 은완코 카누 2골, 크란차르는 초장거리 중거리포로 피날레.

도합 7―1로 대승을 거뒀다.

팀이 이겼지만 디스탱의 표정은 뭐 씹은 것처럼 구겨져 있었다.

형, 그러게 좀 잘하지 그랬어.

그래도 포기하진 마.

열심히 하다 보면 또 기회가 오지 않겠어?

물론 상대가 나라는 게 좀 재앙이긴 할 거야.

* * *

“저거, 너희 나라 국기 아냐? 2006년 월드컵 때 본 기억이 나.”

캠벨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관중석을 가리켰다.

“맞아, 기억력 좋네! 우리 국기의 이름은 ‘태극기’라고 해.”

“퉤국끼?”

“발음 아주 좋네. 굿굿.”

국가대표 경기도 뛰어 본 나지만 잉글랜드에서 보니 또 기분이 색다르다.

내가 이렇게 애국심이 투철한 사람이었던가.

울컥하고 눈물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나를 응원해 주기 위해 여기까지 오시다니.

좋은 경기력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더비 프라이드 파크.

리그 개막전 상대인 더비 카운티의 홈구장이다.

“오늘 수비 라인은… 헤르만, 로렌, 캠벨, 그리고… 백강!”

토니 애덤스 코치가 선발 라인업을 발표하는 순간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었다.

간절히 원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던 목표를 이루고야 말았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 진 않다.

나의 새로운 역사는 막 시작되었을 뿐.

기적처럼 찾아온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 꽉 붙잡을 테다.

나의 데뷔전 상대로 더비 카운티는 아주 이상적인 상대다.

원정 경기이긴 하지만 올해 EPL로 올라온 승격팀이니까 말이다.

무실점은 기본에, 가능하면 공격 포인트까지 올리는 게 오늘의 목표.

머리 스타일에도 힘을 바짝 줬다.

박지승 선배한테 밀려서 생중계는 안 되지만, 나중에 녹화 중계가 한국에 나갈 예정이라고 들어서다.

이거 이거, 축구에 집중하고 싶은데.

한국에서 막 광고 들어오고 이러면 곤란한데.

뭐, 그래도 (광고)주님이 원하신다면 무조건 달려갈 거야.

“몇 살이니?”

입장 대기가 심심해서 나와 같이 들어갈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갈색 곱슬머리에 앞니 하나가 없는 귀여운 남자아이.

“왜요?”

헛, 왜요는 일본 담요고.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냉랭하다.

어른스럽게, 침착하게, 당황하지 말고.

“비밀이구나? 그럼 형 응원 좀 해 줄래? 오늘 첫 출전이라 긴장돼서 그래.”

이것이 ‘연륜’이라는 것이다.

“싫어요. 더비 팬인데 선착순 밀려서 이리로 왔단 말이에요.”

이유가 있었구나.

미안하다.

꼬마와 나의 만담을 듣고 있었는지 캠벨이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이쒸, 비웃지 마요. 주장.

처음이라 설레서 그래요. 설레서.

* * *

킥오프.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몸이 굳는 느낌이다.

지금 필요한 건 마인드 컨트롤.

얼지도 말고 떨지도 말자.

경기에만 집중해, 정백강!

양 팀 모두 4―4―2 포메이션을 들고나왔다.

참 잉글랜드스럽다고 해야 할까.

홈팬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 초반부터 강력하게 압박해 오는 더비.

부상에서 막 회복해 몸 상태가 100%가 아닌 우리 미드필더 션 데이비스가 공 처리를 늦게 하다가 인터셉트를 당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전력 질주를 시작하는 더비 선수들.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어차피 기본 전력에서는 밀리니까 어수선한 초반에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으로 보였다.

오른쪽 측면으로 뿌린 패스를 상대 윙어 크레이그 패건이 잡아 냈다.

그대로 얼리 크로스 시도.

“마이 볼!”

낙하지점을 정확히 포착한 캠벨이 크게 소리치며 뛰어올라 헤더로 끊어 냈다.

역시 듬직 그 자체에으아아?

아니.

우리 미드필더들은 대체 뭐 하냐?

공을 뺏겼으면 수비 가담을 해 줘야 될 거 아냐?

멀리 가지 못한 공을 향해 달려드는 상대 미드필더 맷 오클리.

주변에 방해하는 선수가 아무도 없었다.

내가 급히 뛰어나갔지만 거리가 좀 있는 상황.

뻐엉――

오클리의 오른발에 제대로 얹힌 하프발리 중거리슛이 데이비드 제임스의 손끝을 스치면서 골문 좌측 상단에 꽂혔다.

우와아아아아아악!!!

3만 2천여 명이 운집한 프라이드 파크는 순식간에 광란의 도가니로 탈바꿈했다.

EPL 승격을 진두지휘한 팀의 주장이 개막전에서 환상적인 첫 득점을 기록했으니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무실점의 꿈이 단 5분 만에 박살 나 버렸다.

아…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가 너무 가슴 아파 보인다.

* * *

아무래도 단단히 호구를 잡힌 것 같다.

중원 싸움에서 더비가 완승을 거두면서 경기 역시 일방적인 상대 페이스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승격팀 상대로 이럴 수가 있나.

첫 골 먹히고 멘붕이 왔는지 애들이 정신 놓고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데이비스 쟤는 다 낫지도 않았는데 왜 투입한 거야?

물론 이유는 있다.

우리 중원의 핵인 니코니코니… 아니 니코 크란차르가 개막을 이틀 앞두고 발목 부상을 당한 것이다.

대외적으론 훈련 중 다친 거로 되어 있는데, 사실은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져서 참사를….

좀 어리숙하긴 하지만 축구장에서는 가장 기술적인 크란차르가 없으니 상대 압박에 정신을 못 차린다.

이래서 탈압박, 탈압박 하는구나.

미드필더 놈들 덕분에 수비진은 죽을 맛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더비도 자신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를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원래 더비는 191cm의 장신 스트라이커 스티브 하워드의 머리를 겨냥한 롱볼 플레이를 즐기는 팀인데 전담 수비수가 하필이면 나였다.

높이로만 따지면 하워드도 EPL에서 충분히 손에 꼽힐 만한 선수.

하지만 나는 격이 다르다.

지난 몇 번의 공중볼 경합에서 내가 완승을 거두자 하워드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크하하.

<노블레스>의 명대사가 떠오르는군.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란다.

몰아붙이긴 하는데 끝내 방점을 못 찍은 더비는 결국 그 대가를 치렀다.

데이비스가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심정으로 시도한 회심의 장거리 패스가 상대 오프사이드 라인을 완전히 허물어뜨린 것.

벤자니가 아프리카인 특유의 쫄깃한 탄력을 과시하며 쇄도, 골키퍼가 나온 것을 확인한 후 멋들어진 로빙슛을 성공시켰다.

그래, 진작에 좀 그렇게 할 것이지!

그나저나 코너킥이나 프리킥 좀 얻어 주지 않을래 얘들아?

이 정백강이가 골이 마렵단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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